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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99화 (99/100)
  • 99화

    세상에 이럴 수가

    올렌도의 침실은 금방이라도 진혼곡이 울려 퍼질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아무런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침실 안을 둘러본 내 감상평은 그랬다.

    그나마 올렌도의 침대 위에서 올렌도와 함께 지낸다는 토끼만이 그 방에 미약한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는 듯했다.

    “정치가 뜻대로 안 되시니 술에 손대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다 중독이 심해지셨고…. 제정신을 차리는 날들이 적어졌다 보니 그런 편지까지 보내게 되신 겁니다. 황자님께는 황좌를 떠나고 싶어도 자리를 건네줄 적당한 사람이 없으시니까요.”

    죽은 듯 잠든 올렌도를 보며 시종장이 설명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내가 시종장에게 물었다.

    “…저요?”

    “당신도 그레이시아나 제국민이잖아. 그런데 이렇게 올렌도 황자 전하 마음대로 제국이 통합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저는….”

    “…….”

    “코웰 가문이 워낙 그레이시아나 에서도 명망이 높았던 가문이다 보니, 통합 후 그레이시아나 제국민들이 플루토나 제국민들과 평등한 권리만 보장받을 수 있다면 통합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코웰 가문에 대한 신뢰가 있으니까요. 이대로 그냥 두면 변변치 않은 이가 찾아와 제국을 엉망으로 만들거나…. 그레이시아나 제국이 이리와 승냥이 떼의 먹이가 될 것이 자명하기도 하고요.”

    이리와 승냥이 떼는 자원이 많은 그레이시아나 제국을 호시탐탐 노리는 대륙의 다른 국가들을 뜻하는 것이었다.

    “제국을 살려주세요, 대공녀님.”

    시종장이 내게 부탁했다.

    나는 무어라 입을 열지 않았다.

    이에 시종장이 오히려 내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대공녀님을 죽이려 했다는 소리를 듣고 올렌도 황자님께서 연인이었던 케이시 양도 북쪽 탑에 유폐시키셨습니다. 그런 황자님을 봐서라도….”

    “황자님께서 케이시를…?”

    처음 듣는 얘기였다.

    올렌도가 캐스티나를 탑에 유폐시켰다는 것은.

    사실 두고 온 캐스티나를 기억해낸 뒤 코웰 저택에 사람을 보냈을 때 캐스티나가 사라졌단 소식을 듣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

    올렌도가 캐스티나를 데려갔을 것이란 사실을.

    ‘하지만 데려가 탑에 유폐시켰을 줄은….’

    “끔찍한 유폐 생활이었을 겁니다. 빛이 아예 없는 곳에서 형편없는 식사로만 생활하셨으니까요. 그래서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 같긴 하지만….”

    시종장이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하지만 그에 관해서는 더 입을 열지 않았다.

    “저희 황자 전하께선 폐하를 모시고 조용한 시골로 가 남은 평생을 고요히 보낼 수 있기만을 바라고 계실 뿐입니다.”

    말하는 시종장의 눈에 눈물이 고여왔다.

    내가 싫어하는 시종장이었지만 시종장의 그레이시아나 황가를 위한 충심만큼은 진심인 듯 보였다.

    르나르에게도 내내 깍듯한 태도를 유지하는 걸 보면.

    “그 인간이 아직도 살아있어?”

    르나르가 시종장에게 물었다.

    르나르가 뜻한 ‘그 인간’이 누구인지 이해한 시종장이 미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르나르를 향한 정중한 태도를 바꾸지는 않았다.

    “깨어나셨고, 몸도 힘을 들이면 어느 정도까지는 움직일 수 있게 되셨습니다. 혀는 완전히 굳어버려 말은 할 수 없게 되셨지만요.”

    말하는 시종장의 목소리가 떨리며 시종장의 눈동자가 또다시 눈물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작게 한숨을 내쉰 내가 르나르를 봤다.

    “르나르는 어떻게 생각해요?”

    “…뭘 말이십니까?”

    “르나르가 굳이 반대하지 않으면. 올렌도가 원하는 대로 해줄까 하는데.”

    르나르가 시선을 내려 시체처럼 잠든 올렌도를 봤다.

    르나르의 눈빛은 서늘했지만 나는 올렌도를 보는 르나르의 눈길에 이복형제를 보는 마음이 어느 정도 섞여 있었단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 * *

    그날은 유난히 볕이 황금빛이었던 루즈벨트 대공작 저택에서의 초가을 어느 날이었다.

    “우욱……!”

    내가 헛구역질했다.

    갓 구워진 빵이 바구니 가득 내 앞에 놓이자 내가 헛구역질했다.

    고기를 찍은 포크를 입에 넣던 르나르가 동작을 멈춘 채 나를 봤다.

    르나르의 적갈색 눈동자가 심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임신이십니다.”

    주치의가 진단 내렸고 르나르가 절망했다.

    ‘언제 생긴 거지…?’

    르나르가 거의 하룻밤도 날 그냥 두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날짜를 추정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주치의가 알려준 예상 임신 주 수를 계산해 생각해보면, 르나르가 내게 황관을 씌워줬던 황성에서의 그날인 것 같았다.

    게다가 한동안 알아서 조절하던 르나르가 그를 내 밖으로 빼지 못했던 게 그 날뿐이었으니.

    “세상에…. 이럴 수가….”

    르나르는 받은 충격을 숨길 생각조차 없는 것 같았다.

    “좋아하는 척이라도 해줄래요? 르웬의 동생이 생긴 건데?”

    “또 임신이라고요? 저보고 1년을 또 기다리라 그 말씀이세요?”

    “…….”

    “세상에….”

    나와의 관계가 다시 시작된 이후 본인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곤 하던 르나르를 기억했기에 나는 더 그를 탓할 수가 없었다.

    * * *

    로즈마리는 알록달록한 봄꽃들이 흐드러지게 멜로소를 덮어나가던 계절에 세상에 나왔다.

    르나르가 원했던, 날 꼭 빼닮은 여자아이였다.

    백발에 가까운 은발.

    투명하게 하얀 피부.

    하지만 눈동자 색만은 제 아빠를 닮은 로즈마리였다.

    나는 인형 같은 그 아이가 너무 예뻐 로즈마리가 태어난 뒤 한동안은 한시도 로즈마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르웬도 분명 처음 본 사람들이 입을 다물지 못하고 놀랄 만큼 예쁜 아이였지만,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보는 기분은 이상하게 또 달랐다.

    내가 그렇게 될 정도였으니 르나르는 완벽한 딸 바보가 됐다.

    대공과 오빠들은 손녀 바보, 조카 바보가 됐고.

    르웬 또한 로즈마리를 좋아하는 눈치였다.

    르웬과 로즈마리가 함께 누워있는 모습을 보면 난 그렇게 행복해질 수가 없었다.

    르웬이 제 옆에 로즈마리가 오면 손을 꼭 붙잡곤 했기 때문이었다.

    르나르, 르웬, 로즈마리와 함께라면 난 언제든 행복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 *

    “아앙-!”

    사슴을 처음 본 로즈마리에게서 탄성이 터졌다.

    르웬이 사슴을 처음 봤을 때와 꼭 같은 탄성이었다.

    “사슴! 사슴이야!”

    사슴의 다리를 끌고 온 르웬이 로즈마리에게 설명하듯 말했다.

    태어난 지 2년이 다 되어가니 이제 제법 말을 잘하게 된 르웬이었다.

    르웬이 끌고 온 사슴은 플루토나 황성에서 루즈벨트 대공작 저택으로 데려온 사슴이었다.

    르나르가 엘로즈라 이름 붙인 바로 그 하얀 사슴.

    작년까지만 해도 르웬만큼 작아 영영 자라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사슴은 이제 제법 몸집이 커진 상태였다.

    “앙-! 아-!”

    로즈마리가 내 머리칼을 잡아당기며 아기 소리를 냈다.

    그러곤 사슴을 가리켰다.

    “아앙-!”

    내 눈엔 사슴과 로즈마리가 닮아 보이는데.

    로즈마리에겐 사슴과 내가 그런 모양이었다.

    그런데 로즈마리는 금세 사슴에게서 흥미를 잃었다.

    청명한 여름의 햇살을 담아 반짝이는 적갈색 눈동자가 그 눈동자 색과 꼭 같은 색 털을 가진 여우에게 향해 있던 것이었다.

    “으응-! 으응-!”

    로즈마리가 날 잡고 보채기 시작했다.

    로즈마리가 원하는 것을 눈치챈 르웬이 정원 구석에 가 여우를 안고 돌아왔다.

    여우는 자라나는 사슴과 달리 내가 처음 봤을 때와 똑같은 몸집이었다.

    타국에서 애완용으로 개량시킨 여우라 그런 걸까?

    여우는 이제 르웬이 덥석덥석 그를 들어 올리는 것이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발버둥 치지 않았다.

    ‘가만있을 테니 빨리 끝내.’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긴 했지만 말이었다.

    “꺄앙-!”

    로즈마리에게서 그녀가 기분 좋을 때만 내주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르웬이 넘겨준 여우를 품에 안은 로즈마리가 여우의 털에 얼굴을 비볐다.

    여우도 르웬보다는 로즈마리가 편한 모양인지 그녀의 어깨에 턱을 괬다.

    작은 상자를 손에 든 르나르가 정원으로 들어선 것은 그때였다.

    “대공녀님?”

    아직도 날 대공녀라고 부르는 르나르였다.

    “대체 절 언제까지 대공녀라고 부를 건가요? 전 이제 루즈벨트 대공작 부인이에요. 또 플루토나 제국의 마탑주인데. 아무도 더는 날 대공녀라고 부르지 않아요.”

    내가 르나르에게 면박을 줬다.

    “제가 그래서 대공녀님을 대공녀님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저 말고 이제 더는 아무도 대공녀님을 그렇게 부르지 않으니까요. 아무도 부르지 않는 호칭으로 부르는 게 좋습니다. 절 특별한 걸 좋아하니까요.”

    르나르가 싱긋 웃으며 심상히 말했다.

    그러곤 내 귓불 아래 입을 맞추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유일한 건 더 좋고.”

    내 얼굴이 뜨거워졌다.

    뜨거웠다.

    정원에 내리쬐는 햇살이.

    여름 햇살이라 그런 모양이었다.

    ‘왜 아까는 몰랐지…?’

    오늘 볕이 이렇게 뜨겁다는 걸.

    “아빠-!”

    르웬이 안아달라고 르나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르나르가 르웬을 보며 다정하게 웃은 뒤 그를 들어 품에 안았다.

    로즈마리가 태어나고 오히려 르웬에게 관대해진 르나르였다.

    이제 르나르는 정말 르웬을 질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 참, 대공녀님. 그거 드세요. 마카롱이에요.”

    르나르가 그가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작은 분홍색 상자를 가리키며 내게 말했다.

    핑크색 리본을 풀고 연한 핑크색 상자를 여니, 보이는 것은 상자 가득 빼곡히 들어찬 눈이 부실 정도로 알록달록한 마카롱들이었다.

    그중 딸기가 사이에 들어간 진한 핑크색 마카롱을 하나 꺼내 내가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달콤한 황홀함이 입안 가득 퍼졌다.

    “대공녀님. 입에 크림 묻으셨어요.”

    르나르가 그의 오른쪽 입꼬리를 손끝으로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내가 손을 들어 닦으려 하자 르나르가 르웬을 한 팔로 고쳐 안고는 내 팔을 잡아 내 행동을 제지했다.

    그러곤 크림이 묻었다는 내 오른쪽 입꼬리를 혀로 핥았다.

    “맛있네요. 부인.”

    어쩐지 의미심장한 르나르 위로 플루토나 제국의 맑고 투명한 여름 햇살이 쏟아졌다.

    * * *

    목욕을 마치고 침실로 들어선 시간.

    큰 보름달이 방안을 휘황찬란하게 비추고 있었다.

    르나르는 침대에 누워 오늘 자 제국신문을 읽고 있었다.

    “아. 대공녀님. 마탑 얘기가 여기 실렸네요. 절반쯤 완성되었다고. 내년쯤이면 다 지어지는 겁니까?”

    “아마도요.”

    내가 대답하며 침대 위로 올라가 바로 르나르 품에 머리를 뉘었다.

    르나르가 읽던 신문을 협탁 위에 내려놓고 날 안아줬다.

    마력이 빠르게 순환하기 시작했다.

    온종일 르웬과 로즈마리를 보느라 누적됐던 피로가 금세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기분이 좋아진 내가 르나르의 벌어진 가운 틈으로 얼굴을 더 가까이 댔다.

    달고 시원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내가 르나르의 손가락 위를 쓸게 된 것은 그때였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궁금해서요. 르나르의 흉터들. 정말 다 없어진 게 맞는지.”

    나와 제대로 몸을 섞기 시작한 뒤부터 르나르의 손가락 흉터가 전부 없어진 건 이미 알았다.

    악몽도 이젠 아예 꾸지 않게 되었단 것도.

    하지만 그래도 느껴보고 싶었다.

    흉터가 전부 사라진 그를.

    내가 치유할 수 있어 감사한 그를.

    그렇게 손 위를 가만히 쓰는데 르나르가 내 가슴을 쥐어왔다.

    그러곤 내 귀에 속삭였다.

    “그거 기억하십니까? 르웬이 태어났을 때도 딱 한 계절 지나고 대공녀님을 다시 안았었는데.”

    “…….”

    “로즈마리는 봄에 태어났고 지금은 여름인데.”

    르나르의 여름처럼 뜨거워진 손이 내 치마 아래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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