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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93화 (93/100)
  • 93화

    나 언니 믿을게

    내가 종이에 불을 붙이자 종이는 금세 황갈색 작은 새가 됐다.

    나는 그 새를 얼른 내 치마 아래 숨겼다.

    짐칸 입구를 지키던 노예 사냥꾼이 나와 메일린 쪽을 봤다.

    하지만 치마 아래 숨은 그 작은 새를 발견하진 못했다.

    잠시 후 노예 사냥꾼들이 아이와 여자들을 짐칸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한동안 치맛자락을 털어내기 위해 부산스레 움직이던 작은 새가 이내 치마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노예 사냥꾼들이 정신없는 틈을 타 나는 새를 덮고 있던 치마를 완전히 거둬줬다.

    눈치 빠른 작은 새는 이미 열린 천막 입구로 조용하고 빠르게 날아갔다.

    그다음엔 새파란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노예 사냥꾼들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때, 누군가 내 머리채를 휘어잡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걸 잡아 왔다고? 자네들 오늘 보너스를 기대해 봐도 되겠는데?”

    처음 보는 험상궂은 얼굴의 남자가 나와 메일린을 데려온 남자 무리를 향해 말했다.

    “후작이 마음에 들어 할 게 분명하네.”

    “후작이 보기 전에 먼저 손대면 안 되겠지?”

    “아서라, 아서. 꼴에 남의 손을 얼마나 탔는지 따져대는 양반이잖아.”

    노예 사냥꾼들이 더러운 얘길 하며 킬킬 웃었다.

    나는 그 대화를 나눈 남자들의 얼굴을 머릿속에 똑똑히 새겨 넣었다.

    곧 르나르가 올 테니.

    이후 노예 사냥꾼들에 이끌려 조금 걷다 보니 마주하게 된 곳은 깊은 숲속 위치한 버려진 고성(古城)이었다.

    황실이 무너진 뒤 플루토나 제국에 버려진 성이 많아졌단 얘길 언뜻 들은 적이 있었다.

    ‘여기서 나가면 이런 성들부터 정리해야겠어. 어떻게 이용되고 있을지 모르니.’

    내가 다짐했다.

    노예 사냥꾼들은 나와 잡아 온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성의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 감옥이었다.

    꽤 어두웠다.

    군데군데 놓인 횃불만이 음침하게 일렁일 따름이었다.

    우리가 앞을 지날 때마다 감옥을 지키던 간수들이 휘파람을 불어댔다.

    “여, 공주님. 이쪽 좀 봐봐.”

    “나랑 놀다 가지 않을래?”

    나는 그들의 얼굴 또한 똑똑히 기억했다.

    죗값을 치르게 하기 위해.

    노예 사냥꾼들은 이미 여러 명이 갇혀있던 커다란 감옥 안으로 나와 사람들을 밀어 넣었다.

    그때, 한 노예 사냥꾼이 창살 너머로 들어가던 중인 내 팔을 잡았다.

    “이런 얼굴은 살면서 한 번 보기도 어려운데. 이대로 감옥에 넣긴 뭔가 아쉬운데 말이지….”

    노예 사냥꾼이 나를 보며 입맛을 쩝쩝 다셨다.

    “눈독 들이지 마. 프릭 후작이 곧 오기로 했어. 네 눈에 예쁜 여자가 네 눈에만 예쁘겠어?”

    그보다 덩치가 큰 간수가 면박 주자 노예 사냥꾼은 아쉽단 듯 나를 놨다.

    “이래서 권력이 최고지. 취향 남사스럽고 얼굴 끔찍해도 갖고 싶은 건 다 가지는데. 젠장. 다시 태어나면 후작으로 태어나야지.”

    남자의 푸념을 끝으로 철컹, 지하 감옥 문이 잠겼다.

    그때, 감옥 구석에서 꾀죄죄한 꼴인 금발의 여자아이 하나가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폴……?”

    아이가 나를 보며 폴의 이름을 불렀다.

    “니나?”

    내가 아이의 이름을 부르자 자리에서 일어선 아이가 우다다 달려와 내 다리를 끌어안았다.

    “폴……!”

    다행히 아이는 손이 묶이지 않은 상태였다.

    고개를 든 아이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담겨있었다.

    “폴……! 폴이랑 있던 언니 맞죠……?! 우으… 우으… 나 혼자 너무 무서웠어요…….”

    “괜찮아. 괜찮아, 니나. 이제 내가 왔으니까.”

    내가 무릎 꿇고 앉아 아이를 안아줬다.

    손이 여전히 묶여있어 제대로 안긴 어려웠지만 니나가 워낙 작았기에 대충은 안을 수 있었다.

    내내 겁먹고 있었던 듯 보이는 아이는 그런 내게 안겨 펑펑 눈물을 쏟아냈다.

    작은 아이가 우는 것을 보는 내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파졌다.

    “울지 마. 울지 마, 니나. 언니가 니나를 구해줄게. 언니가 니나를 엄마에게 데려다줄게.”

    내가 니나에게 속삭였다.

    니나가 울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정말……? 정말이에요, 언니……? 하지만 저 아저씨들은…… 무지무지 무섭고 힘이 센데…….”

    “괜찮아. 사실 언니가 저 아저씨들보다 힘이 더 세거든.”

    니나가 초록색 눈동자를 깜빡이며 나를 봤다.

    그러다 얇은 내 팔목을 흘긋 본 니나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다급한 마음으로 작은 불을 만들어 몰래 니나에게 보여줬다.

    놀란 니나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우와! 언니, 마녀야?! 나 마녀 처음 봐! 동화책에서만 봤어…!”

    “쉿, 일단은 비밀이야. 이제 언니 믿을 수 있지? 언니가 니나 구해줄게. 이제 울지 말고. 뚝. 아무 걱정하지 말고.”

    “응. 응, 응. 나 언니 믿을게.”

    니나가 짧은 팔을 뻗어 내 목을 끌어안았다.

    그때, 감옥 밖이 소란해졌다.

    “오셨습니까?!”

    “오셨습니까!!”

    프릭 후작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오늘 사냥감이 괜찮다는 소문이 있던데?”

    프릭 후작의 목소리를 처음 듣게 된 나는 얼굴도 모르는 상태에서 목소리만으로 사람을 싫어하게 될 수 있단 걸 처음 알게 됐다.

    듣기만 해도 속이 안 좋아지는 목소리였다.

    그런데 얼굴을 보고 나니 그 울렁이는 감각은 더 심해졌다.

    “저 여자인가?”

    음흉하게 생긴 배불뚝이 후작이 창살 밖에서 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나를 안고 있던 니나가 내 품에서 벗어나더니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내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내게 속삭였다.

    “저, 저 아저씨는 예쁜 얼굴 좋아해…. 나쁜 아저씨야…. 언니를 잡아갈 거야….”

    작은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니나의 초록색 눈동자에 또다시 눈물이 차올라있었다.

    철컥- 철컥-

    감옥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안으로 들어선 후작이 내 앞에 섰다.

    “비켜, 더러운 애.”

    후작이 내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니나에게 말했다.

    니나의 작은 볼 위로 눈물이 후드득후드득 떨어졌다.

    니나가 못 들은 척 버티자 후작이 니나의 뒷덜미를 잡아 던져버리려 했다.

    내가 얼른 니나를 내 뒤로 숨겼다.

    나를 마주한 후작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슬로우 비디오처럼 내게 느리게 보였다.

    “이야, 이놈들이 간만에 제대로 일을 했는데? 괜히 뒤만 봐주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변태같이 웃은 후작이 내게 한 걸음씩 다가왔다.

    그러곤 손을 뻗어 내 묶인 손목을 잡으려 했다.

    그 순간 후작의 손보다는 작지만 악력이 강해 보이는 다부진 손이 후작의 팔목을 잡았다.

    숨겨온 단검으로 미리 손목 밧줄을 푼 메일린이었다.

    메일린은 후작의 팔목을 꺾어 제압한 뒤 그의 목에 단검을 들이밀었다.

    르나르가 도착하기 전 싸움이 일어날 것을 예감한 나 역시 숨겨온 단검으로 손목 밧줄을 풀었다.

    그때 후작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장식용 단검을 뽑는 것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메일린이 위험했다.

    내가 얼른 불을 만들자 뱀 모양 작은 불이 퉁퉁한 후작의 팔을 휘감았다.

    “으악……!”

    놀란 후작이 단검을 놓쳤고 놀란 메일린이 후작을 놓자, 후작은 노예 사냥꾼들이 있는 쪽으로 꽁지가 빠지게 도망을 쳤다.

    “뭐야, 마녀잖아! 너희들 그것도 확인하지 않은 거야?!”

    후작이 노예 사냥꾼들을 향해 소리쳤다.

    노예 사냥꾼들은 그저 어안이 벙벙해 보였다.

    “수도를 점령한 코웰 가문 대공녀가 불 마법을 쓴다고 하던데….”

    “에이, 설마 그 여자일 리는….”

    노예 사냥꾼들이 저들끼리 중얼거렸다.

    상황을 파악한 감옥 안 여자들이 나와 메일린 뒤쪽으로 숨었다.

    ‘다 태워버리고 나가야겠어.’

    후작과 노예 사냥꾼들을 보며 내가 생각했다.

    그동안 내 스스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최대한 피하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게 의지하는 여자와 아이들을 살려야 했으니까.

    다치게 할 수 없었으니까.

    멀리서부터 소란이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당신 누구…! 으악……!”

    뒤이어 검날끼리 맞부딪히는 소리.

    챙- 챙-

    커다란 갑옷들이 쓰러지는 소리.

    쿵-

    소란의 중심이 가까이 다가온 건지 시뻘건 피가 분수처럼 튀는 게 창살 밖으로 보였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건 르나르였다.

    “대공녀님, 괜찮으십니까?!”

    감옥 안을 이리저리 훑을 때부터 르나르의 눈에 눈물이 차 있는 것을 보게 된 나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심장이 저미는 감정을 느꼈다.

    “이얏……!”

    그때 간수 하나가 검을 치켜들고 르나르에게 달려들었다.

    르나르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간수를 베어버렸다.

    내가 니나의 눈을 가렸다.

    다음 순간 르나르는 피가 뚝뚝 흐르는 장검을 아무렇게나 던져버린 뒤 나를 향해 달려왔다.

    “대공녀님…!”

    “르나르…!”

    니나를 놓아주고 일어선 날 르나르가 격하게 안았다.

    날 안은 르나르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괜찮으신 거죠? 다치신 데는 없는 거죠? 오는 내내 계속 나쁜 생각이 들어서…….”

    정돈되지 못한 르나르의 숨이 거칠었다.

    그가 날 얼마나 걱정했는지, 이곳까진 얼마나 빠르게 달려왔는지, 나는 모르려고 해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때 돌기둥 뒤에 몸을 숨겼던 후작이 말을 더듬는 소리가 들렸다.

    “너, 너…! 너…너는…!”

    놀라 입을 열었던 후작이 후회하며 입을 막았다.

    하지만 이미 르나르가 그를 본 뒤였다.

    “……아는 얼굴이네?”

    르나르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 사람을 알아요, 르나르? 저 사람이 프릭 후작이래요.”

    내 설명에 르나르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그게 정말이십까? 캐스티나 황녀를 사러 갔던 노예 시장에서 저놈을 봤었습니다. 저놈이 황녀를 사려 했거든요. 원래 이쪽으로 의욕이 충만한 놈이었군요.”

    “저런.”

    “네놈이 프릭 후작이었어?”

    르나르가 후작을 향해 다가가며 물었다.

    후작이 뒤돌아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다리가 풀린 건지 제대로 서지조차 못하고 부들거렸다.

    “그때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르나르가 무감하게 말하곤 던졌던 장검을 집어 들었다.

    그 순간 내가 르나르를 불렀다.

    “르나르.”

    봐주지 말란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후작과 노예 사냥꾼들이 어떤 짓을 해왔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난 나였기에.

    그런데 나보다 먼저 니나가 르나르를 향해 소리쳤다.

    “오빠, 저 못생긴 아저씨가 언니를 욕심냈어요! 저 못생긴 얼굴로 예쁜 언니를…! 거울도 안 보나 봐!!!”

    르나르가 피식 웃었다.

    그런데 눈빛이 바뀌어있었다.

    “맛이… 가셨네요….”

    내 옆에서 르나르를 본 메일린이 중얼거렸다.

    “…그랬단 말이지?”

    힐긋 웃은 르나르가 후작을 향해 다가섰다.

    그러다 잠깐 멈춰서 제임스를 보며 말했다.

    “감옥 안 사람들을 먼저 내보내. 보기 안 좋을 테니까.”

    그러곤 여상히 뒤돌아 다정하게 미소 짓고는 내게도 말했다.

    “대공녀님도 먼저 나가 계세요. 금방 따라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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