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살살 할게요
아기가 생긴 것은 신혼여행 때.
금방 불러올 줄 알았던 배는 임신 5개월까지도 티 나게 나오지 않아 나를 걱정하게 했다.
하지만 6개월이 지나니 배가 커지는 게 눈에 보이기 시작했고 7개월이 지나니 스스로 신기할 정도로 배가 솟아올랐다.
르나르는 내 부른 배를 나만큼이나 신기해했다.
“아기가…! 아기가 절 발로 찼어요, 대공녀님…!”
한 팔로 내게 팔베개를 해준 뒤 다른 손은 치마 속으로 넣고 태동을 느끼던 르나르가 고양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내가 그를 보고 웃어줬다.
그가 나를 보고 마주 웃었다.
그런데 배를 만지던 르나르의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르나르……!”
“쉬잇.”
최근 심각한 욕구불만에 시달리고 있는 르나르였다.
내가 불러오지 않는 배 때문에 걱정한 나머지 임신 후 3개월이 지나고도 그와의 모든 행위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주치의가 안전하다고 했음에도.
그리고 배가 다 부르고 나서도 내 걱정은 멈추지 않았다.
어쩔 수가 없었다.
아기는 내게 그 무엇보다 소중했으니까.
게다가 그 행위를 할 때의 르나르는 워낙 거침없었기에.
“…살살 할게요.”
앓는 짐승 소리를 내며 르나르가 내게 속삭였다.
그러곤 내 아래에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입술 새로 신음이 흘렀고 르나르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내가 르나르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르나르는 내 어깨를 꽉 붙잡은 채 날 놓아주지 않았다.
“…이건 괜찮잖아요. 더하진 않을게요.”
내 안에서 르나르가 느껴졌고 내 발등이 곱아 들었다.
나는 곧 그의 품에서 밭은 숨을 내뱉기 시작했다.
르나르의 숨소리도 한층 더 격양됐다.
내 어깨를 놓고 가슴을 쥔 르나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 * *
“으읍……!!”
“조금만 더…! 조금만 더요, 아가씨…!”
사람이 이것보다 더 아플 수가 있을까?
“……!!”
눈앞에 빛이 번쩍였다.
이렇게 아픈데 안 죽는 게 신기했다.
“대공녀님!!!! 대공녀님!!!!”
분만실 밖에서 르나르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황자님, 들어가시면 안 된다니까요?!?! 아, 진짜!!!!”
안나의 목소리도 들렸다.
“비켜!!!!”
“제 처한테 그러지 마십시오!!!!”
“둘 다 해고해 버린다!!!!”
르나르와 더글라스가 다투는 소리도 들렸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눈에서 눈물이 수도꼭지 터진 듯 흘렀다.
“으악……!!”
“대공녀님!!!!”
“황자님!!!!”
“안나!!!!”
“밖에 전부 조용히 해요!!!!”
분노한 산파가 소리치자 드디어 밖이 조용해졌다.
진통은 14시간째 지속되고 있었다.
르나르가 곁에 있으면 조금이라도 덜 아플 수도 있었겠지만, 마력끼리의 상성 때문에 치유력이 좋아지는 게 아이와 출산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르나르도 곁에 오지 못한 채 오롯이 고통을 홀로 참아내는 중이었다.
“……!!”
또다시 고통이 왔다.
마차 여러 대가 나를 밟고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아닌가, 현실 세계 기차이려나.
“하나, 둘, 셋!”
“아가씨, 밀어요! 밀어주세요!”
“거의 다 됐어요!”
어렴풋이 들리는 목소리를 따라 내가 힘을 줬다.
그렇게 고통 섞인 눈물을 몇 번이나 흘렸을까.
산파가 내게 다가왔다.
“아가씨…! 정말 예쁜 도련님입니다…!”
산파가 울먹이며 내게 강보에 싸인 아기를 내밀었다.
르나르의 흑발을 꼭 빼닮은 아기였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아기를 안았다.
아기가 눈을 떴다.
그런데 마주친 눈동자 색은 라벤더 색.
내 눈을 꼭 빼닮은 아이였다.
‘나와 르나르를 반씩 닮은 아이.’
그리고 내 눈을 쏙 빼닮은 나의 분신.
내가 아이를 조심스레 가까이 안았다.
“반가워, 아가. 이 세상에 태어나줘서 고마워.”
내 눈에서 고통이 기쁨으로 바뀐 눈물이 흘렀다.
* * *
르웬이 태어나고 몸을 추스르기 위해 나는 멜로소 도시의 루즈벨트 공작 저택으로 요양을 가기로 했다.
르나르는 내가 임신한 동안 루즈벨트 공작이 됐다.
하지만 임신 기간 내내 내가 황성에 머물렀기 때문에 계속 내 곁에 머문 르나르도, 보수 공사가 끝난 후의 저택엔 처음 가보는 것이었다.
저택은 겉에서 봤을 땐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부서졌던 곳이 말끔하게 고쳐졌고 건물이 좀 더 새 건물이 된 것 같단 느낌 정도?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니 내부는 그 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이…이게 뭐죠, 르나르…?”
“의뢰한 대로 되었네요. 나쁘지 않죠?”
르나르가 나를 내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나는 어떻게 반응해줘야 할지 몰라 말을 잃게 됐다.
저택 내부는 퍼플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골랐던 르나르의 취향이 그대로 반영된 건지 화려함 그 자체였다.
금으로 된 난간에, 금으로 된 기둥.
천장에서 5단으로 내려오는 대형 크리스털 샹들리에까지.
“…르웬이 어디 가서 집 못 산다고 기죽을 일은 없겠네요.”
내 말에 르나르에게서 웃음이 터졌다.
맑게 웃는 그의 위로 크리스털 샹들리에의 영롱한 빛이 쏟아지듯 내려앉았다.
르나르와 꼭 같은 색 머리를 가진 르웬이 르나르에게 안긴 채 작은 몸을 움직였다.
르나르가 그런 르웬을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후에도 내가 기억하게 된, 수리된 루즈벨트 공작 저택에서의 첫 순간이었다.
* * *
“어, 마님! 눈이에요!”
르웬의 턱받이 만드는 것을 돕던 안나가 문득 고개를 들고 창밖을 보다가 별안간 외쳤다.
내 시선이 창문을 향해 움직였다.
소리도 없이 눈꽃송이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올해의 첫눈이었다.
“르나르와 르웬은?”
내가 반쯤 완성된 턱받이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사랑하는 두 남자를 찾았다.
“도련님 방에 계실 거예요, 아마.”
안나가 내게 알려줬다.
나는 곧바로 내 침실에서 나가 잰걸음으로 르나르가 태어난 아기 방으로 향했다.
금빛 커튼을 꽉 닫아놓은 방은 어두웠다.
침대 위엔 잠든 르나르와 르웬이 있었다.
‘깨우고 싶은데….’
깨우면 안 되는 거겠지?
고민하는데 때마침 눈을 뜬 르웬이 나를 보고 보채기 시작했다.
안아달라고 작은 팔을 공중에서 휘저었다.
내가 르웬을 달래주기 위해 다가가는데 어느새 깨어난 르나르가 나 대신 르웬을 안았다.
“엄마는 힘드니까 쉬게 해줘야지.”
내 남자가 단단한 근육이 붙은 팔로 내 아기를 안아 들었다.
출산 후 두 달이 되어가도록 내게 르웬을 넘기지 않고 홀로 르웬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고 있는 르나르였다.
내가 요즘 하는 일이 쉬는 일밖에 없는데도 그랬다.
쉬는 일 혹은 르웬에게 줄 무언가를 재미 삼아 만드는 일.
하지만 르나르는, 나는 무조건 쉬어야 한다며 르웬을 안는 일까지 도맡아 하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르웬은 어느새 내 품보다 르나르 품을 더 편해 하고 있었고.
조금 질투가 날 정도로.
“르나르. 르웬을 제게 줘요. 르나르가 오늘도 온종일 르웬을 돌봤잖아요.”
르나르가 르웬을 한 손으로 받친 채 다른 손을 내게 뻗었다.
그러곤 흘러내린 내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아들이 꽤 자주 보채서 대공녀님께서 돌보시면 힘들 겁니다.”
르나르가 머리를 넘기고 난 손을 아래로 내린 뒤 내 머리칼을 일부 잡아 그 위에 입을 맞췄다.
그 모습을 보는 르웬이 라벤더 색 눈을 깜빡였다.
그 순간 난 생각났다.
“아…! 지금 밖에 눈이 와요, 르나르…!”
르웬의 맑은 눈을 보고 그 사실을 떠올린 내가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금빛 암막 커튼이 거두어졌다.
하늘의 연회색 빛깔과 흰 눈의 눈부심이 동시에 아기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흩날리는 눈을 보는 르웬의 눈이 커졌다.
“르웬이 눈이 신기한가 보네요.”
멍해진 르웬을 보던 르나르가 작게 웃었다.
르웬이 귀여워 내가 르웬에게 다가가 볼에 입을 맞췄다.
르나르가 나를 당기며 입술을 내밀길래 나는 그의 입에도 입을 맞춰줬다.
떨어지려는 나를 르나르가 잡아끌면서 입맞춤이 길어졌다.
그런데 르나르가 르웬을 침대 위에 내려놓으려고 했을 때쯤 르웬 방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공작님!”
똑똑-
“손님이 오셨는데요!”
더글라스였다.
르나르의 미간이 험상궂게 접혔다.
작게 웃은 내가 르나르의 미간을 검지로 눌러 펴주면서 그 대신 더글라스에게 대답했다.
“손님이 누군데요?”
* * *
“우와, 진짜 작다….”
“진짜 작아…!”
르웬을 보는 폴과 니나가 번갈아 가며 탄성을 터뜨렸다.
두 아이를 보는 르웬이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깜빡였다.
아이들이 요람 안으로 허리를 숙이자 르웬의 눈매가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이제 됐어. 구경은 충분해.”
르나르가 요람 안에서 르웬을 안아 올리며 말했다.
울 준비가 다 되어 있던 르웬이 르나르의 품으로 고개를 묻었다.
다시 고개를 든 아기의 표정은 밝았다.
르웬도 나만큼이나 르나르의 달고 시원한 향을 좋아하는 걸까?
아기는 이제 아빠의 옷깃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중이었다.
“르나르가 아기를 좋아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임신했을 때부터 느끼긴 했지만.”
내가 사랑스러운 르나르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더글라스에게 말했다.
그런데 더글라스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터질 뻔한 웃음을 겨우 참은 표정.
불쾌해진 내가 눈을 가늘게 뜨니 당황한 더글라스가 사과하며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단지….”
“단지…?”
“공작님께서 공녀님이 아닌 공자님께서 태어나셔서 얼마나 실망하셨었는지…, 마님께서 전혀 모르시는 것 같아….”
내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날 닮은 딸을 원하던 르나르의 과거가 순간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을 것 같았다.
“르나르가 딸을 원했든 아들을 원했든 지금의 르나르는 르웬을 저렇게나 사랑하잖아요.”
내가 무엇이 문제냐는 듯 더글라스에게 쏘아붙이며 말했다.
더글라스가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한마디를 덧붙였다.
“분명 공작님께서 많이 사랑하시긴 하죠. 아드님인 르웬 도련님을. 그런데 품에서 계속 놓지 않으시는 건… 사랑해서도 있지만, 도련님께 마님을 빼앗길까 봐 저러시는 것도 있습니다.”
“날 빼앗길…, 뭐라고요…?”
“공작님께서 도련님을 데리고 있으시면 마님께서 도련님과 단둘이 계시진 못하실 테니까요. 참고하시라고 말씀드립니다. 알아는… 두셔야 할 것 같아서….”
이번에 나는 정말 할 말을 잃게 됐다.
그때, 눈매가 날카로워진 르나르가 더글라스를 불렀다.
“거기, 곧 해고될 고용인. 내 로즈에게서 안 떨어질래?”
내게 계속 속삭이듯 이야기하던 더글라스가 그 말을 듣고는 번개처럼 내게서 한 발 짝 멀어졌다.
“그건 아니 될 호칭입니다, 공작님. 이젠 저도 돌봐야 할 식솔이 생겼으니까요.”
그러면서 품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 드는 더글라스였다.
“참, 두 분께 파티 초대장이 왔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