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밖으로 걸음을 옮기면서도 아시카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텅 비어 을씨년스러운 복도. 화려한 액자들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지만 불이 켜진 곳은 없었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화려한 조명이 내부를 비추고 있을 뿐.
‘어째서 황궁에 이런 공간이 있는 거야?’
자신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아치형 복도를 지나자 탁 트인 연회홀이 나왔다. 부산스럽게 뒷정리하는 사람들 가운데 정복을 차려입은 기사가 황급히 달려왔다.
“아가씨!”
“잔느?”
“어디 계셨던 겁니까. 연회는 진즉에 끝났다고 하는데 아가씨께서 보이지 않아 한참을 기다렸습니다.”
“아….”
이제야 생각이 났다. 예정보다 일찍 끝이 나버린 황궁 연회. 황궁 안이라서 가문의 기사나 시종들도 함부로 그녀를 찾지는 못했을 터다.
“별일 없으신 겁니까?”
잔느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걱정스럽게 내려다보았다. 같은 여자인데도 기사인 잔느의 키는 아시카보다 한참 위였다.
“괜찮아. 잠깐 길을 잘못 들어서 헤맸을 뿐이야.”
연회가 자주 열리는 장미홀 주변은 원래도 복잡하기로 유명했다.
잔느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앞장서서 부산스러운 사용인들을 헤치며 길을 안내했다.
아시카는 지친 얼굴로 잔느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순간 몸이 굳어지고 말았다.
“…오클레인 공자.”
“늦으셨습니다. 레이디 이그레인.”
아시카는 눈앞에 내밀어진 손을 슬쩍 비껴가며 맞은편에 앉았다.
코랄은 민망해진 손을 거두고 마차를 두드려 출발신호를 보냈다.
덜컹, 하는 가벼운 진동에 아시카의 몸이 휘청거렸다.
순간 코랄의 손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맥없이 늘어져 있던 몸이 바짝 긴장한다. 꼿꼿하게 허리를 곧추세운 뒤에도 코랄은 잡은 팔을 놓아주지 않았다.
“어디가 안 좋으신 겁니까?”
“놓아주세요. 오클레인 공자.”
“안색이 창백합니다.”
코랄의 손이 식은땀이 맺힌 그녀의 얼굴로 향했다. 아시카는 조심스럽게 몸을 뒤로 물려 피했다. 명백한 거부 의사에 회색 눈동자가 더욱 차게 가라앉았다.
평소에는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 없던 여자가 오늘따라 웬일일까. 코랄의 눈매가 더욱 가늘어졌다.
“결혼이 두 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언제까지 내외하실 겁니까?”
살짝 짜증이 담긴 목소리였다.
“아직 두 달이나 남았지요.”
아시카는 잡혀있는 팔에 슬며시 힘을 주어 당겼다. 하지만 팔에 감긴 체온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 느낌이 못내 부담스럽고 불편했다.
“레이디 이그레인, 저는 당신의 남편이 될 사람입니다.”
“네, 두 달 뒤에는요.”
팔을 쥔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살을 쥐어짜듯 통증마저 느껴지는 악력이었다.
“오클레인 공자.”
아시카는 아픔을 티 내지 않았다. 다만 차게 식은 목소리로 그를 일깨워줄 뿐.
코랄의 입가에 언뜻 조소가 스쳐 갔다. 이제는 숨기려고 들지도 않는 노골적인 태도였다.
코랄은 모를 터다. 이런 태도 때문에 약혼자라 해도 마음을 내주지 못한다는 것을. 예의 바른 행동에도 간간이 드러나는 위협적인 모습이 아시카의 본능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덜컹, 하는 흔들림 뒤에 마차가 멈춰 섰다.
“아가씨, 잠시 문을 열어도 되겠습니까?”
잔느의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지?”
아시카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제 팔을 움켜쥔 손을 끝끝내 밀어냈다. 코랄의 얼굴이 미미하게 구겨졌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오늘 행사지원을 나갔던 기사들이….”
잔느는 마차 문을 열자마자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긴장을 감지했다. 하지만 이내 모른 척 말을 이었다.
“기사들이 왜?”
“저, 송구스럽게도….”
평소 거침없던 잔느가 말끝을 흐렸다. 아시카는 아픈 팔을 주무르며 다음 말을 채근했다.
“지원 나온 탈리온의 기사들과 패싸움을 벌였답니다.”
“뭐?”
조금 전까지 코랄과 벌이던 신경전이 아시카의 머릿속에서 날아가 버렸다. 코랄마저도 눈이 휘둥그레져서 잔느를 돌아보았다.
“지금 수도 치안대 본부에 구속되었답니다. 그리고.”
말을 하면서도 잔느는 면구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저쪽에서는 탈리온 공작께서 직접 치안대 관사로 온다고 했답니다.”
이어진 말에 아시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어떻게 할까요? 제네스 경을 부를까요?”
쥴마난 제네스는 아시카의 보좌관이었다. 평소라면 그가 나서서 처리했을 일이지만 저쪽에서는 이미 공작이 움직였다. 이쪽에서도 소공작인 아시카가 나서야 격이 맞는다.
“탈리온 공작이 왔다며. 쥴마를 보냈다간….”
“네. 뼈도 못 추리게 발라 드시겠지요. ‘그’ 탈리온 공작님께서.”
잔느는 얼굴을 구기며 낮게 중얼거렸다.
아시카의 머리에 열이 오른다.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고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지금 또 그 남자의 얼굴을 봐야 한다고?’
“일단 저택으로 돌아갈까요?”
“기사들의 다툼까지 직접 나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잔느의 말에 대답한 것은 코랄이었다. 아시카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쪽에서는 탈리온 공작이 왔어요. 그 앞에서 수도 치안대가 얼마나 공정할지 누가 알겠어요? 내 가문의 기사들을 그런 식으로 방치할 수는 없어요.”
“그러면 차라리 콜테른 경을 부르지 그러십니까?”
“콜테른 경은 부재중입니다.”
그나마 탈리온 공작을 상대할 만한 기사단장마저 하필 자리를 비웠다.
아시카는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는 코랄을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가씨?”
“레이디 이그레인?”
아시카가 마차 밖으로 내민 손을 잔느가 자연스럽게 잡아주었다.
“죄송합니다만, 오클레인 공자께서는 먼저 돌아가세요. 저는 기사들의 일을 마무리 짓고 따로 가겠습니다.”
드루쉬아와 싸우는 것도 힘들지만 코랄의 끈적한 접촉을 견디는 것은 더욱 버거웠다. 코랄의 얼굴이 구겨지는 것을 보면서 아시카는 속이 다 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잔느, 마차를 불러. 함께 치안대로 가도록 해.”
잔느가 신호하자 마차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위 기사 둘이 아시카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시카는 코랄의 마차를 보내고 새로운 마차를 타기 위해 걸음을 서둘렀다.
* * *
아시카를 태운 마차가 견고하게 지어진 황토색 건물 앞에 멈춰 섰다. 큰 건물이 여러 개 모여있는 이곳은 수도 치안대의 본부였다.
늦은 밤이라 거리는 고요했고 건물 주변의 불빛만이 사위를 밝히고 있었다. 을씨년스러운 느낌에 아시카는 잠시 어깨를 떨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미리 연락해둔 터라 기다리고 있던 치안대원이 앞장섰다. 그가 향한 곳은 치안대 본관 맞은편에 있는 건물이었다.
건물 안쪽에는 철창으로 가려진 구속실이 연달아 있고, 지키고 선 치안대원만 해도 열 명에 가까웠다.
“여긴가?”
아시카의 질문에 안내인이 머리를 조아렸다. 동시에 실내에 있던 이들이 헛숨을 들이켰다.
‘진짜로 오셨어. 이그레인 소공작이야!’하는 속삭임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러나 아시카의 시선을 잡은 것은 놀란 치안대원들이나 구속실 너머의 기사들이 아니었다. 치안대원들 뒤에서 머리 하나는 더 큰 장신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왔군.”
짤막한 한마디가 복잡미묘하다. 색이 옅은 금발에 은회색 연미복을 입은 남자는 아까 헤어졌을 때보다 훨씬 견고해 보였다.
아시카의 심장이 또다시 요동쳤다. 얼굴을 살피는 시선이 따가워서 목소리를 더욱 낮게 깔았다.
“그럼요. 제 가문의 기사들인걸요. 시정잡배들과 어울릴 신분은 아니잖아요.”
서늘한 아시카의 대꾸에 드루쉬아의 눈썹이 가파르게 치솟았다.
“그러게 말이야. 하필 축제 날 미친개가 거리 한복판에서 날뛰었다고 하더군. 내 기사들이 아니었다면 큰일 날 뻔했어.”
아시카는 눈꼬리를 바짝 곤두세우고 드루쉬아를 노려보았다.
“변방의 백정 같으니!”
“아무나 물어대는 들개보다야 낫지.”
견고해 보였던 드루쉬아의 얼굴에도 노기가 어렸다.
제국의 검이라 불리는 탈리온을 ‘백정’이라 까내리는 건 오로지 이그레인뿐이었다.
그럴 때마다 드루쉬아는 이그레인의 기사단을 오합지졸이 모인 들개무리라며 거침없이 조소했다.
가까이 있던 치안대원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점잖기로 소문난 탈리온 공작과 이그레인 소공작이 순식간에 돌변하는 것을 보고 몸서리를 쳤다.
탈리온 공작가와 이그레인 공작가는 제국에서 대표적인 세력 가문인 동시에 최악의 앙숙이었다. 우스갯말로 저 둘 때문에 나라를 반으로 쪼개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올 만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저….”
치안대장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대가 책임자인가?”
아시카의 시선이 드루쉬아에게서 떨어져 치안대장에게로 옮겨갔다.
“오늘 내 기사들을 탈리온 기사들과 같은 곳으로 순찰을 보냈다지?”
축제 때문에 수도가 들끓는 날이었다. 기사를 보유한 가문들은 자발적으로 기사를 보내 치안대원을 도왔다. 일종의 자원봉사인 셈이다.
수도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이그레인과 탈리온의 사이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 양쪽 가문의 기사들을 같은 장소에 둔다는 건 기름 창고에 횃불을 던져넣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싸늘한 시선이 날아들자 치안대장의 얼굴은 더욱 사색이 되었다.
“어, 업무상 착오가 있었습니다. 행정 책임자가 수도로 온 지 얼마 안 돼서….”
치안대장이 자리에 있었다면 기사들을 잡아들일 게 아니라 어떻게든 쫓아버렸을 터다.
그러나 탈리온의 기사들은 부상 당한 동료를 보고 당장 이그레인의 기사들을 투옥하라고 날뛰었고, 이그레인의 기사들은 길바닥에서 쌈질하는 시정잡배를 방치하느냐고 날뛰었다.
그 바람에 양쪽 모두 구속실로 끌고 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 거였군.”
드루쉬아는 구속실 창살 너머에 있는 기사들을 보며 혀를 찼다.
기세등등하게 싸우던 기사들이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누가 먼저 시작했지? 이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