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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94화 (94/100)
  • 94화

    목욕 시중

    금방 오겠다던 르나르는 꽤 한참이 지나서야 내게 돌아왔다.

    끼고 온 장갑은 핏물이 잔뜩 들어 이미 본연의 색을 잃어버린 뒤였다.

    장갑에 내 시선이 닿은 걸 느낀 르나르가 끼고 있던 장갑을 아무렇게나 벗어 아무 곳에나 던졌다.

    그러곤 내가 타고 있던 마차 안으로 상체만 들이민 뒤 다정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마차를 출발시키겠습니다. 저는 바로 옆에서 말을 타고 따라가겠습니다.”

    그 순간 덥석, 내가 마차를 잡고 기대있던 르나르의 맨손을 잡았다.

    놀란 르나르의 눈이 조금 커졌다.

    “……왜요, 대공녀님?”

    “그게 무슨 소리예요. 같이 타고 가요.”

    여간해선 응석을 잘 부리지 않는 내가 떼를 쓰듯 르나르에게 말했다.

    난 다시 만나게 된 르나르와 단 한 순간도 떨어지고 싶지가 않았다.

    게다가.

    르나르가 왜 마차에 타지 않으려 하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에.

    “제 옷이 피에 젖어서 그런 거예요? 그래서 같이 마차에 타지 않으려는 거예요?”

    조금 엉망이 된 치맛단을 내가 르나르에게 들어 보이며 물었다.

    르나르가 인상을 쓰며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요. 대공녀님보다도 제가 훨씬….”

    그러다 내 의도를 눈치챈 듯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내가 하려던 말을 이었다.

    “제가 피에 젖으면 르나르는 좋았던 제가 싫어지나요?”

    “…아니요.”

    “제게서 피 냄새가 나면 제가 불결하게 느껴져요?”

    “그럴 리가요.”

    “아니면 증명해요. 빨리 타요.”

    내가 르나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르나르는 한동안 가만히 내밀어 진 내 손을 보기만 했다.

    “대공녀님께선 제게 항상… 구원이시네요.”

    르나르가 건조하면서도 조금 먹먹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르나르 위로 구름 사이 얼굴을 내민 겨울 해의 빛줄기가 눈꽃처럼 내려앉았다.

    르나르가 내 손을 잡았기에 나는 그 빛줄기보다 밝은 미소로 르나르에게 웃어줬다.

    * * *

    그럼에도 습관이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숙소로 돌아온 르나르는 날 데리고 곧장 욕실로 향해 긴 목욕을 시작했다.

    맑은 물과 향긋한 비누를 얼마나 많이 사용하는지.

    비누 냄새에 취해 몽롱해질 지경이었다.

    얼마나 물속에 오래 있었는지 손끝이 쪼글쪼글해지고 있었다.

    물론 르나르 혼자 하는 목욕이 아니라 목욕 시간이 더 길어진 것 같기도 했지만.

    “제…제가 할게요…….”

    조금 부끄러워진 내가 르나르를 밀어냈다.

    하지만 입술을 부딪쳐 오는 르나르가 내 입을 막았다.

    르나르는 그를 밀던 내 손목을 잡아내려 부드럽게 날 제지했다.

    “가만히 계세요.”

    “…….”

    “제가 깨끗하게 씻겨드릴 거니까요.”

    르나르는 성물을 보는 경건한 눈빛으로 내 벗은 몸을 보고 있었다.

    그 눈빛을 견디기가 힘들어진 내가 몸을 꼬았다.

    르나르의 적갈색 눈동자에 장난기가 조금 스며들었다.

    “안나를 데려오지 않았으니 당연히 제가 해드려야죠. 제가 아니면 누굴 시키시려고 그러십니까?”

    “안나도…, 제 목욕 시중을 들진 않아요….”

    “그게 정말이십니까?”

    르나르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놀랄만한 일이긴 했다.

    이 세계에서 나 말고 목욕 시중을 받지 않는 귀족 아가씨는 없을 터였으니.

    “그냥 좀…. 부끄러워서….”

    깊이 설명할 수 없었던 내가 얼버무렸다.

    르나르의 적갈색 눈동자가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그게 정말이라면 꽤 괜찮은데요? 제가 처음이고. 게다가 유일하다니….”

    르나르가 내게 가까이 몸을 가져다 댔다.

    “게다가 목욕 시중만 제가 처음이 아니잖아요?”

    버둥거리며 그의 아래를 벗어나려는 나를 르나르가 한 팔로 간단히 제압했다.

    작은 소동에 욕조 끝까지 찰랑거리며 차 있던 물이 넘쳤다.

    기분 좋게 웃은 르나르가 허리를 감싸 안은 나를 그의 위에 앉혔다.

    그러곤 장미향이 나는 액체를 내 머리 위에 가득 부었다.

    “잠시만 허리 세우고 계세요. 머리 감겨드릴 거니까.”

    수증기 냄새와 섞인 장미향이 욕실의 온기와 뒤섞이기 시작했다.

    나는 자꾸만 눈이 감겼다.

    르나르가 작게 웃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조금 미끈거리는 단단한 가슴 근육이 따듯해 나는 거기 볼을 비볐다.

    * * *

    한참 후 르나르가 다 씻긴 엘로즈를 데리고 나왔을 때 엘로즈는 완전히 잠에 빠져있었다.

    르나르는 늘어진 그녀를 침대에 눕힌 뒤 마른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고, 새 잠옷을 입히고, 새 이불을 덮어줬다.

    그 후에야 그녀의 옆에 가 조심스럽게 누울 수 있었다.

    르나르는 한동안 손을 대지 못하고 엘로즈를 보고만 있었다.

    르나르가 밝혀둔 작은 램프등 불빛이 엘로즈 위에서 일렁였다.

    애틋했다.

    이 작고 가녀린 몸으로 겁도 없이 스스로를 미끼로 삼은 엘로즈가.

    그래도 그녀 덕에 인생을 되찾은 이들이 있었으니 엘로즈는 분명 뿌듯할 것이었다.

    이런 일이 또 생긴다면 또 나설 정도로.

    동정심이 많은 건 진즉부터 알고 있었지만 의외로 정의감까지 투철한 여자였다.

    ‘그래도 두 번은 못 보내겠다. 심장이 남아나질 않겠어.’

    르나르가 아픈 표정으로 제 심장 위에 손을 올렸다.

    달빛이 찬연했다.

    그 달빛에 물든 듯 보이는 엘로즈는 거룩하게 느껴졌고, 또 아름다웠다.

    르나르가 세게 안으면 부서질까 욕심내면 잃을까 조심조심 엘로즈를 안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

    로맨스로 시작해 첩보물로 끝난 신혼여행이었다.

    그리고 신혼여행 이후의 날들은 리얼리티의 연속이었다.

    쪽잠도 겨우 잘 정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해야 했으니.

    “르나르. 르나르. 나 입 맞춰 줘요, 르나르.”

    울상이 돼 입술을 쭉 내미는 내게 싱긋 웃은 르나르가 촉 입을 맞췄다.

    ‘내 카페인…!’

    덕분에 활기가 생긴 마력에 상쾌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내가 작게 발을 굴렀다.

    플루토나 제국은 곳곳이 병들어 있었다.

    노예 거래 문제, 납치 문제, 버려진 고성 문제 등을 차치하고서라도 속국으로 전락한 뒤, 제국민의 일상이 망가진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나는 가족들과 합심해 이참에 제국이 가진 모든 문제를 뿌리 뽑기로 했다.

    ‘프릭 후작 가문이 불법으로 가져간 루즈벨트 공작 가문 재산도 르나르에게 돌려줘야지…!’

    그 생각만 하면 신이 났다.

    나는 열의를 불태웠다.

    그런데 그 열의가 실체화되어 나타난 것일까?

    시뻘건 것이 툭, 새하얀 종이 위로 떨어졌다.

    내 앞에서 서류를 넘기던 르나르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피…! 잠시만… 잠시만요, 대공녀님……. 잠시만 견뎌보세요…. 주… 주치의를 불러오겠습니다…!”

    제 칼끝에서 분수 같은 피가 솟구쳐 올라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남자가 당황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르나르, 난 괜찮아요. 일단 르나르부터 진정을….”

    “아아. 대공녀님. 피가… 피가….”

    하지만 아연실색한 르나르는 이내 날 안고 뛰기 시작했다.

    “르나르……! 내려줘요, 어지러워요……!”

    그의 빠른 속도를 감당하지 못한 내가 죽어라 소리 질렀을 때야 겨우 정신을 차린 르나르였다.

    “큰 문제가 있으신 건 아니시고, 과로이십니다.”

    날 진찰한 주치의가 말했다.

    “거봐요, 괜찮다잖아요.”

    “저와 같은 얘길 들으신 게 맞습니까? 과로라고 하지 않습니까.”

    “과로이니 큰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과로가 큰 문제가 아니라고요?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르나르가 주치의를 노려보며 안광을 빛냈다.

    주치의가 흠칫했다.

    그러곤 마른기침을 큼큼 뱉더니 말을 바꿨다.

    “작은 문제는…. 아니긴 하죠. 게다가 지금처럼 계속 일하신다면 그땐 정말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코웰 가문 주치의의 줏대 없는 모습에 이번엔 내 눈이 가늘어졌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내가 주치의에게 물었다.

    ‘아니라고 말해.’

    의 표정을 걸고.

    그런데 의외로 주치의는 말을 다시 바꾸지 않았다.

    “아가씨께서 그렇게 보셔도 저는 주의를 드려야겠습니다. 지금처럼 일하시면 안 됩니다. 홑몸이 아니시거든요.”

    내가 눈을 깜빡였다.

    ‘…내가 방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설마….

    “임신이라는 건가?”

    나보다 르나르가 빨랐다.

    주치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몽글.

    가슴 속에서 이상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르나르를 봤다.

    그의 표정은 무표정했다.

    지금 이 순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가 곧 나를 내려다봤고,

    나와 그의 시선이 공중에서 얽혔다.

    “임신이라네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르나르가 무뚝뚝한 말투로 내게 물었다.

    의외였다.

    르나르는 나를 좋아하니 나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생기면 무척 좋아해 줄줄 알았는데.

    ‘아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타입이었나…?’

    “글쎄요, 나는….”

    “…….”

    나는 어떻게 생각하지?

    내 배 속에 아기가 있다고 한다.

    나와 르나르를 반씩 닮았을 아기가.

    내가 사랑하는 르나르와의 아기가.

    “나는…. 좋아요. 르나르와 내 아이니까.”

    르나르의 선호와 상관없이 아기를 생각하니 배시시 웃음이 났다.

    그때, 르나르의 코끝이 빨개졌다.

    깜빡이는 그의 눈에서 눈물이 퐁퐁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르, 르나르. 설마 지금 우는 거예요……?!”

    르나르가 내게서 뒤돌았다.

    하지만 내가 그를 돌려 다시 날 보게 했다.

    르나르의 맑은 적갈색 눈동자에선 그보다 맑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좋아서 우는 거 맞죠? 그런데 아까는 왜 그렇게 무덤덤했어요.”

    “대공녀님께서…, 싫으실 수도 있으니까요…. 아기를 낳으려면 아파야 하는데…. 제가 좋아해버리면 부담 가지실 수 있으니까….”

    설명하는 르나르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나는 그런 르나르가 귀여워 또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이리 와요, 르나르. 나 안아줄래요?”

    내가 두 팔을 뻗자 르나르가 보석 같은 눈물방울들을 야무지게 쓱쓱 닦고는 나를 꼭 안았다.

    르나르에게서 풍기는 달고 시원한 향이 유난히 포근하게 느껴졌다.

    환하고 투명한 햇살이 황성 전체를 뒤덮은 공기조차 깨끗한 깊어진 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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