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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100화 (100/100)
  • 100화

    에필로그 : 믿음

    “아가씨, 이거 먹을래요?”

    루이스가 사과 한 알을 로즈마리에게 내밀었다.

    로즈마리의 눈동자 색을 닮은 새빨간 사과였다.

    “이렇게 먹으면 돼요. 여기를 앙, 물고. 꼭꼭 씹어서.”

    사과를 받고 보기만 하는 로즈마리에게 루이스가 다정하게 설명했다.

    설마 내 동생이 사과도 먹을 줄도 모르는 걸로 아는 걸까?

    나무 위에서 더글라스의 아들 루이스와 동생 로즈마리를 바라보는 르웬의 연보라색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아버지.”

    르웬이 르나르를 찾아간 건 가을 햇살이 제법 따듯했던 루즈벨트 대공작 저택의 어느 날이었다.

    “저희 로즈마리를 노리는 후레자식이 있는데요.”

    * * *

    “으아아앙, 엄마-!”

    로즈마리가 울음을 터뜨린 채 날 찾아왔다.

    아이가 우는 것을 보니 심장이 덜컥하고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일이야, 마리?”

    “으앙, 엄마! 아빠가 루이스를 괴롭히고 있어…!”

    로즈마리의 제보를 받은 내가 루이스와 르나르가 있다는 서재를 급습했다.

    서재엔 르웬의 외국어 교육을 담당하는 가정교사가 루이스, 르나르와 함께였다.

    르나르는 루이스를 붙잡아 놓고 가정교사에게 루이스를 가르치게 시키고 있었다.

    “어? 왔어요, 여보?”

    내게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듯한 르나르가 눈을 휘어 웃으며 먼저 애교를 부렸다.

    하지만 이미 르나르의 잘생긴 얼굴과 사랑스러운 애교에 면역된 나였다.

    “르나르. 지금 루이스를 데리고 뭐 하는 거예요?”

    “응. 아니타어를 가르치려고. 그레이시아나 제국뿐 아니라 그쪽에도 마력석이 많이 매장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국가가 발전되지 않아 채굴을 못 하고 있으니 우리가 도와주면 얻는 이득이 생기지 않겠어?”

    “그거랑 루이스가 아니타어를 배워야 하는 게 무슨 상관이죠?”

    “워낙 교류가 없던 왕국이라 그쪽 언어를 할 수 있는 인재가 없으니까. 루이스에게는 언어적 재능이 보이기도 하고.”

    능글거리며 말 잘하는 더글라스를 닮아서인지 외국어 공부에서 특히 두각을 나타내는 루이스이긴 했다.

    하지만 이제 겨우 7살인 아이를 저렇게까지 붙잡아 둬야 할 필요가 있을까?

    로즈마리가 아빠가 루이스를 괴롭힌다고 생각했을 만큼.

    “너무 이르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조기 교육은 빠를수록 좋지.”

    르나르가 싱긋 웃었다.

    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르웬의 교육에도 신경 쓰지 않는 당신이 루이스 교육에 이렇게 신경 쓴다고요? 솔직히 말해 봐요. 단순히 그 이유 때문인지.”

    “…….”

    “내게 거짓말하면 안 되는 거 알죠?”

    “……여보, 그게….”

    “하. 따라와요.”

    * * *

    가을 햇살이 내리비치는 방안에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내가 루즈벨트 부자(父子)와 마주 봤다.

    나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르나르, 로즈마리가 친구를 사귀는 일에 관여하지 말아요. 르웬, 너도.”

    내가 코웰 대공과 오빠들의 과보호 받고 자라 친구가 없단 것을 아는 르나르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 받아들이는 표시를 했다.

    하지만 르웬의 눈빛엔 반항심이 가득했다.

    언젠가부터 로즈마리에게 집착이 심해진 르웬이었다.

    엄마는 아빠의 것이란 르나르의 세뇌가 먹혀들기 시작한 무렵부터였던 것 같다.

    ‘저 아이를 어쩌면 좋을까….’

    아이를 키우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으니.

    그래도 거듭되는 내 재촉에 르웬은 고개를 끄덕였고 일은 그렇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 * *

    하지만 일이 그렇게 마무리되지 않았었단 걸 내가 알게 된 건 그로부터 1년이 더 지나서였다.

    그 1년 동안 로즈마리와 루이스를 향한 르웬의 훼방과 르나르의 협조는 내 눈을 피해 조용히 이루어졌다.

    왜 안나가 내게 알리지 않았나 하였더니 안나는 그 사이 루이스가 훌륭한 통역가가 될 싹을 보이기 시작한 것에 썩 만족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1년 사이 로즈마리가 변했다.

    “엄마, 혹시 마리 못 보셨어요?”

    집무실에서 서류작업을 하고 있던 내게 르웬이 와 물었다.

    “응. 못 봤는데?”

    “아, 네…. 알겠습니다.”

    르웬이 예의 바르게 내게 인사하고 집무실 문을 닫았다.

    하지만 문이 닫히자마자 그가 빠르게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로즈마리가 또 르나르와 르웬을 속이고 루이스와 도망을 친 것이 분명했다.

    어렸을 땐 무척 순한 줄로만 안 아이였는데.

    순한 듯 보이면서도 사실 제 뜻이 있는 내 성격을 꼭 빼닮은 게 로즈마리였다.

    르웬의 성격은 두말할 것도 없이 르나르 판박이였고.

    그렇게 로즈마리는 자꾸 도망치고 르웬의 집착은 점점 심해지던 어느 날.

    레놀드 후작 부부가 루즈벨트 대공작 저택에 방문했다.

    은발에 노란 눈동자를 가진 아들도 함께였다.

    “…나, 네 노란 눈동자가 싫은데.”

    르웬이 존 레놀드 후작 영식에게 하면 안 될 소리를 했다.

    루이스의 노란 눈동자를 떠올린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곧 다시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네 은발은 좋아.”

    르웬과 존은 급속도로 친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여보, 잠깐 이리 와 봐요.”

    르나르가 일하던 날 정원으로 끌고 갔다.

    그러곤 나를 한 팔로 감싼 채 커다란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르나르, 지금 뭐 하는….”

    “쉬잇…! 저기 좀 봐요.”

    르나르의 손끝이 향하는 쪽을 보니 은발에 노란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아이에게 꽃을 내밀고 있는 르웬의 모습이 보였다.

    여자아이의 눈동자 색과 꼭 같은 노란색 꽃이었다.

    “이 꽃. 네 눈동자 색을 닮았어.”

    노란 꽃을 받아 든 여자아이가 르웬을 보며 아이 위에 쏟아진 황금빛 햇살처럼 환하게 웃었다.

    르웬의 귀 끝이 조금 붉어졌다.

    “르나르, 저 아이는 누구죠?”

    내가 처음 보는 여자아이를 가리켜 르나르에게 물었다.

    “레놀드 후작 부부의 딸이에요. 존 레놀드의 여동생. 에일리 레놀드. 존이 오늘 데려왔어.”

    르나르가 내게 설명했다.

    나는 르웬의 집착 대상이 바뀔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여보, 우리도 데이트 갈까요?”

    그때, 르나르가 별안간 내게 물었다.

    똑같이 르웬을 보고도 나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는 르나르였다.

    르나르가 내게 손을 얽어왔다.

    “뜨거운 사랑이라면 우리도 못지않은데.”

    * * *

    “안나, 르웬과 로즈마리를 잘 부탁해.”

    “그럼요! 걱정 마셔요, 마님!”

    르나르와 내가 저녁을 먹기 전 루즈벨트 대공작 저택을 나섰다.

    바다 위의 해가 만든 긴 빛의 길이 사라져갈 무렵이었다.

    제국의 기념일인 겔리온의 대관식 날짜가 다가오자 초가을의 멜로소는 축제 분위기였다.

    수도 알베인의 대관식 전야제가 화려했다면, 멜로소는 좀 더 고즈넉하고 아기자기한 맛이 있는 쪽이었다.

    요즘 가장 인기가 있다는 식당에서 맛있게 밥을 먹은 르나르와 나는 바다와 이어진 비뉴 강에 배를 타는 사람들을 구경하러 갔다.

    하얀 달빛이 부서져 내린 강 위로 연인이나 가족을 태운 알록달록한 조각배들이 떠다녔다.

    강물에는 연보라색 데이지가 떠다니는 중이었다.

    배를 탄 사람들이 띄우는 것이었다.

    데이지의 꽃말이 평화이기에.

    제국의 평화를 신께 기도하기 전 평화의 꽃말을 가진 데이지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전통이라고 했다.

    다행히 겔리온은 현명한 통치로 제국민들의 진심 어린 기도에 대한 응답이 되어주는 중이었고.

    이제는 플루토나 제국민이 된 그레이시아나 제국민들에게까지도.

    “이 꽃, 당신 눈동자 색을 닮았어요.”

    강에서 데이지 꽃 하나를 집어온 르나르가 그 꽃을 내게 내밀며 말했다.

    낮의 르웬을 떠올린 내게서 웃음이 터졌다.

    의도한 거였는지 르나르의 입가에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고마움의 의미로 내가 르나르의 볼에 입을 맞춰줬다.

    그리고 멀어지려던 차, 르나르가 내 허리를 당겼다.

    우리가 앉은 곳이 그늘로 가려진 곳이라 참 다행인 깊고 긴 입맞춤이 시작됐다.

    사실 밤마다 대단히 많은 일을 겪어 왔기에 나는 이제 이 정도 입맞춤엔 익숙했다.

    황궁 마법약 연구소의 수석 연구원이 된 릴리안이 피임약을 개발한 뒤로, 르나르가 날 그냥 두는 날이 없었기에 더 익숙하기도 했다.

    솔직히 그와 보내는 밤에 비하면 이런 입맞춤은 제대로 격식을 갖춘 풀코스 식사의 에피타이저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쉽진 않았다.

    이 남자는 그 에피타이저도 무척 맛있게 만들 줄 아는 남자였으니까.

    내가 목을 감자 르나르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러곤 내 귀에 속삭였다.

    “여보, 이제 집에 가셔야 할 것 같은데요?”

    “…벌써요?”

    “당신이 내게 매달릴 때면 이미 날 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라.”

    * * *

    “아빠-! 엄마-!”

    저택에 도착하니 로즈마리가 전속력으로 달려와 내게 안겼다.

    “오셨어요?”

    곧 얼굴을 보인 르웬도 나와 르나르를 맞이했다.

    “왜 안 자고 있었어? 늦을 거니 먼저 자라니까.”

    “그냥요. 두 분 오시는 거 보고 자려고요.”

    왠지 빨리 철들어버린 것 같은 르웬이 제법 어른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반면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한 듯한 로즈마리는 내 다리를 붙들고 늘어졌다.

    “엄마, 마리 오늘 엄마랑 같이 자면 안 돼? 마리 오늘 엄마랑 자고 싶어.”

    내 심장을 녹이던 마리의 애교를 단칼에 거절한 건 다름 아닌 딸 바보 르나르였다.

    “안 돼.”

    르나르가 울상이 된 마리를 들어 올려 그의 품에 안았다.

    “엄마는 매일매일 아빠와 자야 해. 엄마는 아빠 거니까 우리 공주님이 이해할 수 있지?”

    로즈마리를 아무리 예뻐해도 그 점만큼은 항상 분명히 하고 있는 르나르였다.

    “힝. 아빠 나빠.”

    “아빠는 우리 마리 사랑해.”

    르나르가 로즈마리의 하얗고 통통한 볼에 촉 하고 입을 맞췄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고 있는데 누군가 내 손을 잡는 게 느껴졌다.

    시선을 내리고 보니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내 손을 잡은 르웬이 보였다.

    “…그냥요. 아버지가 로즈마리를 데리고 있으니까. 엄마가 외로우실까 봐.”

    아이의 점잖은 말투에 내게서 웃음이 터졌다.

    행복했다.

    오늘 나는 행복했고, 내일 아침에도 눈을 뜨면 이런 행복이 이어질 것이었다.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사람들은 내 곁을 떠나지 않을 테니까.

    이 사람들은 나를 사랑하고,

    나도 이 사람들을 사랑하니까.

    이제 행복은 더는 내게 언젠간 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행복은 늘 내 곁에 있었다.

    언제나 고개를 돌리면 나와 눈이 마주치는 르나르처럼.

    르웬처럼. 로즈마리처럼.

    난 이제 믿을 수 있었다.

    내 것인 행복을.

    나의 것으로 주어진 사랑을.

    Fin.

    @ZP 타싸X요게X공금갠소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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