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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95화 (95/100)
  • 95화

    아가씨께

    내가 임신했단 소식은 가족들에게 빠르게 퍼졌다.

    아니.

    사실 황성 전체에 퍼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아가씨께서!! 저희 아가씨께서 임신하셨대요!! 저희 아가씨께 아기씨가 생기셨대요!!”

    안나는 얼떨떨함과 기쁨이 뒤섞인 상기된 얼굴로 거의 소리 지르다시피 성안을 뛰어다녔다.

    내가 임신 진단을 받은 지 반나절도 안 되어 생겨난 일이었다.

    황성 전체에 내 임신 소식이 알려지게 된 데는 안나의 공이 지대할 것이었다.

    가족들은 르나르 못지않은 눈물바다를 보여줬다.

    말리지 않으면 거의 밤새 울 기세였다.

    “제 아내는 홑몸이 아닙니다. 쉬어야 합니다.”

    보다 못한 르나르가 결국 나를 안고 도망치지 않았으면, 나는 르나르 못지않게 커다란 다섯 남자를 달래다가 진이 다 빠져버렸을지도 몰랐다.

    내가 하던 반역 후 후처리에 관련된 일들은 모두 르나르가 가져갔다.

    결코 즐겁게 떠맡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이었지만, 르나르는 내내 싱글벙글했다.

    또 그는 틈만 나면 내 배를 만지며 신기해했다.

    “정말 이 작은 곳에 아기가 들어있다고요?”

    내 임신을 처음 알았을 때 어떻게 그 정도로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 있었는지 놀라울 지경이었다.

    “세뮤디르 지역에 지난여름 가뭄이 들어 현재 제국민들 생활 여건이 좋지 못하다고 합니다. 미르엣 대공자님께서 그 지역 영주를 찾아가 내년 수확 시기까지 소작료를 낮추도록 협상한다고 하셨고, 저희도 그 지역에선 당분간 세금을 걷지 않을 생각입니다. 구휼품도 보내기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날 침대 헤드에 기대게 한 르나르가 내 종아리를 주물러주며 설명했다.

    오빠들과의 회의에 다녀온 르나르였다.

    “아, 그리고….”

    르나르가 팔을 뻗어 침대 협탁 위에 올려 둔 서류 더미를 뒤적였다.

    르나르가 낀 외알 안경에 고여 있던 촛불 빛이 그 움직임에 흘러내리며 반짝 빛났다.

    나는 가볍게 마른 침을 삼켰다.

    이를 흘긋 본 르나르가 싱긋 미소 지었다.

    “그 안경 미르엣 꺼 아니에요?”

    “잠시 빌렸습니다. 좋아 보이길래.”

    르나르가 괴도 루팡처럼 웃었다.

    내가 눈을 가늘게 뜨자 르나르가 태연하게 내 허벅지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요즘 나와 있으면 쉬지 않고 내 몸을 마사지해주는 르나르였다.

    아기를 품고 있어야 하는 내가 힘들까 봐 걱정된단 것이었다.

    걱정이 심한 만큼 과보호도 심했다.

    나는 최근 실수로라도 어디 부딪힐 일이 없었다.

    「대공녀님, 이쪽으로 오십시오.」

    「대공녀님, 여길 밟으세요.」

    「대공녀님? 됐어요. 제게 그냥 안기세요.」

    황성까지 데려온 코웰 가문 고용인들 보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이 남자는 나도 내 발로 걸을 줄 안다는 걸 잊은 듯했다.

    「스스로 걷지도 못하는 엄마는 아기도 한심해할 거예요.」

    「제 아이라면 대공녀님을 무척 사랑할 수밖에 없을 텐데요? 절 조금이라도 닮았다면.」

    태생부터 능글맞은 그를 말로 이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뮤디르 물가는 어떤가요?”

    어쩐지 허벅지를 집요하게 주무르는 르나르에게 내가 물었다.

    “현재 밀값이 폭등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도 신경 써야겠어요.”

    르나르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끝까지 잠기지 않은 하얀 셔츠 앞섶이 살짝 벌어졌다.

    그 사이로 보이는 건 르나르의 가슴 근육.

    내 시선이 그 가슴 근육을 지나 단단한 어깨 그리고 외알 안경으로 차근차근 올라갔다.

    ‘…나 일하는 남자 좋아했구나.’

    내가 속으로 생각했다.

    그 순간 나와 르나르의 눈이 마주쳤다.

    그가 다 안단 표정으로 홀리려는 듯 웃었다.

    그러고 보니 소매는 왜 걷고 있는 거지?

    팔 근육이 잘 보이게.

    “앙큼한 대공녀님, 말씀해보세요. 왜 그런 눈으로 보고 계십니까?”

    “…제 눈이 어떤데요?”

    “대공녀님께서 맛있는 케이크를 보실 때의 눈빛인데요?”

    르나르가 들고 있던 서류를 침대 협탁 위에 놨다.

    그러곤 느릿하게 몸을 움직여 내 쪽으로 가까워졌다.

    일렁이는 촛불 빛과 뒤엉킨 달고 시원한 향이 내게로 풍겨왔다.

    “먹고 싶으면 먹어도 되는데.”

    한동안 침대 위에서 날 건드리지 않은 르나르였다.

    내가 미끼가 되었던 그 날부터 날 잘못 만지면 부서지는 유리 인형처럼 대하곤 했으니, 그 이유를 짐작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침대 위에서 자신이 거친 걸 르나르도 알았다.

    그리고 그 거친 것을 그가 스스로 제어하지 못한다는 것도.

    그런데 오늘은 영 참지 못하겠는 건지 그는 내 몸 이곳저곳을 문지르며 날 유혹하기 시작했다.

    안경도 그래서 쓰고 온 걸까?

    날 유혹하려고.

    “입 맞춰주세요.”

    르나르가, 내가 평소 그에게 많이 하는 말을 했다.

    “저 오늘 일 많이 해서 피곤한데.”

    고양이처럼 애교를 부리던 르나르는 이내 그의 입술로 내 입술을 덮어왔다.

    이어지는 깊은 입맞춤.

    그리고 내 허벅지를 거침없이 주무르던 그의 손이 내 치마 아래로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잠깐만요.”

    내가 그를 제지했다.

    르나르가 얼굴에 질문이 가득한 표정이 떠올랐다.

    “하면 안 돼요. 임신하면.”

    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내 현실 세계 지식이었다.

    “…그럴 리가요.”

    르나르가 현실을 부정했다.

    “적어도 3개월은 안 되는 걸로 알아요. 아기가 위험해요.”

    내 말을 들은 르나르의 표정이 심각하게 어두워졌다.

    “……3개월씩이나요?”

    이 표정을 나만 봐야 한다는 게 심하게 아쉬울 정도로.

    “임신을…… 너무 빨리 한 것 같습니다…….”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르나르가 말했다.

    “그래서 내가 임신한 게 싫나요?”

    내가 검은 강아지의 털 같은 르나르의 검은 머리칼을 쓱쓱 쓰다듬으며 물었다.

    르나르가 눈꼬리를 축 내리고 나를 보다가, 그를 쓰다듬는 내 손을 잡고 내려 그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손바닥에 연이어 입을 맞추는 그였다.

    그러다 크게 한숨을 뱉은 르나르는 내 배 근처에 쿠션을 놓은 뒤 그곳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그러곤 내 배를 조심조심 쓰다듬기 시작했다.

    “싫을 리가요. 다만 대공녀님 안에 들어갈 수 없는 게 아쉬워서 그렇죠. 그래도 행복합니다. 이 안에 대공녀님과 제 사랑의 결실이 자라고 있다니.”

    르나르가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그러곤 조금 기대하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딸이겠죠?”

    “어떻게 그렇게 확신을 하고 묻는 거죠?”

    “전 꼭 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대공녀님을 닮은 예쁜 딸.”

    르나르가 다시 내 배를 봤다.

    아직 홀쭉한 배를 바라보는 르나르 눈빛이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없었다.

    나 또한 행복했다.

    행복한 내 남편과 그 남편의 아이를 품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하다 보니 나는 또 불안해졌다.

    ‘갑자기 현실 세계로 돌아가 버리면 어떡하지? 갑자기 이 세계로 오게 된 것처럼.’

    “대공녀님?”

    르나르가 나를 불렀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안색이 안 좋아지셨어요.”

    몸을 일으킨 르나르가 순식간에 걱정 어린 표정이 되어 날 향해 손을 뻗었다.

    르나르가 내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내가 그런 르나르의 손 위에 내 손을 겹쳐 올렸다.

    따뜻하고 큰 손이었다.

    그 손이 나에게 안정감을 줬다.

    나는 털어놓고 싶어졌다.

    나의 불안한 마음을.

    나의 사랑하는 이에게.

    털어놓고 기대고 싶어졌다.

    “…나 무서워요, 르나르. 지금 너무 행복해서…. 그래서 무서워요. 갑자기 이 세계에서 사라지게 될까 봐. 르나르 곁에서 사라지게 될까 봐.”

    “제 곁에서 사라지게 되다뇨?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혹시 모르는 일이잖아요? 이 세계 말고 다른 세계가 있을지…. 르나르나 이리아네크 행성이 없는 다른 세계가 있을지. 그런데 내가 갑자기 그런 세계로 가게 되면….”

    “대공녀님께서도 일신, 일혼, 다세계 이론을 알고 계신 겁니까?”

    그런데 별안간 르나르가 내게 처음 듣는 것을 물었다.

    “일신… 그게 뭐죠…?”

    “여기 와서 듣게 되신 거 아닙니까? 플루토나 제국에 전해지는 세상에 관한 이론입니다. 이론이란 거창한 이름이 붙었지만 사실 신화나 전설쯤으로 보는 게 맞겠네요. 세상을 만든 신은 한 분이시지만 그 신이 만든 세계가 여러 개라, 신께서 만든 하나의 혼이 여러 세계를 옮겨가며 살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세계를…, 옮겨 산다고요…?”

    완벽한 내 이야기였다.

    르나르가 나를 들어 그의 허벅지 위에 앉혔다.

    “그렇다고 여러 세계에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는 게 세계마다 육신은 따로 있어도 혼은 하나라, 한 세계에서 죽지 않는 이상 다른 세계로 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다 한 세계에서 죽고 나면 혼만 옮겨져 다른 세계에서 다른 육신으로 태어난다는 거죠.”

    “다른 육신으로요?”

    “네. 그렇게 죽음과 재탄생을 반복하다 영혼이 휴식이 필요하게 될 때 다시 신의 곁으로 돌아가게 된다, 뭐 그런 이야기입니다. 아무도 증명할 수 없는 이야기죠. 보통은 다른 세계에서의 일은 기억하지 못하는데 다른 세계에서의 기억을 가지고 태어나는 영혼도 있다고 하고, 그래서 그 다른 세계의 일을 기록으로 남기는 영혼도 있다고 하고, 같은 세계에서 시간을 넘나드는 영혼도 있다고는 하던데….”

    르나르가 옛날이야기를 해주듯 조곤조곤 내게 이야기했다.

    표정이 무감한 걸 보니 그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로 여기는 듯했다.

    그럼에도 자세히 이야기해 주는 것을 보면 신비한 이야기로 내 주의를 끌고 날 달래려는 모양이었고.

    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는 조금 흥분해 르나르에게 물었다.

    “그럼, 그 이론이 맞다면…. 한 세계에서의 육신은 그 영혼의 것이 맞고, 그 영혼은…. 그 세계에서 죽기 전에는 다른 세계로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네요?”

    “그 전설이 맞다면 그렇겠죠?”

    내가 지난 세계에서 이 세계에 오게 된 것은 갑자기였다.

    횡단보도를 건너던 중, 날 향해 빠르게 가까워지는 빛을 보다가 갑자기.

    ‘그때 그 빛이 자동차 전조등이었고 현실 세계의 내 몸이 그때 죽은 것이라면?’

    내 영혼이 새로운 세계에서 다시 태어난 것일 수 있었다.

    나보다 앞서 세계와 시간 사이를 여행한 누군가가 글로 적어놓아 미리 알 수 있었던, 그 세계에서 다시.

    ‘그렇다면 이곳은….’

    새 몸으로 태어난 나의 현실인 것이었다.

    언제 돌아가게 될지 몰라 코웰 가문 가족들에게조차 세우고 있던 마음의 벽 하나가 완전히 허물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 내가 이 세계에서 죽기 전에는…. 르나르와 헤어질 일이 없겠네요? 아기랑도…?”

    “왜 자꾸 죽는단 얘기를 하십니까. 대공녀님께서 죽도록 제가 내버려 둘 것 같습니까?”

    르나르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내가 죽는단 얘기를 해서 화가 난 모양이었다.

    “맞아요. 르나르는 날 죽게 내버려 두지 않겠죠.”

    “그거야 당연….”

    “그럼 우린 오래오래 헤어질 일이 없겠네요.”

    내가 기쁨이 만든 눈물을 눈꼬리에 달고 르나르에게 입을 맞췄다.

    내게 입이 막힌 르나르가 당황했다.

    “대공녀님, 갑자기 이렇게 태세 전환하시면 제가 순순히 넘어가 드릴 줄….”

    내가 입술을 떼자 르나르가 내게 한소리 하려 했다.

    그러다 내 눈에서 흐르고 있는 얇은 눈물 줄기들을 보더니 이내 말을 멈췄다.

    혀를 낸 르나르가 아랫입술을 축였다.

    그러곤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울지 마세요, 대공녀님. 대공녀님 눈물 보면, 저 정말 못 참을 수도 있으니까요.”

    내 허리를 붙잡은 르나르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저게 무슨 소리일까.

    내가 울면 뭘 못 참지?

    그 순간, 더 견디지 못하겠는 내가 울기 시작하면 묘하게 더 거칠어지던 르나르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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