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5화 (5/153)

#05.

“그래 불러. 나도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반쯤 열린 문 안쪽으로 초로의 집사가 들어오며 눈을 크게 떴다.

“의원이 필요하십니까?”

언제부터 집무실 문이 열려있었나. 정말로 제 정신상태가 의심스러워서 드루쉬아는 티 나지 않게 혀를 찼다.

“그냥 잠을 좀 못 잘 뿐이야.”

“불면증이 재발한 겁니까?”

“어제오늘 일도 아닌걸. 근데 왜?”

드루쉬아는 집사의 걱정을 슬쩍 한쪽으로 밀어냈다. 근심 어린 표정을 지으면서도 집사는 더 캐묻지 않았다.

“치안대에서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이그레인 공작가에서 기사들을 데려갔답니다.”

“하, 누구 마음대로. 진짜 한번 해보자는 건가?”

“저희 기사들도 데려올까요?”

“이그레인 측에서 보내온 공문은?”

“…없습니다. 남긴 전언도 없고 그냥 데려갔답니다.”

집사는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습관적으로 목으로 손을 올리던 드루쉬아가 멈칫했다. 새카만 잉크 얼룩이 생긴 손을 보고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치안대장이 직권으로 석방한 건가?”

“이그레인 공작가에서 압박하면 치안대장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 봐야 사소한 다툼이니까요.”

그 사소한 다툼조차 이그레인과 탈리온이기에 가볍지 않았다. 집사는 영 상태가 좋지 않은 드루쉬아의 얼굴을 살폈다.

“어떻게 할까요?”

“그래, 어떻게 해야 할까? 기사단장으로 온 놈이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사고를 쳐서 치안대에 갇혀있는데?”

드루쉬아의 살벌한 눈빛에 거침없이 대답하던 칼프마저 입을 다물었다.

애거나이트 델피노 남작. 탈리온 공작가의 제1 기사단장으로 조부 네오렌의 휘하에 있다가 수도로 옮겨왔다. 수도에 온 지 불과 일주일도 되지 않아 거하게 사고를 친 것이다.

집사는 씁쓸한 표정으로 드루쉬아의 화를 달랬다.

“아마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을 겁니다.”

“그래서 대공령 주둔지에 한 번도 안 보냈잖아. 이그레인 기사들과 충돌할까 봐. 그걸 알면 수도에서 이러면 안 되지.”

탈리온의 가신 중에서 이그레인에게 가장 적대적인 사람이 있다면 단연 애거나이트 델피노 남작이었다. 14년 전 ‘그 사건’으로 인해 부모와 형제를 모두 잃고 홀로 남았다. 그러나 그 사고로 죽은 것이 어디 그들뿐이던가.

“천지 분간 못 하는 어린애도 아니고. 그놈은 내 앞에서 그러면 안 돼.”

“제가 가서 데려오겠습니다.”

초로의 집사가 먼저 나섰다. 그래도 연륜이 있으니 조금이나마 다독여 볼 생각이리라.

“아니, 내가 데려오지. 하룻밤 새 얼마나 반성했을지 한번 보자고.”

드루쉬아는 구겨진 손수건을 던지듯이 내려놓으며 집무실을 나섰다. 보좌관 칼프가 뒤를 따르고 집사는 지나가던 시종을 잡아 물수건을 부탁했다.

“공작님, 잠시 드레스룸에 들렀다 가시죠.”

드루쉬아는 오늘 내내 저택에서 머물렀다. 지나치게 간소한 옷차림이 집사의 눈에 거슬렸던 탓이다.

“아니. 그냥 외투만 가져와.”

나이가 적지 않은데도 드루쉬아를 쫓는 집사의 걸음은 조금도 뒤처지지 않았다. 대충해도 될 일을 집사는 끈질기게 따라붙어 하나하나 챙겼다.

“가문의 마차를 준비하라고 이를까요?”

“조용히 다녀와야지. 공작가가 치안대에 드나든다고 소문내지 않으려면.”

어차피 알 사람은 다 알 테지만.

드루쉬아가 계단을 내려와 1층에 다다랐을 때, 등 뒤에서 헐레벌떡 달려온 시종이 물수건을 건넸다. 잉크로 얼룩진 손을 물수건으로 닦아내고 대충 외투를 걸친 채 드루쉬아는 저택을 나섰다.

그가 탄 마차는 공작가의 문양이 없는 평범한 마호가니색이었다.

* * *

치안대 본부는 평민들이 주로 활동하는 팜레드 거리에 있었다. 저택을 나와 한 시간 정도 거리를 가로질렀을 때 중심가 근처에서부터 마차가 느려졌다.

“무슨 일이야?”

드루쉬아는 마차의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오늘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이 있었나 봅니다. 이쪽은 길이 비좁아서 이런 날에는 마차가 달리기 어렵습니다.”

마부의 말대로 사람들과 마차가 뒤섞여 거리가 혼잡했다. 공연장에서 쏟아져 나온 이들과 대기하고 있던 마차들, 팔짱을 끼고 요리조리 피해 걷는 연인들까지.

오페라하우스 앞의 넓은 공터가 북적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오페라하우스가 제법 크군.”

“주로 부유한 중산층이 드나드는 곳이라 규모가 상당합니다.”

칼프는 단조롭게 설명을 덧붙였다.

해가 질 무렵, 거리 곳곳에는 환등 장수가 돌아다니며 가로등에 불을 붙였다. 사람들의 열기와 훈훈한 바람이 불어오는 풍경.

밖을 살피던 드루쉬아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서 멈췄다.

어둑한 거리에서도 새카만 머리칼을 지닌 여자는 단연 눈에 띄었다. 여자는 누군가에게 케이프를 받아들고 바쁘게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설마?’

여자는 마차가 줄지어있는 곳으로 향했다. 얼마 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드루쉬아는 피식 웃었다.

‘그럼 그렇지. 이런 곳에 그 여자가 있을 리 없지.’

아무리 시설이 좋아도 귀족들은 좀처럼 오지 않는 곳이었다. 왠지 모르게 들썩이던 심장이 이내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면서도 드루쉬아는 상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여자는 걸음을 재촉해 평범한 마차 앞에 섰다. 문이 열리고 안에서 여자를 잡아주는 손이 나오는 순간 드루쉬아는 눈을 크게 떴다.

“코랄로드 오클레인?”

여자는 바로 마차에 타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잠시 실랑이가 벌어졌다. 격식을 차려입은 백금발의 남자와 검은 머리칼의 여인. 그 조합 때문에 한눈에 상대를 알아보았다.

“하. 오클레인 공자에게 정부가 있었나?”

칼프의 시선도 드루쉬아를 따라가다 상대를 발견했다.

“몇 번 소문이 있긴 했습니다만, 실제로 확인된 적은 없었습니다.”

드루쉬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뒤늦게 든 어떤 깨달음 때문이다.

“저 여자, 누구랑 닮지 않았어?”

“그러게 말입니다.”

칼프조차 순간 착각할뻔했다. 물론 상대는 그가 기억하는 여자보다 훨씬 육감적인 몸매를 지니고 있었지만.

제국 내에서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동자의 조합은 흔치 않았다. 이그레인 공작가의 내력에도 없었기에 아시카가 태어났을 때 적잖은 소문이 떠돌았었다. 과연 어디서 비롯된 태생인가 하는 의혹과 함께.

“이거 좀 소름 끼칩니다.”

약혼녀를 두고 부러 꼭 닮은 정부를 만나는 남자라니. 칼프의 말에 드루쉬아의 얼굴도 어둡게 굳어졌다.

마차 문 앞에서 버티던 여자는 잠시 후 밖으로 나온 코랄에게 이끌려 마차에 올라탔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드루쉬아가 마차를 두드려 세웠다.

“빈 서류 가지고 다니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칼프가 눈을 깜박이자 드루쉬아가 손을 내밀었다.

“치안대 관사에는 네가 가도록 해.”

“네? 아, 네.”

칼프는 가지고 다니던 가방에서 빈 서류를 꺼내 건넸다.

고위 귀족의 공문서는 숨겨진 비침무늬가 들어간 특별한 용지를 사용한다. 위조를 막기 위한 방법이었다.

드루쉬아는 거기에 반지의 인장을 찍어 서둘러 위임장을 마무리했다.

“각하께선 어디로 가십니까?”

“나는 좀 들를 데가 있어. 대기하고 있는 마차가 많으니까 아무거나 잡아타고.”

칼프는 드루쉬아에게 떠밀려 쫓겨나다시피 마차에서 내렸다. 혼자남은 드루쉬아는 마부에게 앞서간 마차를 가리켰다.

“저 마차, 어디로 가는지 따라가 보자고.”

마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마차를 출발시켰다.

마차는 붐비는 거리를 지나 주택가로 들어섰다. 크고 작은 저택이 즐비한 이곳은 중산층 이상의 평민들이 거주하는 고급주택가였다.

“속도를 줄여.”

앞서간 마차가 멈추는 것을 보고 드루쉬아는 마부에게 지시했다. 창문을 열어둔 채 커튼을 살짝 내리고 밖을 살폈다.

마차에 탔던 검은 머리칼의 여자는 코랄과 한 몸처럼 꼭 붙어서 내렸다. 마차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자의 옷차림이 흐트러져 있었다.

“허. 기도 안 차군.”

드루쉬아는 두 사람이 저택으로 들어가는 걸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닌지 맞이하러 나온 시종이나 엉겨 붙어 안으로 들어가는 남녀 모두 자연스럽다.

마차가 느리게 저택 앞을 스쳐 가면서 두 남녀도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드루쉬아는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등을 곧추세우고 생각에 빠졌다. 주름 하나 없던 반듯한 이마에 골이 파이고 선명한 파란색 눈동자가 절로 찡그려진다.

“두 달 뒤가 결혼인데.”

그 여자는 이 사실을 알고도 결혼을 강행하는 걸까.

“설마. 그럴 리가.”

그가 아는 아시카 이그레인은 대쪽 같은 성품을 지녔다. 식장에 들어가기 전부터 정부를 끼고 있는 약혼자를 용납할 리 없었다.

“이걸 어쩐다.”

마차가 움직이는 동안 드루쉬아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아시카에게 추문을 얹어주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차라리 추문을 빌미로 이득을 챙기는 게 낫지.

이그레인과 탈리온이 얽혀있는 일만 해도 한둘이 아니었다. 40년 동안 주인 없는 대공령을 함께 관리하느라 양쪽 주둔지에서는 끊임없이 문제가 발생했다.

“주둔지에 새로 건물을 올린다고 했던가. 비용 문제로 또 설왕설래할 텐데.”

예산안을 들고 이그레인과 만날 일이 멀지 않았다. 잘 이용하면 수월하게 합의점을 끌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 끝에 드루쉬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왠지 유쾌해지는 기분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 결혼, 잘하면 깰 수도 있겠는걸?”

그것이 탈리온에게 얼마나 이득이 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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