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4화 (4/153)

#04.

드루쉬아의 추궁에 아시카도 구속실로 다가갔다.

이그레인의 기사가 셋, 탈리온의 기사가 셋이었다. 칸막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나뉘어 있는 기사들 모두 한사코 입을 열지 않았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아시카는 고개를 갸웃했다. 서로 부딪힐 수밖에 없는 관계다 보니 수도 기사들의 얼굴은 아시카도 대부분 알고 있었다.

‘영지에서 새로 온 건가?’

검갈색 머리칼의 남자는 기사 중에서도 유독 덩치가 컸다. 시선을 떨구고 있는데도 바위처럼 크고 단단해 보이는 남자의 얼굴에 채 삭이지 못한 분노가 있었다.

사실 이들의 다툼에 이유 따윈 없었다. 한 공간에서 마주치는 순간부터 서로에게 적의를 드러냈고 앗 하는 사이에 여섯 명은 이미 뒤엉켜있었다. 그러니 변명할 여지도 없을 터다.

탈리온 측 기사들을 살피던 아시카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이제 갓 성년이 되었을까. 어린 청년은 피가 배어 나온 어깨를 슬그머니 감추며 얼굴을 붉혔다. 이 상황에서조차 다친 것이 수치스러웠던 탓이다.

“부상자가 있잖아. 우선 치료부터….”

아시카는 치안대장을 부르려다 입을 다물었다. 딱딱하게 굳어진 드루쉬아의 얼굴을 보니 그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더 열이 받았구나.’

시간을 끌어봐야 서로 좋을 게 없다. 적어도 이그레인의 기사들 중에 부상자는 보이지 않았다. 아시카는 화를 가라앉히고 입을 열었다.

“빨리 합의하고 부상자는 치료받도록 하죠.”

“생채기 좀 난 게 소란 떨 일은 아니지.”

“생채기라뇨. 저렇게 피를 흘리고 있는데.”

“저 상처를 입힌 게 이그레인의 기사였지, 아마? 큰소리칠 입장은 아니잖아?”

‘화났네. 화났어.’

아시카는 속으로 가만히 혀를 찼다.

아무리 어려도 탈리온의 기사다. 그 이름이 지닌 위명만큼이나 책임이 뒤따르는 기사. 거리에서 패싸움한 것도 모자라 부상까지 입었다니. 탈리온의 이름에 대놓고 먹칠을 한 셈이다.

“그래서 환자를 이대로 차가운 돌바닥에 앉혀두겠다고요?”

“환자라니? 저깟 생채기 좀 났다고 환자 취급이야? 아, 병든 들개들은 아차 하면 고꾸라질 수도 있겠네.”

“탈리온 공작님!”

“그새 호칭이 바뀌었어? 아까하곤 다르잖아.”

아시카의 입이 딱 벌어졌다. 설마 그 이야기를 여기서 꺼낼 줄이야.

“아까는 뭐라고 했더라, 르쉬….”

“치안대장! 행정 책임자가 누구지?”

“네, 네?”

아시카는 황급히 치안대장을 걸고넘어졌다. 멀찌감치 사태를 관전하던 치안대장은 얼결에 불려 나왔다.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쏟아냈다.

“담당자가 누구였든지 간에 내일까지 이그레인 공작저로 공식 서한을 보내도록 해.”

치안대장은 감히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는 기사 서임으로 단승 작위를 가졌을 뿐이고, 행정 책임자 또한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남작 이하였다.

“저… 탈리온 공작님께선 어쩌시겠습니까? 동의하신다면 기사분들을 전원 석방하고….”

“누구 마음대로?”

드루쉬아의 일갈에 아시카는 눈을 치켜떴다.

‘진짜 합의를 안 할 셈이야?’

그녀의 매서운 시선에도 드루쉬아는 기사들을 바라보며 차게 말했다.

“의원을 불렀으니까 부상자는 치료받고 거기서 푹 쉬라고. 알았나?”

“네, 각하. 죄송합니다.”

덩치 큰 검갈색 머리칼의 기사가 고개를 푹 숙였다.

“탈리온 공…, 이봐요. 경위서는 따로 주고받아도 충분하잖아요.”

드루쉬아의 파란 눈동자가 아시카를 노려보았다.

날 선 시선과 화난 얼굴은 여전한데도 왠지 모르게 묘한 느낌이 든다. 화를 내는 이유가 명예를 실추시킨 가문의 기사들 때문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 모호해졌다.

드루쉬아의 시선이 아래로 흘러 도톰하게 부어오른 아시카의 입술에서 멈췄다. 순간 그녀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우리가 합의할 게 이것뿐이 아니잖아요. 사소한 일은 그냥 넘어가죠?”

“사소해? 레이디 이그레인에게는 그게 사소한 일인가?”

말하면서도 드루쉬아의 시선은 그녀의 입술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의미심장한 대꾸에 아시카의 눈가가 바르르 떨렸다. 저를 도발하려는 의도가 명백한데도 평소처럼 받아치기가 어려웠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머릿속이 멍해졌다.

‘이러다 휘말리겠어.’

“아가씨.”

눈치 빠른 잔느가 팽팽한 긴장감 사이로 파고들었다. 아시카는 티 나지 않게 한숨을 쉬며 한발 물러났다.

“합의할 의사가 없다면 서로 시간 낭비할 것도 없네요.”

아시카는 드루쉬아에게서 멀어지는 대신 구속실 철창 가까이 다가갔다.

“보다시피 상황이 이래.”

“네, 아가씨.”

이그레인의 기사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내일 쥴마를 보낼 테니까 그때까지 기다려.”

“네.”

“죄송합니다.”

기사들은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하고 사죄했다.

드루쉬아와 달리 아시카는 기사들에게 화가 나지 않았다. 드문 일도 아니었고 사무친 분노가 주먹질 한 두 번 한다고 사라질 것도 아니었다.

다만 제 선에서 무마시키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기사들의 문제는 그녀의 소관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부의 귀에 들어가기 전에 처리하고 싶었다.

무슨 생각인지 드루쉬아는 아시카를 잡지 않았다. 평소처럼 빈정대는 말이 날아오지도 않았다. 그 이유가 아시카만큼이나 그도 혼란에 빠져있기 때문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아시카는 뒤돌아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차마 떨쳐내기 어려울 만큼 집요한 시선이.

* * *

“각하, 제 얘기 들으셨습니까?”

“음?”

대답과 동시에 드루쉬아의 손에서 서류가 후두둑 떨어졌다. 그의 시선이 팔락팔락 떨어지는 서류를 따라 아래로 흘렀다.

보좌관 칼프는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허리를 숙여 서류를 줍기 시작했다.

“델피노 남작이 수도로 온 대신에 폰테네아 경을 대공령으로 보냈습니다.”

“아, 그랬지. 조부님께서 다른 말씀은 안 하셨고?”

드루쉬아는 반쯤 나가 있던 정신을 재빨리 수습했다.

오늘만 해도 벌써 몇 번째 실수인지 모른다. 실수를 보이는 상대가 그나마 제 보좌관 앞이라서 다행이었다. 왜냐고 캐묻지 않는 유일한 상대였으니까.

“의원을 부를까요?”

“허.”

칼프는 이유를 묻는 대신 진료를 받으라고 한다.

“내가 환자처럼 보여?”

“오늘 집무실에 들어오신 이후 잉크병을 한 번 쏟으셨고, 서명하다 찢어진 서류가 세 장에, 정리된 서류를 놓치기까지 하셨습니다. 거기다 아침, 점심 식사를 모두 반 이상 남기셨습니다. 진료를 받으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의 실수와 행적을 따박따박 읊는 보좌관은 잔소리쟁이 집사보다 무서웠다. 드루쉬아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

“멀쩡한 사람 환자 취급하지 마.”

“멀쩡해 보이지 않습니다, 각하.”

“나, 참.”

드루쉬아는 다소 짜증스러운 얼굴로 서류를 건네받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이미 풀어헤친 목깃을 재차 쓸어도 답답한 속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 여자 때문이야.’

부러질지언정 절대 휘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여자, 아시카 이그레인.

‘그 여자가 울었어.’

다른 누구도 아닌 저에게 매달려 울었다. 완전히 무방비한 모습으로. 아니 무방비하다 못해 모든 허울을 내던지고 민낯으로 부딪혀왔다.

아무리 지우려고 애써도 강렬한 기억은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 눈물 가득한 새까만 눈동자가 아름답고도 처연해서 각인처럼 뇌리에 남았다.

습하게 젖어 든 입술을 느꼈을 때 상대가 이그레인이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밀어내야 한다는 생각과 달리 온몸의 감각이 송두리째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익숙하고 그리운 어떤 것을 만난 것처럼 절박했던 입맞춤. 저가 유일한 구명줄인 양 매달리는 여자를 차마 밀어내지 못했다.

“후….”

또다시 가슴 언저리가 묵직해진다. 드루쉬아는 목을 쓸며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말이야.”

“네, 각하. 말씀하십시오.”

“이그레인에 대대로 내려오는 알려지지 않은 특징 같은 게 있나?”

예를 들면 정신병 같은. 드루쉬아는 마지막 말을 차마 뱉지 못하고 삼켰다.

뜬금없는 질문에 칼프는 잠시 생각하더니 답을 내놓았다.

“이그레인 공작가는 대대로 별다른 특징이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하하. 그렇지.”

드루쉬아는 제가 말을 꺼내놓고도 허탈하게 웃었다.

황족과 개국공신 가문은 직계 혈족에게 뚜렷한 특징이 전해진다. 다른 가문에는 나타나지 않는 눈동자 색이라던가 머리색 같은 것이.

탈리온 공작가를 비롯한 일부 가문은 건국신화와도 연결되어 있지만 이그레인에게는 그런 역사가 없었다. 오로지 넘칠 만큼의 재력을 지니고 있다 뿐.

‘대체 뭐였을까? 왜 그렇게 겁에 질려 있었던 거지?’

봄맞이 파종제를 기념한 평범한 황궁 연회였다. 밤새 계속되어야 할 연회가 예외적으로 자정이 되기도 전에 폐회를 선언한 것이다. 웅성거리는 귀족들이 연회홀을 빠져나가는데 홀로 다른 곳으로 향하는 아시카를 보았다.

이그레인이 황실과 결탁해 무슨 일이라도 꾸미는 건 아닐까, 그런 의심이 들어 뒤를 쫓았다.

‘그런데 장소가 좀 이상했지.’

본래도 복잡하기로 유명한 장미궁이었지만 그곳은 더욱 이상했다.

오래도록 사용하지 않아서 먼지가 소복이 쌓인 복도와 장식들. 아시카가 들어간 방에서 작은 비명이 들렸을 때 저도 모르게 안으로 뛰어들었다.

바닥에 쓰러진 아시카를 발견하고 어찌나 놀랐던지. 급하게 몸을 확인해보니 다친 곳은 없었다. 호흡도 맥박도 모두 정상이었다.

‘데리고 나갈 수도 없고 사람을 부르는 건 더더욱 말도 안 되고.’

난처한 상황이었다. 최악의 앙숙이던 두 가문의 남녀가 은밀한 공간에서 함께 있다가 여자만 기절해서 나온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추문 거리였다.

그렇다고 의식 없는 여자를 홀로 두고 갈 수도 없었다. 그 상대가 꼴 보기 싫은 이그레인이라 해도 말이다.

드루쉬아는 일단 기다려보기로 했다. 조금 있으면 깰 거라는 생각에 하얀 천을 걷어내고 응접실 소파에 아시카를 눕혔다.

‘악몽을 꾸는 것 같았어.’

그가 자리를 떠나지 못한 이유였다. 신음하는 여자의 모습이 어린 시절 제 모습과 닮아있어서.

“각하. 손을 좀 치워주시죠.”

딱딱한 목소리가 불현듯 드루쉬아를 현실로 끌어내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책상 위에 놓여있던 그의 손을 칼프가 조심스럽게 잡아 올렸다.

드루쉬아의 손끝에서 검은 잉크가 툭, 툭 떨어져 대리석 위에 까만 얼룩을 만들었다.

책상 위에 번지는 까만 잉크가 흐트러진 여자의 머리칼처럼 보여서 기묘한 상상마저 든다.

‘미쳤군. 미쳤어. 망할 이그레인 같으니.’

드루쉬아는 더욱 기막힌 얼굴이 되었다.

“잉크병만 두 번째입니다, 각하. 오늘 저녁 식후에 침실로 의원을 부르겠습니다.”

칼프는 손수건을 꺼내 드루쉬아에게 건넸다. 하얀 손수건은 드루쉬아의 손에서 금세 새카맣게 물들어갔다.

“그래 불러. 나도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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