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유일한 사람
“우리 그럼 다녀올게. 르웬을 잘 부탁해, 안나.”
르웬은 안나가 새로 사 온 딸랑이를 이리저리 흔들어보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르나르와 내가 둘 다 사라지려는 것을 알면 분명 울음을 터뜨릴 터.
“가세요. 어서 가세요, 마님. 도련님께서 눈치채시기 전에.”
안나가 내 등을 떠밀었다.
안나와 더글라스에게 르웬을 맡긴 나와 르나르는 저택 밖으로 나섰다.
계단 아래로 보이는 마차 앞엔 오늘 나와 르나르의 호위를 맡은 메일린과 제임스가 대기 중이었다.
노예 사냥꾼들을 잡을 미끼가 되었을 때 나와 인연을 맺은 메일린은 루즈벨트 가문의 기사가 됐다.
여자 기사는 제국 역사상 처음이라지, 아마?
게다가 메일린은 제임스와 잘 되고 있어 나를 더욱 뿌듯하게 했다.
검밖에 모르던 코웰 가문의 기사단장 제임스.
‘평생 검만 휘두르다 연애 한 번 못하고 늙어 죽을 줄 알았는데.’
르웬의 호위 기사가 된 알렌도 얼마 전 릴리안과 연애를 시작했다.
자세한 내용까진 잘 모르겠지만 알렌이 성인이 되자마자 릴리안을 엄청나게 따라다녔다고.
‘예의 바른 알렌이 릴리안에게만은 존댓말을 쓰지 않았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상념이 이어지는 사이 마차는 레놀드 후작 저택에 도착했다.
레놀드 후작 가문은 최근 루즈벨트 공작 가문과 교류가 가장 많은 가문이었다.
노예 사냥꾼들 뒤나 봐주던 프릭 후작과는 달리, 레놀드 후작 부부는 선량하고 의로운 사람들이었기에.
두 사람이 주최한 파티는 적당히 화려했고, 부부의 소개를 받아 인사를 나누게 된 귀족들과의 대화는 즐거웠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내가 마신 샴페인의 잔 수도 점점 늘어갔다.
어느 순간부터 달빛을 머금은 샹들리에가 쏟아내는 빛이 눈부시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꾸만 웃음이 많아졌다.
“이런. 제 아내가 취했나 보네요.”
내내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르나르가 결국 내 허리를 감싸왔다.
이 세계의 내 몸은 알코올 쓰레기였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르나르가 휘청거리는 날 발코니로 데려갔다.
발코니에 발을 디디자마자 차가운 바람이 휙 불어 놀란 내가 르나르 품으로 얼굴을 묻었다.
르나르의 낮은 웃음소리가 청량한 플루토나 제국 겨울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겨우 그거 마시고 취하시면 어떡하십니까? 우리 여왕님, 주량이 한 잔은 되시려나?”
르나르가 나를 놀리며 다시 한번 웃었다.
그러곤 나를 품에 가둔 채 난간 쪽으로 다가가 기댔다.
바람이 제법 차가웠다.
하지만 르나르에게 안긴 난 따뜻했다.
새카만 하늘을 하얗게 수놓은 달과 별의 무리가 아름다웠다.
“대공녀님, 이제 아기는 없어요. 우리 둘만 있어요.”
별안간 르나르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내 허리를 감고 있던 그의 팔이 어느새 내 가슴 바로 아래까지 올라와 있었다.
르웬의 이름을 듣고 나니 난 르나르에게 묻고 싶은 것이 생겼다.
“르나르. 혹시 르웬 질투해요?”
“…….”
“르웬을 왜 질투하죠? 르나르는 내 유일한 사람인데.”
자기 아들을 왜 질투하는 걸까?
내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아 물었다.
르나르는 결국, 르웬을 질투하지 않는단 소리를 하지 않았다.
대신 내게 질문을 내놓았다.
“제가 어떻게 대공녀님께 유일한 사람입니까? 대공녀님께는 르웬도 있고…. 코웰 가문 가족들도 있으신데….”
잠시 말을 잃었던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안에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잖아요.”
“!”
“르웬은 이미 나와서 다시 들어갈 수도 없는데.”
내가 르나르의 단단한 몸 위로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차가운 공기와 대비되는 따뜻한 품속이 마음에 들었다.
“취하시니 그런 소리를 잘도….”
르나르가 내 머리칼을 들어 그 머리칼에 입을 맞췄다.
시간이 갈수록 날 안은 르나르 몸의 온도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발코니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발끝이 차가워지던 것과는 반대로.
무언가 단단한 것이 내 뒤에 닿아왔다.
그리고 나는 궁금한 것이 또 생겨났다.
“그나저나 르나르. 왜 날 아직도 안지 않는 거죠?”
바로 다음 순간 내 몸이 돌아갔다.
밤하늘을 욕심껏 담던 시야에 밤하늘보다 깊은 아름다움을 가진 남자가 가득 담겨왔다.
르나르가 꽤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직도라뇨? 이미 되는 거였습니까?”
* * *
레놀드 후작 부부에게 빠르게 작별 인사한 르나르는 날 근처 여관으로 데리고 갔다.
르나르와 내가 신혼여행을 보낸 곳이었다.
내가 너무 취해 집까지 데려갈 수 없겠단 소식도 메일린을 통해 안나에게 이미 전한 뒤였다.
르나르는 조급했다.
나를 만지지도 않고 옷도 벗기지 않은 채 내 안으로 들어와 버렸으니.
“르나르……!”
그를 느끼고 놀란 내 입술 새로 고통에 찬 신음이 흘렀다.
“조금만. 조금만 참으시면 금방 괜찮아지실 겁니다.”
날 달랜 르나르가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달래는 다정한 목소리와는 달리 르나르는 이미 이성을 잃은 눈을 하고 있었다.
나도 몰랐던 어느 순간 이미 내 마음속에 훅 들어와 있던 그였다.
그런 그가 지금은 물리적으로 내 안에 있었다.
고통을 참아내는 내가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르나르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그가 뱉은 뜨거운 숨이 내 어깨 위로 흩어졌다.
그가 내 몸을 입안에 머금기 시작하자 듣기 민망한 물기 어린 마찰음이 방안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하아, 로즈.”
“…….”
“너는 어쩜 이렇게 눈도 예쁘지?”
“…….”
“코도 예쁘고.”
“…….”
“입도 예쁘네.”
“…….”
“그리고 아래도….”
르나르의 시선이 나와 그의 접합부로 이미 향한 것을 보게 된 내가, 화들짝 놀라 르나르를 당겨 입을 맞췄다.
르나르는 거부하지 않고 나와 혀를 섞어줬다.
깊고 긴 입맞춤이 한참 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입술을 뗐을 때, 나는 왜인지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러자 르나르가 내 팔을 잡아 손을 내리게 했다.
“얼굴 보여줘.”
“…….”
“넌 내 밑에서 엉망이 돼서 울 때가 제일 예쁘니까.”
그런 낯부끄러운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르나르였다.
술이 깨어오자 나는 점점 왜 아직 안지 않느냐는 소리를 대체 왜 했는지 하는 심정이 됐다.
힘들었다.
이 남자가 얼마나 중간에 멈추는 법이 없는지를 잠시 잊게 되었던 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울상이 되어가는 내 얼굴을 보며 르나르의 허리를 짓쳐 올리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 * *
슬며시 눈을 떴다.
닫힌 커튼이 등 뒤로 햇살을 잔뜩 품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열어젖히는 순간 눈부시게 쏟아지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내가 여전히 몽롱한 눈을 깜빡이는데, 헐벗겨진 어깨 위로 르나르의 따뜻한 입술이 와 닿는 것이 느껴졌다.
“좋은 꿈 꾸셨습니까, 부인님?”
“…꿈꿀 시간이나 줬고요?”
르나르가 그런 내가 재밌다는 듯 소리 내 웃었다.
‘…웃으라고 한 소리 아니었는데.’
그러고 보니 르웬이 생긴 게 이 여관, 이 방이었다.
시기는 아마 루즈벨트 공작 저택, 르나르가 태어난 방에 다녀와서.
내 예상으론 그랬다.
첫날밤보다도 그 밤, 훨씬 내게 집요했던 르나르였으니.
「낳으려면 먼저 만들어야겠네요.」
낳으려면 먼저 만들어야겠다던 이 남자.
그리고 정말 르웬을 만들어버린 이 남자.
그 남자가 지금은, 이젠 르웬 것이 된 줄 알았던 심장 위 살덩이를 입에 물고 있었다.
“…비려요. 단데, 비려. 이상한데….”
여전히 입을 떼지 않은 르나르가 조용히 하던 행동을 계속하며 맛을 평가했다.
내가 손으로 르나르를 밀어냈다.
밤새 르웬의 것을 빼앗아 먹고도 아직도 욕심이 나는 것일까?
하지만 버티는 힘이 좋은 그 남자는 내게서 밀려나지 않았다.
나는 결국 발까지 사용해 어깨를 밀어내고서야 르나르를 당분간 르웬의 것에서 떨어뜨릴 수 있었다.
먹던 것을 잃게 된 르나르가 우는 얼굴을 만들어 걸었다.
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르나르, 나도 배고파요. 우리 밥은 거기 가서 먹을까요? 폴과 니나를 처음 만났던 곳?”
내가 르나르에게 물었다.
해변과 이어진 식당을 기억해낸 건지 르나르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가 그래서 걸린 미소가 아니었단 걸 알게 된 것은 겨우 잠시 후였지만.
“그럼 일단 씻어야겠네요?”
르나르는 즐거워 보였다.
지난봄 보던트 상점 거리에서 나를 안고 도망쳤을 때처럼.
* * *
르웬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를 마주한 하얀 사슴이 그를 따라 고개를 기울였다.
“아앙-!”
기분이 좋아진 르웬에게서 탄성이 터졌다.
놀란 사슴이 도망쳤고 이제 막 걷기 시작한 르웬이 아장아장 사슴의 뒤를 쫓았다.
그러다 넘어진 르웬에게서 눈물이 터졌다.
내가 얼른 다가가 르웬을 안아 올렸다.
훌쩍이며 내 목에 매달린 르웬의 머리 위로 플루토나 황성을 비추는 것과 꼭 같은 초가을의 영롱한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우리가 황성에 온 것은 황제가 될 겔리온의 대관식 보기 위해서였다.
나의 마탑주 임명식을 위해서이기도 했고.
반역 후 2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제국은 안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그리고 이제 더는 각종 요직과 새로 필요해진 자리들을 비워둘 수가 없게 됐다.
플루토나 제국민들이 모든 직위가 채워진 완성된 황실을 강하게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코웰 가문의 맏이는 레오였지만 레오는 황제보다는 그가 코웰 가문의 가주가 될 수 있길 바랐다.
황제의 역할은 지략가 겔리온이 훨씬 잘할 수 있을 것임을 피력하며.
사실 행정 능력이 필요한 황제의 자리에 겔리온이 더 어울린다는 것에 우리 모두 동의했다.
르나르는 조금 아쉬워하긴 했다.
예전부터 날 제국의 여황제로 만들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멜로소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충분히 알았기에 르나르는 그에 관해 더 고집을 부리진 않았다.
잠시 요양을 갔다 쭉 눌러앉게 되어버렸을 만큼 나는 바다를 낀 달콤한 르나르의 도시 멜로소를 사랑했다.
멜로소를 사랑하는 것은 르나르 또한 마찬가지였다.
제국이 안정되면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않겠냐는 대공과 나의 제안을, 르나르가 애초부터 거절하고 공작이 된 이면에도 멜로소가 있었다.
르나르는 제국 전체보다도 도시 멜로소를 포함한 루즈벨트 공작령 멜로소 지역을 잘 돌보고 싶어 했다.
공작 자리로 충분하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정확히는 이번 대관식에서 겔리온에게 대공의 칭호를 받게 될 것이긴 했지만 말이었다.
어느새 울음을 완전히 그친 르웬은 정원 구석에 엎드려 쉬고 있는 적갈색 여우를 향해 손을 뻗기 시작했다.
사슴이 그에게 호감을 보이지 않자 타깃을 바꾼 모양이었다.
칭얼거리는 르웬에 내가 그를 잔디 위에 내려주자 르웬이 폴폴폴 달려가 아기 여우 앞에 앉았다.
그리고 여우를 덥석 안았다.
길이 잘 든 여우는 안전하긴 했지만 친절하진 않았다.
르웬의 품을 벗어나려 쉬지 않고 바동거렸던 것이다.
그러다 그것조차 귀찮아졌는지 여우는 르웬의 품속에 이내 널브러졌다.
내가 티테이블 위 접시에서 마카롱을 하나 집어 안나에게 내밀었다.
“안나, 이거 먹어봐. 맛있어.”
나와 맛있는 걸 자주 나눠 먹는 안나는 익숙하게 새로 고용된 황성 고용인들 눈치를 본 뒤 내가 내민 마카롱을 베어 물었다.
그러다
“욱…!”
헛구역질했다.
“별로야, 안나? 난 괜찮은 것 같은데. 그렇게 맛이 없어?”
“아뇨, 마님. 그게 아니라….”
당황한 안나가 고개를 숙이더니 제 배를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