#06.
아시카의 시선은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햇살이 가득 들이치는 통유리창이나 그 너머 꽃봉오리가 가득 맺혀있는 장미정원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소곤거리는 귀부인들의 대화 소리도 아득하게 들려 온다.
“제가 살롱 일정을 빠르게 잡았나 봅니다, 레이디 이그레인.”
“아.”
아시카는 순간 눈에 힘을 주며 정신을 차렸다. 내내 잠을 이루지 못했더니 이런 실수를 하고 말았다.
“아니에요, 남작 부인. 겨우 한 달에 한 번뿐인 걸요. 더 미뤄지면 제가 서운해요.”
사교계에 거의 나서지 않는 아시카가 유일하게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살롱이었다. 유쾌하고 괴짜 같은 이스나 남작 부인은 고루한 일상에 단비 같은 사람이었다.
“함께 다니던 호위 기사는 오늘 안 왔나 봅니다.”
“잔느 말인가요?”
아시카의 대답에 남작 부인은 가볍게 긍정했다.
“워낙 눈에 띄는 분이라서요. 여자 기사는 흔치 않잖아요. 아이도 있다면서요?”
“네. 세 살, 여섯 살 꼬마가 둘씩이나 있어요.”
잔느의 아이들 이야기가 나오자 아시카의 입가가 절로 올라갔다. 자주 볼 수는 없지만 제 호위 기사를 빼다 박은 아기들은 퍽 사랑스러웠기 때문이다.
소소한 이야기는 살롱의 문이 열리면서 중단되었다. 손님이 도착했다고 고하는 하인의 목소리는 뒤이은 여자의 목소리에 파묻혔다.
“어머, 제가 너무 늦게 온 모양이네요. 죄송해요, 이스나 남작 부인.”
성량이 풍부한 목소리였다. 크지 않은데도 확 잡아끄는 또렷한 음성에 참석자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아, 레이디 슈베른이신가요?”
남작 부인은 찡그렸던 표정을 빠르게 수습했다.
갑작스러운 방문객은 오늘 처음 살롱에 참석하겠다고 명단을 보내온 레이디였다. 첫 참석에 지각까지 해놓고도 여자는 당당하게 들어와 안내받은 자리로 다가갔다.
“네. 글레노아 슈베른이에요. 어제까지 멀쩡하던 마차가 하필 오늘 같은 날 말썽을 부리지 뭐예요.”
“저런, 다친 사람은 없어요?”
“잠깐 수리하느라 시간이 지체됐을 뿐이랍니다. 부디 너그럽게 양해를 부탁드려요.”
글레노아의 등장으로 살롱의 분위기가 묘해졌다. 모임 시간에 늦었다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참석자들의 시선이 아시카와 글레노아 양쪽을 오갔다. 조심스럽게 먼저 입을 연 것은 중년의 귀부인이었다.
“그러고 보니 두 분 다 흔치 않은 외모를 가졌네요.”
뒤늦게 아시카를 발견했는지 글레노아도 눈을 크게 떴다.
눈에 띌 만큼 새카만 머리칼에 검은 눈동자. 제국에서는 보기 어려운 외양을 지닌 두 여자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그레인 소공작님이시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글레노아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살짝 상체를 숙여 인사했다.
기묘한 느낌이 들어 아시카 역시 상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슈베른이라.’
수도의 귀족 가문 이름은 대부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못 들어 본 이름이라면 아마도 지방 귀족일 터.
구불구불 흘러내린 새카만 머리칼을 노란색 공단으로 엮어 장식하고 노란색과 짙푸른 색이 뒤섞인 드레스는 보색대비가 강렬했다. 글레노아는 만개한 꽃처럼 화려하게 아름다운 여자였다.
반면 아시카는 신분에 걸맞지 않을 만큼 수수했다. 눈에 띄지 않는 옅은 베이지색에 장식을 최소한으로 한 드레스는 부피감이 거의 없었다.
잠시 산책을 나온 것처럼 가벼운 옷차림이었다. 그래서인지 두 여자의 대비가 더욱 극명하게 느껴졌다.
묘해지는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남작 부인이 나섰다.
“그러고 보니 오페라 가수라고 들었는데. 맞나요, 레이디 슈베른?”
“어머, 소개해주신 분께서 이미 말씀을 해주셨군요.”
글레노아는 환한 미소로 질문에 긍정했다. 바로 맞은편에 앉아있던 귀부인이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제가 오페라를 자주 보러 가는데 본적이….”
“팜레드 거리의 오페라 하우스에서 자주 공연을 한다고 해요.”
“아아.”
남작 부인의 대답에 참석자들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팜레드는 평민들의 거리. 어지간한 귀족들은 찾지 않는 곳이기에 얼굴을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아시카는 찻잔을 입에 대며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귀족 여인이 얼굴을 드러내고 직접 돈을 번다고? 그것도 평민들이 주로 가는 곳에서.’
흔한 경우는 아니었다. 가문이 완전히 몰락한 것이 아니라면.
하지만 글레노아의 몸에 걸친 드레스와 보석은 모두 최고급품이었다.
‘후원자가 있는 레이디로구나.’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평소라면 관심 없었을 상대가 유독 거슬리는 이유는 자신과 비슷한 외모 때문일까.
‘누가 후원자일까. 팜레드면 부유한 상인이려나?’
하지만 귀족으로서 자존심이 남아있다면 돈 많은 평민보다는 귀족일 가능성이 크다.
“그나저나 이번에는 모주의 궁전에서 연회가 있다면서요?”
“아, 맞아요. 거기서 연회가 열리는 건 정말 오랜만이네요. 벌써 초대장을 발송했다고 들었어요.”
“지난번에 황궁 연회가 일찍 끝난 게 그 때문이라죠?”
어린 레이디의 말에 참석자들이 슬쩍 아시카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아시카는 언제나처럼 참석자들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았다. 눈치 보던 귀부인들은 목소리를 낮추며 저마다 말을 뱉었다.
“그러게요. 황태후께서 참석을 안 했다죠?”
“황제 폐하께서 모주의 궁전에 출입자를 제한했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화가 나셨겠죠. 화나서 황궁 연회에 안 가시고, 또 난리 쳐서 연회를 끝나게 만드시고.”
“쯧. 하나만 하시지.”
“궁전을 새로 지어드린 거로는 만족하지 못하시나 봐요.”
“새로 지었다 한들 그곳이 황궁은 아니잖아요.”
“아휴, 모자간의 싸움이라니.”
참석자들은 어느새 아시카의 존재를 잊고 황궁의 비사를 늘어놓았다.
이곳에 참석한 이들 대부분은 중앙 권력과 동떨어진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다. 그래서인지 소문을 입에 올리는 데 거침이 없었다.
모주의 궁전이라 불리는 곳은 황궁에서 마차로만 꼬박 한나절 거리에 있었다. 제국의 황제가 자신의 모후를 어쩌지 못해 궁을 새로 지어 내보내는 강수를 둔 것이다.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모친과 황제의 권위를 공고히 하려는 아들과의 싸움이라니. 중앙 귀족들은 양쪽에 끼어서 이래저래 치이는 중이었다.
‘조부님께서 나에게 정치까지 하라고 했다면 어쩔 뻔했어. 차라리 탈리온을 상대하는 게 낫지.’
그런 점에서 탈리온의 행보는 다소 수상쩍은 구석이 있었다.
전대 공작인 네오렌은 작위를 일찌감치 드루쉬아에게 넘기고 수도로 보냈다. 정작 네오렌 본인은 기사단을 이끌고 영지와 대공령을 오가는 중이었다.
“자, 이제 다 모이셨으니까 전시실로 가볼까요?”
“그래서 오늘은 뭘 준비하신 건가요?”
참석자들의 화제는 자연스럽게 살롱의 주제로 옮겨갔다.
“남편이 이번에는 희귀 원석을 수입한답니다. 얼마나 색이 다양한지 몰라요. 원석에서 별처럼 빛이 나는 것도 있답니다.”
“풉.”
어린 레이디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뱉었다. 예상했던 반응인지 남작 부인과 참석자들도 따라서 웃음을 터트렸다.
열 명 넘는 인원이 한꺼번에 일어나자 분위기가 부산스러워졌다.
소소한 잡담이 오가는 가운데 누군가 아시카의 어깨를 툭 치고 말았다.
“어머나, 죄송해요.”
글레노아는 아시카와 닿는 순간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다소 과장된 것처럼 느껴지는 몸짓과 찰그랑하는 작은 충격음.
아시카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글레노아의 발치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떨어져 있었다. 일행 중 하나가 자연스럽게 그것을 주워들었다.
“레이디 슈베른이 떨어트린 건가요?”
손톱만 한 크기로 가운데 보석이 박혀있고 주위에 정교한 문양이 세공된 장식이었다. 팬던트가 아닌데 목걸이처럼 줄을 연결해 둔 것이 특이했다.
“이건 커프스 버튼이 아닌가요?”
남성들이 주로 사용하는 커프스 버튼. 그것도 세트가 아닌 하나. 앞서가던 참석자들까지 모두 걸음을 멈추고 글레노아를 돌아보았다.
물건을 주워든 여자가 줄을 늘어뜨리자 허공에 커프스 버튼이 달랑거렸다. 글레노아는 당황한 얼굴을 하면서도 선뜻 손을 내밀지 않았다.
“맞는 것 같은데?”
“누구 거예요? 혹시 애인 물건?”
주인이 말리지 않는 사이 작은 보석은 모두의 눈에 또렷이 각인되었다.
“그, 그게요.”
글레노아는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대답하지 못했다.
긍정보다도 민망해하는 태도가 더욱 강력한 답이 되었다. 옷을 벗지 않는 한 떼어낼 일 없는 커프스 버튼. 그것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오페라 가수.
부끄러워하는 글레노아의 태도에 귀부인들은 어머, 하면서 부채를 흔들었다.
“가운데 있는 건 다이아몬드고, 이 세공은 무슨 문장 같네요.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혹시 가문의 문장 아냐? 어느 가문이지?’하면서 여자들이 소곤거렸다.
아시카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글레노아를 바라보았다. 의미 없었던 작은 소동이 한편의 극이 되어버리는 모습을.
‘이제 생각이 났네.’
저 여자를 어디서 봤는지.
몇 달 전쯤 코랄과 함께 방문한 갤러리에서였다. 코랄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서 돌아봤더니 처음 보는 여자가 있었다.
‘그때는 머리가 검은색이 아니라 검갈색이었지.’
검은 머리는 흔치 않으니 글레노아가 염색했을 가능성이 컸다. 왜 염색까지 하면서 머리 색을 바꾼 건지는 의문이지만.
사람들은 아시카의 서늘한 낯빛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노골적인 호기심을 드러냈다.
“하긴, 이렇게 아름다운 오페라 가수에게 애인이 없을 리 없죠.”
모두 궁금해하면서도 차마 누구냐고 묻지는 못했다. 글레노아는 뺨을 붉히며 커프스 버튼을 받아 들었다.
“드러내는 걸 좋아하지 않는 분이라서요.”
확실한 긍정을 의미하는 대답. 그러면서 슬쩍 아시카의 표정을 확인했다. 딴에는 조심한다고 눈치를 살폈겠지만 흘금거리는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러나 아시카가 끝내 반응하지 않자 미미하게 얼굴을 찡그리는 것이 보였다. 분을 삭이는 것처럼 힘주어 말아쥐는 손까지.
까만 눈동자는 스치듯이 글레노아에게 머물렀다가 이내 멀어져갔다. 묘해지는 분위기를 눈치채고 남작 부인이 손바닥을 마주치며 주의를 환기했다.
“자자, 해가 지기 전에 여러분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많답니다. 제 남편의 모험담을 듣고 싶지 않으신가요?”
남작 부인이 앞장서자 참석자들이 뒤를 따랐다.
아시카는 남작 부인의 안내를 사양하고 뒤에서 조용히 움직였다. 하녀에게 케이프를 가져다 달라고 지시하는 목소리에는 조금의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