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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98화 (98/100)
  • 98화

    여왕처럼

    “그래서 주치의가 임신이라고 진단을 내렸는데, 더글라스가 그 얘기를 듣고 얼마나 펑펑 울었는지 몰라요. 더글라스는 아기를 안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정말 의외였다니까요?”

    내가 한껏 상기된 목소리로 르나르에게 조잘조잘 떠들었다.

    르나르가 내 이야기가 기껍다는 듯 미소 지었다.

    하지만 나를 이끄는 걸음을 늦추지는 않았다.

    “근데 르나르,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르나르는 나를 데리고 황성 복도를 걷는 중이었다.

    알록달록한 유리와 격자무늬 창살로 이루어진 복도 천장에서 조각난 황금빛 가을볕이 쏟아져 내렸다.

    르나르의 분위기는 어쩐지 조금 들떠 있었다.

    “가보시면 압니다.”

    르나르의 걸음이 멈춘 곳은 규모가 큰 무도회를 열 때 쓸 수 있다는 그랜드 홀 안이었다.

    거울처럼 보일 정도로 반짝반짝 빛나는 바닥이 있는 그 홀 안은 텅 비어있었다.

    이상했다.

    이 큰 홀에 하녀 한 명 보이지 않는 것이.

    ‘르나르가 미리 비우게 한 걸까?’

    의문을 가지고 둘러보던 내 시야로 등받이가 긴 화려한 의자가 들어왔다.

    의자는 홀 입구에서 바로 보이는 건너편 단상 위에 있었다.

    그리고 그 의자 위에 놓인 것은 정면에 커다란 붉은 보석이 박힌, 유난할 정도로 화려한 관(冠).

    “……!”

    내가 놀랐다.

    르나르가 갑자기 공주님 안기로 날 안아 들었기 때문이었다.

    날 안은 르나르는 의자와 관을 향해 거침없이 걷기 시작했다.

    “대관식에서 사용될 의자와 관은 대관식 전날 도착합니다. 저건 예비 황제 폐하께서 미리 받아보신 샘플이고요.”

    “…….”

    “그런데 사실 대관식에서 사용될 것들과 똑같이 생겼습니다. 겔리온 대공자님께서 저기서 더 수정 안 하겠다고 하셨거든요.”

    “더 수정 안 하겠다면 의자와 관이 왜 새로 오는 거죠? 그냥 이걸 쓰면 될 텐데.”

    첫눈에도 아름다운 황관을 내려다보며 내가 이해가 가지 않아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날 보는 르나르가 피식 웃었다.

    “일부러 샘플까지 주문하신 거죠. 샘플은 대공녀님께 선물하시려고.”

    “저런….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사실 저만큼이나 대공녀님께서 황좌에 오르길 바라셨던 대공자님들이시니까요.”

    “…….”

    사실 나도 모르진 않았다.

    대공도 오빠들도 처음부터 내가 황제가 되길 바랐었다는 거.

    하지만 내가 황좌를 거부했기에 그 제의는 르나르에게 갔고, 그 뒤 다시 겔리온에게로 가게 된 것이었다.

    나는 정말로 황제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제국을 이끌어야 하는 그 자리가 부담스럽기도 했고, 업무에 치이는 것보다는, 르나르와 르웬과 즐겁고 평범하게 지내는 것이 좋았으니까.

    또 내게 황좌는 르나르에게 주고 싶은 자리였다.

    알고 보니 르나르 역시 황좌를 내게 주고 싶은 자리 이상으로 여기지 않고 있긴 했지만.

    “대공자님들께서 저보고 직접 드리라고 했습니다. 대공녀님께서 분명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하실 거라면서.”

    “하.”

    정말로 그 말을 뱉은 내가 어이없어져 탄식만 흘렸다.

    낮게 웃은 르나르가 날 한 팔로 고쳐 안은 뒤 다른 팔로 관을 들고 날 의자에 앉혔다.

    그러곤 내 머리 위에 관을 올렸다.

    그 뒤엔 몇 걸음 뒤로 물러서 날 감상하기 시작한 르나르였다.

    “…이거 좀 무겁네요?”

    왕관의 무게가 견디기 어려웠던 내가 목에 빳빳이 힘을 주며 말했다.

    “얼마나요?”

    “음…. 한 2kg…? 고개 숙이면 목이 부러질 것 같아요.”

    “그래도 잠시만 그러고 계셔 주시겠어요? 너무 보기 좋아서.”

    르나르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걸렸다.

    르나르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천장까지 닿는 그랜드 홀 창을 통해 가을 오후의 찬연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허리를 숙여 나와 눈을 맞춘 르나르가 이내 내게 입을 맞춰왔다.

    “르나르, 잠시. 나 황관 벗고.”

    “쉿. 가만히 계세요. 목이 부러지진 않게 해드릴게요.”

    르나르가 뻣뻣하게 굳은 내 목을 양손으로 감싸 보호했다.

    그러곤 길고 긴 입맞춤을 이어갔다.

    그 양손 중 한 손이 내 목에서 떨어진 건, 관의 무게와 르나르의 향에 짓눌린 내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던 때였다.

    “르, 르나르……! 안 돼요. 여기서 이러면……!”

    가슴을 쥔 르나르에 당황한 내가 소리치듯 속삭였다.

    하지만 나를 보는 르나르의 눈빛은 이전처럼 평화롭지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이젠, 존재를 몰랐던 먹이를 막 발견한 맹수의 눈빛이었다.

    “…그거 무거우시죠? 벗겨드릴까요?”

    내 머리 위에서 황관을 내린 르나르가 공주님 안기로 날 안아 들었다.

    그랜드 홀과 이어진 휴게용 방으로 향하는 르나르였다.

    * * *

    르나르가 한껏 예민해진 내 정점을 핥자 내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내가 울자 르나르는 웃었다.

    “전 처음엔 정말 대공녀님께서 못 느끼시는 줄 알았어요.”

    잔뜩 어그러뜨린 눈썹을 하고 키득키득 웃는 르나르의 열기 어린 웃음소리가 혼미해진 내 의식 사이로 스며들었다.

    “이렇게 예쁘게 잘 젖으시는데….”

    성대를 긁는 목소리로 중얼거린 르나르가 눈물이 흐른 내 눈꼬리에 촉 하고 입을 맞췄다.

    그러면서도 허리를 쳐올리는 움직임을 멈추지는 않았다.

    한 곳만 유독 찌르는 그 때문에 나는 세계가 뒤집히는 것만 같았다.

    “대체 왜 그렇게 집요하게 괴롭히는 거예요?”

    가쁜 숨만 헐떡헐떡 내뱉던 내가 르나르에게 날을 세웠다.

    그가 다시 허리를 짓쳐 올렸다.

    “글쎄요, 괴롭힌다기보단….”

    멀어졌던 그가 다시 내 안으로 깊어졌다.

    “……!”

    나는 무의식중에 내 다리로 르나르의 허리를 감았다.

    그 순간 조금은 여유가 있던 르나르 눈이 뒤집혔다.

    그리고 내 시야도 뒤집혔다.

    날 안고 몸을 뒤집어 순식간에 그의 위로 날 올린 르나르였다.

    “움직여 봐요, 대공녀님.”

    “…….”

    “대공녀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당황한 내가 여전히 그를 품은 채 어버버 했다.

    내가 몸을 조금 틀자 르나르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하아…….”

    “…….”

    “마음 가는 대로 해봐요.”

    “…….”

    “여왕처럼 군림해 봐요.”

    망설이던 내가 서툴게 몸을 움직이자 르나르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르나르의 몸이 타버릴 듯 뜨거워졌다.

    앙큼한 내 남자가 내 아래에서 엉망이 되기 시작했다.

    * * *

    겔리온의 황제 대관식은 가을볕이 유난히 황금빛이던 어느 날 황궁 내 예배당에서 진행됐다.

    르나르는 대공작의 칭호를 받는 동시에 황실 기사단 단장이 됐다.

    나는 마탑주가 됐다.

    당분간은 명예직이었지만 내후년 마탑이 완공되면 할 일이 많아질 터였다.

    사실 마법은 잘만 쓰면 일반 제국민들에게 도움 될 것이 많았다.

    보통의 제국민들과 마녀, 마법사들이 함께 어우러져 잘 살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고, 마법을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앞으로 내가 하게 될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심 그 일이 기대되는 것 같았다.

    겔리온이 쓴 화려한 황관보다 마탑주의 상징으로 내게 수여된 지휘봉이 더 마음에 드는 것을 보니 말이었다.

    지휘봉을 들고 지켜보는 사람들을 마주하고 섰던 순간, 예배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유리창을 통해 쏟아진 햇살.

    그 햇살을 받아 오색 빛깔로 빛나던 르웬의 날 보던 눈망울.

    그것은 내게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게 될 것이었다.

    르웬을 안고 날 보며 미소 짓던 르나르에 대한 기억까지도.

    대관식이 끝난 후 르나르와 나는 곧바로 멜로소로 돌아갔다.

    르웬과 함께하는 조용하고 평범한 일상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르웬은 걷기 시작한 이후로 성장이 무척 빨라진 듯했다.

    단어의 뜻을 제대로 알고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그 성장에 포함됐다.

    “음마!”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다 보면 르웬이 그렇게 나를 부르는 소리를 종종 들을 수 있었다.

    그 작은 부르짖음이 어찌나 날 놀라게 하는지.

    쿵 떨어진 듯한 심장을 부여잡고 르웬에게 달려가 보면 두 팔을 야무지게 뻗고 날 바라보고 있는 르웬을 볼 수 있었다.

    안아달라는 당당한 표현이었다.

    처음엔 내 품보다 르나르 품을 좋아했던 르웬은 언제부터인가 르나르보다 내게 안기는 것을 더 좋아하고 있었다.

    덕분에 날 두고 르나르와 묘한 경쟁 구도가 생겨버린 르웬이었다.

    내가 부자(父子)간의 경쟁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기에, 르나르에게 겉으로 드러나는 큰 문제가 따로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황성에서 겔리온으로부터 편지가 도착한 것은 그런 평화로운 일상이 이어지던 어느 날이었다.

    “대공녀님, 폐하께서 저와 대공녀님보고 황궁으로 와달라고 하시는데요? 중요하게 의논할 내용이 있다고….”

    편지를 읽은 르나르가 말했다.

    * * *

    “이 숲. 오랜만이네요.”

    포털을 건너 이제 막 그레이시아나 제국으로 넘어온 내가 르나르에게 말했다.

    르나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포털 위에 앉아있던 나비를 먼 곳으로 날아가게 했다.

    우리가 플루토나 제국으로 넘어간 후 그가 독나비인 척 숲을 채워 둔 독이 없는 나비들 중 마지막 나비였다.

    이제 포털은 만인의 것이 될 터였다.

    플루토나 제국에서 겔리온에게 듣게 되었던 이야기는 여전히 내게 충격 그 자체였지만.

    「올렌도 그레이시아나 황자에게서 편지가 왔어. 플루토나 제국이 그레이시아나 제국을 흡수해 달라고. 자기는 제국을 이끌지 못하겠다고.」

    「……그게 진짜야? 농담이 아니라?」

    「나도 놀랐어. 그 편지를 가져온 게 드리엔 별장에 왔던 시종장이 아니었다면 나도 믿지 못했을 거야.」

    「…….」

    나는 완벽하게 할 말을 잃었었다.

    「하지만 올렌도 황자가 그걸 원한다고 해도 그레이시아나 제국 제국민들이 그걸 받아들일까? 하루아침에 황실과 속한 제국이 바뀌게 되는 것을?」

    「그래서 말인데 두 사람이 그레이시아나 제국으로 가 올렌도 황자를 만나봐 줄래? 그래도 두 사람이 나보단 올렌도 황자에 대해서는 잘 알 테니.」

    올렌도를 만나기 위해 황궁으로 가면서 느낄 수 있었다.

    수도 분위기는 바뀌어 있었다.

    우리가 그레이시아나 제국을 떠난 지 2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거리거리에 예전과 같은 활력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나마 보던트 귀족 상점같이 번화한 곳은 차이가 덜 했다.

    하지만 원래도 잘 살진 못했던 지역은 그 차이가 심하게 느껴졌다.

    제국이 통째로 낡아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황성에서 올렌도를 마주하게 되었을 때.

    나와 르나르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왔어?”

    올렌도가 웃었다.

    나와 르나르가 오는 것을 알면서도 술병에서 손을 놓지 못하고 있는 올렌도였다.

    빛이 바랜 것 같은 황좌의 팔걸이 위로 올랜도의 술병 든 팔이 늘어졌다.

    “편지 받고 온 거지?”

    “…….”

    “가져가. 그레이시아나 제국.”

    “…….”

    “난 감당이 안 되는 것 같아서. 겔리온 코웰은 아카데미 시절부터 똑똑하기로 유명했으니 우리 제국민들까지 잘 챙겨줄 거고.”

    “…….”

    “난…….”

    “…….”

    “내 것이었던 제국 덕분에 대공녀를 다시 봐서 좋네.”

    가볍게 웃은 올렌도가 가물가물 감기려 하던 눈을 감았다.

    올렌도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르나르가 몸을 날려 황좌에서 떨어지는 올렌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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