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2화 (2/153)

#02.

절박한 외침이었다. 드루쉬아는 달려드는 자객들을 막아내면서 아시카에게 도망치라고 소리쳤다.

아시카는 벽에 바짝 붙어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공포에 질려 차마 뱉지 못한 말들이 입속에서 달싹였다.

내가 어떻게 당신을 두고 가. 당신이 없으면 나도 없는데.

“아시카!”

드루쉬아의 절박한 외침에도 아시카는 얼어붙은 채 움직이지 못했다. 발밑에는 드루쉬아의 검에 쓰러진 자객들의 시신이 나뒹굴었다.

번쩍, 시야가 트이는 순간 부서진 문 너머에서 새카만 인영들이 더 몰려온다. 한때는 제국의 검이라 불리었던 사내의 목숨을 거두기 위해서.

그러나 아무리 제국 제일의 검이라 해도 꾸역꾸역 밀려드는 자객들을 홀로 막아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상대의 검을 쳐내는 순간 옆에서 날아든 검이 드루쉬아의 어깨를 사정없이 베었다.

“르쉬아!”

그의 몸이 중심을 잃는 동시에 자객들이 빈틈을 파고들었다. 뒤따라 들어온 자객은 거침없이 아시카를 향해 달려들었다.

“안돼!”

“아악!”

자객의 검이 아시카에게 날아드는 동시에 드루쉬아가 몸을 돌려 그녀를 감싸 안았다.

가녀린 몸뚱이가 뜨겁고도 커다란 체구에 폭 파묻혔다. 그러나 드루쉬아도 온전한 방패가 되어주지는 못했다.

아랫배에서 격통이 느껴지는 순간 어깨에도, 심장에도 아찔한 고통이 찾아들었다.

피가 솟구친다. 그녀의 피가, 드루쉬아의 피가.

무자비한 검들은 한 덩어리처럼 겹쳐있는 두 사람의 몸을 꿰뚫고 그대로 벽에 박혔다.

절망 어린 시선이 아시카의 새카만 눈동자에 못 박혔다. 꿀럭꿀럭 피를 토해내는 입술이 경련을 일으키며 달싹였다.

“…미안….”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서.

“…흐… 르쉬….”

숨을 헐떡이면서도 아시카는 그의 시선을 놓지 않았다. 끔찍했던 고통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젖어 드는 파란 눈동자가 안타까워서. 그 속에서 사라지는 생명의 빛을 조금이라도 잡고 싶어서.

그러나 아무리 잡으려고 애써도 연기처럼 바스러지는 숨을 부여잡을 수는 없었다.

아시카를 안고 있던 팔에서 힘이 빠진다. 끝끝내 그녀에게 머물던 파란 눈동자가 가물가물 시야에서 사라져 간다.

덮쳐오는 어둠은 곧 죽음이었다.

* * *

“…레인….”

새카만 어둠을 뚫고 희미한 목소리가 그녀를 잡았다.

“…레이…이그레인….”

소리가 흔들리는 건 제 몸이 들썩이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제 몸이 흔들리는 건 누군가 흔들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도.

“아시카 이그레인!”

예의 바르게 채근하던 목소리가 끝내 고함이 되었다. 뇌리를 강타하는 쩌렁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두 눈이 떠졌다.

“허억!”

그러나 격한 호흡 때문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손톱을 세워 목과 가슴을 잡아 뜯으려고 하자 강한 힘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숨 쉬어. 천천히, 천천히.”

사납던 목소리가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흐릿했던 시야가 선명해지면서 눈앞의 상대도 점점 또렷해졌다. 아시카는 숨을 헐떡이며 저를 내려다보는 새파란 눈동자를 발견했다.

“…르쉬…, 르쉬아….”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에 반듯하게 생긴 상대의 이마에 골이 파였다. 그러나 아시카는 상대의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흐윽… 르쉬아.”

아시카는 황급히 손을 내밀어 그의 얼굴을 더듬었다. 상대가 움찔하며 피하려고 했지만 그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짧고 단정하게 넘긴 금발과 뚜렷하게 도드라지는 이목구비. 피 한 방울 튀지 않은 얼굴에는 전에 없이 윤기가 흘렀다.

“…꿈….”

그 모든 것이 꿈이었다. 악몽이었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가 제 눈앞에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르쉬아. 나는, 당신이 진짜로… 흐윽.”

새카만 눈동자를 함빡 적시며 눈물이 흘렀다. 혹여 놓칠세라 가녀린 팔이 다급히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손바닥 아래에서 단단한 목과 어깨 근육이 연신 움찔거렸지만 아시카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가 몸을 일으킨 순간부터 상대는 아시카에게서 손을 떼었다. 그러나 숨이 넘어갈 듯 오열하는 여자는 그가 유일한 구명줄인 양 매달렸다.

커다란 양손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허공에 멈춰있는 사이 눈물 젖은 입술이 그의 목 언저리를 문질렀다.

“윽. 이것 좀….”

당황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러나 목을 휘감은 팔이 그를 끌어당겼다. 드루쉬아는 다급히 소파 등받이를 잡아 지탱했지만 절박한 여자의 힘을 당해내지는 못했다.

“레이디 이그….”

매달리듯 뺨에 닿아있던 입술이 그의 입술 위로 포개어졌다. 피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드루쉬아가 얼어붙어 있는 사이 눈물로 젖은 습한 숨결이 느껴졌다. 뜨겁고 작은 혀가 그의 입속으로 파고든 것도 순식간이었다.

“무슨… 흐읍.”

움찔거리며 물러나려는 혀를 작은 혀가 쫓아와 얽어맨다. 두 개의 살덩이가 서로 엉킨 순간 등줄기에 짜르르 전율이 흘렀다.

청명한 하늘을 닮은 파란 눈동자가 이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휘둥그렇게 커졌다. 밀어내야 한다고, 그리 생각하면서도 아시카의 어깨를 잡은 손이 힘을 잃었다.

쿵, 쿵, 그의 심장도 그녀의 것만큼이나 격하게 뛰기 시작했다. 다급한 숨결이 뒤엉키면서 온몸을 관통하는 짜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드루쉬아의 손이 아시카의 뒷머리를 움켜쥐었다. 일방적으로 매달리던 입맞춤을 고스란히 되돌려주었다. 힘이 빠지는 입술을 짓누르며 작은 혀를 잡아채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흐… 으읍.”

아시카의 숨이 벅차올랐다. 무엇이 변했는지 모르지만 뭔가 이상했다.

낯설었다. 입속 곳곳을 파헤치듯 찔러오는 두툼한 살덩이가 낯설고 거칠었다. 그 기묘한 간극에 눈물이 마르고 야릇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등에 닿은 푹신한 감각과 몸을 짓누르는 묵직한 체중. 생소한 압박감에 숨이 막혀 상대의 등을 두드렸다.

“르쉬…, 흐읍… 웁.”

그러나 드루쉬아는 더 강한 힘으로 입술을 짓누르며 집어삼킬 듯이 그녀를 탐닉할 뿐이었다.

아찔한 감각과 함께 시야가 아득해졌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옆구리를 훑으며 가슴 언저리로 올라왔을 때, 아시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윽!”

드루쉬아는 혀를 깨무는 따끔한 통증에 움직임을 멈췄다.

바로 눈앞에 사슴처럼 동그란 검은 눈동자가 있었다. 채 마르지 않은 물기를 머금고.

뒤엉켜있던 혀가 미끄덩한 감각을 남기며 입속에서 물러났다. 서로의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이 멀어지고 완전히 얼빠진 두 남녀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흐트러진 얼굴을 채 수습할 정신도 없었다. 얼빠져 있는 여자를 앞에 두고 드루쉬아의 입술이 열렸다.

“…레이디 이그레인.”

레이디 이그레인. 그 명징한 호칭이 아시카의 뇌리에 콱 날아들었다.

“르쉬아?”

남자의 눈썹이 꿈틀하다 제자리를 찾는다.

“왜 그래, 르쉬아?”

“르쉬아? 지금 나를 부르는 말인가?”

“그럼 여기에 당신 말고 누가 있어?”

“르쉬아, 드루쉬아….”

드루쉬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이름을 곱씹다가 뒤늦게 ‘아.’하면서 자신의 애칭을 알아들었다.

그의 태도도 이상했고 그의 옷차림은 더욱 이상했다. 아시카는 멍한 얼굴로 다시 한번 드루쉬아를 뜯어보았다.

“머리, 언제 잘랐어?”

“내 머리가 길었던 적이 있었나?”

뭔가 계속 어그러지는 대화.

“거기다 옷이 왜… 연미복?”

“연회에 참석했으니 당연한 게 아닌가?”

“연회? 무슨 연회?”

아시카의 반문에 드루쉬아의 얼굴이 오묘하게 변해갔다. ‘무슨 이런 미친 여자가 다 있나’하는 표정이었다.

새파란 눈동자에는 채 가시지 않은 열기가 남아있는데도 여전히 냉기가 느껴졌다. 언제나 차갑게 그녀를 보던 짙푸른 눈동자 그대로.

“허억!”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불현듯 몰아닥친 깨달음에 아시카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그와의 거리를 벌렸다.

“이, 이… 치한!”

“지금 나한테 하는 소린가?”

“당신,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이게 무슨 망발이지? 당한 쪽은 엄연히 나라고.”

“무슨 그런….”

반박하려고 했다. 저가 미치지 않고서야 저 남자에게 달려들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그에게 매달리다시피 달려들었던 것이 바로 조금 전이었다.

“세상에.”

아시카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만 뻐금거렸다. 당혹감과 분노, 납득 할 수 없는 상황에 사고가 뚝뚝 끊겼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아무리 정신이 나갔어도 상대가 ‘그’ 탈리온 공작이었다.

세상 남자가 모조리 죽어서 한 놈만 남았더라도 그게 탈리온이라면 절대 근처에도 가지 않았을, 드루쉬아 탈리온이었다.

불시에 입술을 빼앗긴 남자는 그녀를 추궁하는 대신 눈을 가늘게 뜨고 살폈다.

‘혹시 이 여자가 지병이 있었나?’

그런 탐색하는 눈으로. 약점을 잡으면 그는 결코 아시카를 그냥 두지 않을 터였다. 어떤 식으로든 이용하려 들 테지.

확연한 현실을 깨닫고 순식간에 정신을 가다듬었다.

“착각… 했어요.”

“착각? 상대를 착각했다는 말인가?”

되지도 않을 변명이었다. 그러나 아시카는 서 있는 두 다리에 힘을 주고 꼿꼿하게 머리를 세웠다.

미친 듯이 날뛰는 심장을 억누르며 흐트러진 드레스를 정리하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술에 대었다. 축축하게 젖어 서늘하게 느껴지는 입술과 주변을 톡, 톡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드루쉬아는 기막힌 얼굴이 되었다.

“착각할 게 따로 있지. 레이디 이그레인의 약혼자와 내가 닮은 구석이 어딨다고?”

“그게 아니라 꿈을….”

아시카의 심장에 날카로운 통증이 지나갔다.

그래, 꿈을 꾸었다. 지독히 생생하고 끔찍한 꿈을.

다정했던 남자의 미소가 한순간에 절망으로 변하고, 저를 안아주던 단단한 팔이 피투성이가 되어 무너져버리는 꿈을.

고고한 여자의 얼굴이 다시 울듯이 일그러졌다. 핀잔하려던 드루쉬아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당황한 아시카의 시선이 정처 없이 배회하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입술을 앙다물고 다시 한번 방 안을 꼼꼼히 둘러보았다.

“뭘 찾지?”

“그거 있잖아요. 액자. 장식선반 위에 올려져있던.”

“레이디 이그레인, 여기는 빈방이야. 보면 몰라?”

드루쉬아의 말대로였다. 응접실처럼 테이블과 소파가 있지만 모두 하얀 천을 덧씌워놨고 그 위에는 뽀얀 먼지가 내려앉았다.

그녀가 말하는 장식선반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분명 있었는데. 보석이 박혀있던 액자가….”

보석의 빛이 기묘해서 만져보았던 기억이 난다. 아름다운 보석인데 거미줄처럼 실금이 빼곡해서 금세 바스러질 것만 같았다.

“레이디 이그레인, 헛소리 그만하지. 나를 덮쳐 놓고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얼버무리려고?”

검은 눈동자가 움찔 놀라 깜박였다. 데구르륵 굴러가던 눈동자가 다시 제자리를 찾아 바짝 힘이 들어갔다.

“나 혼자 했나요? 내치지 않고 달려든 사람이 누군데요?”

“하! 이제 내 탓으로 돌리겠다? 약혼자를 두고 다른 남자에게 덤벼든 핑계치곤 옹색하지 않아?”

“힘이 있는 분께서 밀어냈었어야죠. 아니면 탈리온 공작께서는 여자 힘도 내치지 못할 만큼 약골이었나요?”

“레이디 이그레인!”

드루쉬아가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아시카는 말을 뱉으면서도 제가 하는 말이 민망해서 얼굴이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약한 속내를 보여서는 안 된다. 빌미를 잡혔다가 저 남자가 또 얼마나 저를 몰아붙일지 상상만 해도 아득했다.

그냥 뻔뻔하게 나가자. 저 남자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젖은 입가가 여전히 번들거리는데도 아시카는 당당하게 소리쳤다.

“이렇게 쉬운 남자인 줄 몰랐어요. 알았다면 조심했겠죠.”

“그럴 리가! 세상 여자가 모조리 씨가 말랐다 해도 이그레인은 아니지. 절대 아니야!”

“누가 할 소리!”

두 남녀의 사나운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뭐가 어떻게 된 노릇인지 모르지만 일단 두 사람이 엮인 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상황이었다.

“하.”

잘생긴 얼굴이 일그러지며 드루쉬아는 거친 숨을 토해냈다. 굉장히 억울한데 뭘 어떻게 따져야 할지도 모를 상황.

“제기랄, 하.”

답지 않게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답답한 목깃을 풀어헤치고 화난 눈동자가 아시카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드루쉬아는 답답하고 기막힌 얼굴을 한 채 획 돌아섰다.

성큼성큼 멀어지는 그를 보며 경직되었던 아시카의 몸에서도 서서히 힘이 빠졌다. 한껏 날을 세웠지만 요동치는 심장은 아직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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