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1화 (1/153)

#01.

코끝에 청량한 향기가 감돌았다. 허브향 같기도 하고 이슬처럼 싱그럽기도 한 느낌. 서늘한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우고 늘어뜨린 맨손으로 냉기가 스며든다.

‘차가워.’

아시카는 어깨를 움츠리며 제 손을 당겨 쥐었다. 그러나 흙 묻은 거친 손이 이상해서 다시 제 앞에 펼쳐 보였다.

‘손이 왜 이래?’

초록색으로 물든 손끝이 낯설다. 하얗고 보드라워야 할 손마디에 자잘한 생채기가 가득하다.

‘…풀물…이 든 거야? 내 손에?’

가까워진 손끝 너머 바닥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푸른 잎사귀들이 보였다.

주저앉아있는 다리와 엉덩이에 닿는 차가운 느낌. 그녀가 앉아있는 곳은 이름 모를 잡초가 가득한 한가운데였다.

‘이상해.’

낯익은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기묘한 기분.

잡초밭에 머물던 시선은 더 멀리 나아가 숲 언저리와 하늘로 이어졌다. 잿빛 구름이 가득한 하늘이 금세 내려앉을 듯 묵직하다.

툭, 투둑.

뺨에 닿는 차가운 물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내가 왜 이러지.”

하늘을 보아하니 지나가는 비는 아닐 터였다. 아시카는 손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내고 다리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채 일어나기도 전에 다시 앞으로 고꾸라졌다.

“흐억.”

등허리를 찢어놓는 격통에 눈앞에 불이 번쩍였다. 놀란 몸이 경직된 채 바들바들 떨렸다.

‘아, 아파. 너무 아파….’

상념에 빠져있느라 제 처지를 잊었다. 조심성 없는 움직임은 잊고 있던 상처를 일깨우며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흐으… 윽.”

아시카는 일어나지도 주저앉지도 못한 채 잡초밭에 엎드려 고통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투둑, 툭. 솨아아아.

굵은 빗방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폭우가 되어 쏟아지기 시작했다. 엎드려 있는 등위로 차가운 감각이 매몰차게 부딪힌다. 입고 있던 얇은 원피스는 금세 비에 흠뻑 젖어갔다.

“후우… 하….”

아시카는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상체를 일으켰다. 격통이 지나간 뒤라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도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양손을 바닥에 짚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때였다.

“아시카, 거기 가만히 있어.”

거센 빗소리를 뚫고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누군지 확인할 틈도 없었다. 어느새 다가온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무릎 아래 손을 넣어 번쩍 들어 올렸다.

“르쉬아.”

아시카는 밭은 숨을 뱉으며 저를 안아 올린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밝은 햇살만큼이나 환한 금발이 비에 젖어 이마와 얼굴에 달라붙어 있다. 그 탓에 선이 뚜렷한 이목구비가 더욱 도드라졌다.

“오늘은 쉬고 있으라니까, 왜 나온 거야?”

핀잔하는 어조 속에는 염려가 배어있었다. 드루쉬아는 바삐 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에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조금이라도 가리고자 상체를 숙였다.

“가만히 있는 것도 힘들어.”

“그걸 말이라고 해?”

“환자 취급하지 말라니까.”

아시카의 대꾸에 드루쉬아는 잘생긴 얼굴을 찡그렸다.

여상하게 말하고 있지만 품 안에 들어온 작은 체구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통증을 참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워서 드루쉬아는 타박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상처가 다 나은 게 언젠데. 그냥 움직이는 게 힘든 것뿐이잖아.”

아시카는 재차 괜찮다며 말을 덧붙였지만 드루쉬아의 굳어진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다급히 달려서 도착한 곳은 외딴 터에 있는 작은 목조건물이었다. 주변에 인가라고는 하나도 없는, 마을에서도 한참 멀리 떨어져 숲속에 숨기듯 지어진 집이었다.

드루쉬아는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아시카를 의자에 앉혀두고 서둘러 벽난로에 불을 지폈다. 그리고는 수건을 가져다가 흠뻑 젖어버린 그녀의 머리칼과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수건 이리 줘.”

“내 할 일을 뺏으면 안 되지.”

드루쉬아는 수건을 뺏으려던 하얀 손을 밀어내고 비에 젖은 검은 머리칼을 토닥였다.

하얗고 창백한 얼굴에 검은 눈동자와 검은 머리칼. 그 대비가 극명해서 더욱 하얗게 보이는 얼굴.

좋은 약을 구해 먹이고 공을 들여도 아시카의 파리한 낯빛은 나아지지 않았다.

“르쉬아?”

아시카가 수건을 밀어내자 염려를 가득 담은 짙푸른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드루쉬아는 반사적으로 눈꼬리를 접으며 미소지었다. 걱정스러운 속내를 삼키며 커다란 손이 그녀의 머리칼을 슥 매만지고 멀어진다.

“이런, 거실이 물바다가 되겠어.”

드루쉬아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물이 뚝뚝 떨어지는 셔츠 자락을 들어 올렸다. 흠뻑 젖어 달라붙어 있던 옷이 껍질이 벗겨지듯 피부 위에서 벗겨져 나간다.

팔의 움직임에 따라 각 잡힌 넓은 어깨와 가슴으로 이어진 탄탄한 근육이 꿈틀거렸다. 야외에서 살다시피 하는데도 드러난 피부는 여전히 하얗기만 하다.

예전과 다른 게 있다면 온몸 곳곳에 나 있는 크고 작은 흉터들.

개중에 유독 눈에 띄는 것은 어깨에서 가슴을 타고 장골 아래까지 이어진 흉터 같은 붉은 자국이었다.

아시카는 수건을 손에 쥔 채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난생처음 보는 모습인 양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문득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고 드루쉬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 아직 씻지도 않았는데.”

드루쉬아는 상의를 벗어 던지고 아시카에게 성큼 다가왔다. 예의 따윈 벗어던진 태도인데도 걸음마다 숨길 수 없는 품위가 드러났다. 드루쉬아는 태생이 그러한 남자였다.

“왜 그렇게 눈빛이 뜨거워?”

“…이거.”

“파병 인장? 그게 왜?”

드루쉬아의 질문에도 아시카는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아시카의 손이 그에게 향하다가 허공에서 멈춘다. 옆구리에서 장골 아래로 내려가는 흔적이 바지 아래에 숨겨져 있었다.

‘어디까지 난 흔적일까.’

두근, 두근. 심장이 뛰었다. 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묘하게 낯선 느낌.

드루쉬아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 손을 내밀었다.

커다란 손이 허공에 멈춰있던 그녀의 손을 쥐고 탄탄한 근육이 도드라지는 아랫배로 이끌었다. 아시카는 차마 손을 빼지 못하고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차게 식은 손끝에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땀에 젖어 끈적거리는 피부와 툭 솟은 장골, 탄력 있는 근육이 바지 아래로 이어진다.

드루쉬아는 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쥐고 나머지 한 손으로 허리끈을 풀었다.

“후… 거기, 조금만 더 아래로….”

커다란 손에 잡힌 채 아시카의 손이 장골 아래쪽으로 따라갔다.

헐렁해진 바지 속으로 파고든 그녀의 손에 땀에 젖은 피부와 까슬한 감촉이 만져졌다.

그 야릇한 느낌에 아시카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머리칼과 꼭 같은 색의 음모가 아슬아슬 보이려는 찰나 헐렁해진 앞섶이 흘러내리며 무언가가 불툭 튀어나왔다.

“헉.”

화들짝 놀라 아시카의 손이 움츠러든다. 숨죽이고 있던 드루쉬아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오늘 정말 왜 그래? 눈빛으로 나를 죽이기라도 할 셈이야?”

드루쉬아는 앞섶을 여미며 놀라 움츠러든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아시카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추려고 고개를 돌렸다. 민망해서 차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뭐가 이렇게 부끄러운지 가슴에서 홧홧한 열이 올라왔다.

그런 그녀를 보며 드루쉬아의 입꼬리가 한껏 올라갔다. 짙어진 푸른 눈동자에서는 아쉬움이 뚝뚝 떨어졌다.

“목욕물 준비할 때까지 여기 가만히 있어.”

몸이 불편한 아시카를 살피는 것이 먼저였다. 드루쉬아는 떨어지지 않는 발길 애써 돌리며 물러났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도 아시카의 심장은 진정될 줄을 몰랐다.

‘뭐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아시카는 요란하게 뛰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긴 숨을 토해냈다.

간신히 몸을 씻고 저녁 식사를 하고 난 뒤에도 비는 잦아들 줄을 몰랐다. 오히려 점점 더 거세지면서 작은 목조건물을 요란하게 두드렸다.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 불을 앞에 두고 아시카는 낮에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마을 약재 상인이 부러 집까지 찾아와서 들려준 이야기였다.

“새로 즉위한 황제가 생존자를 찾고 있다고 들었어.”

벽난로에 장작을 밀어 넣던 드루쉬아가 멈칫했다.

“알고 있어.”

하긴 그녀에게 이야기가 들려올 정도면 드루쉬아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을 테지. 담담한 대꾸였지만 아시카는 그 속에 담긴 불신을 읽었다.

따뜻한 컵을 손에 쥐고 망설이던 입술이 다시 열렸다.

“…멸문한 가문을 복원하겠다고 공언했대.”

말을 꺼내면서도 아시카는 조심스럽게 드루쉬아의 얼굴을 살폈다.

모닥불의 불빛이 단단하게 굳어진 얼굴 위로 너울너울 흔들렸다. 평소 따뜻하기만 했던 눈동자가 딱딱하게 굳어진 채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돌아가는 건 어때?”

“아니. 조금 더 지켜보지.”

아시카의 제안을 드루쉬아는 단칼에 거절했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위협이 사라졌다는 보장은 없었다. 아시카도 알고 있지만 내내 덮어두었던 미안한 마음이 가슴을 묵직하게 짓눌렀다.

부상의 후유증으로 뻣뻣하게 말을 듣지 않는 두 다리. 제 몸 하나 운신하기 힘든 아시카를 돌보느라 드루쉬아는 더 멀리 떠날 수도 없었고 자유로워질 수도 없었다.

‘수도로 돌아가면 적어도 르쉬아는 재기가 가능할 텐데.’

드루쉬아는 그녀의 손에서 비어버린 컵을 가져가며 여상한 어조로 말했다.

“또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굳어있던 얼굴이 아시카를 돌아보며 스르륵 풀어진다. 그녀가 고개를 들지 않자 따뜻한 손이 뺨을 매만졌다.

“아시카.”

“으응….”

“너를 두고 모험 따윈 하지 않을 거야.”

일말의 여지조차 두지 않는 단호한 목소리. 새파란 눈동자가 차마 마주 보기 버거울 만큼 강렬하다. 그 속에는 채 삭이지 못한 분노와 두려움이 숨어있었다.

그 두려움 속에 스쳐 가는 기억이 무엇인지 안다.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던 그녀를 안고 끈질기게 도망쳐야 했던 그 날.

끝끝내 모든 것을 등지고 달아나면서도 드루쉬아는 아시카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그 절박했던 마음을 모르지 않기에 아시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지금도 좋아.”

가녀린 손마디가 뺨에 얹어진 손을 살포시 덮었다. 아시카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고 그제야 드루쉬아도 따라 웃었다.

그러나 순간 그의 몸이 바짝 굳어졌다.

“르쉬아, 왜?”

드루쉬아는 대답 대신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만히 귀를 기울였지만 온 집안을 울릴 만큼 거센 폭우 소리는 여전했다. 그런데도 그의 온 신경은 문밖으로 향했다. 그러기를 얼마간.

삐이이익.

“새 소리?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아시카의 얼굴에도 의문이 떠올랐다. 드루쉬아는 무섭게 굳어진 얼굴로 벽난로 옆에 세워진 검을 들었다.

“아시카, 이리….”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재앙은 갑작스럽게 들이닥쳤다. 마치 그날 밤처럼.

콰당. 콰르릉.

“악!”

사위를 밝히는 번갯불과 뒤따라오는 요란한 천둥소리. 문이 부서지는 파열음은 그 소음에 파묻히고 말았다.

드루쉬아는 한 팔로 아시카의 허리를 확 낚아챘다. 자신의 등 뒤로 그녀를 숨기는 동시에 날카로운 쇳소리가 부딪쳤다.

캉-!

눈앞이 아찔해지는 순간, 부서진 문과 창문에서 거센 비바람과 함께 새카만 옷을 입은 자객들이 들이닥쳤다.

비바람에 거실 등잔이 꺼지고 남은 빛은 벽난로에서 너울거리는 불빛뿐이었다.

챙, 콰광.

매섭게 부딪히며 불꽃이 튀는 검날과 눈앞을 가로막은 남자의 너른 등. 그 앞에 검을 들고 무자비하게 달려드는 새카만 인영들.

모든 것이 악몽 같았다. 망막에 들러붙어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악몽.

“아시카, 달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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