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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92화 (92/100)
  • 92화

    미끼

    그리고 그 불길한 예감은 안타깝게도 현실이 됐다.

    르나르가 붙잡은 노예 사냥꾼에게서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한 정확히 이틀 후.

    노예 사냥꾼들이 또다시 멜로소에 나타났다.

    낮에 한 번, 밤에 한 번.

    그들은 하루에 두 번씩이나 납치를 자행했다.

    ‘대담하다고 해야 할지,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고 해야 할지, 악마도 그런 악마들이 없다고 해야 할지….’

    암담한 심정으로 창밖을 보던 내가 생각했다.

    이미 해가 진 지 오래인 한밤중.

    르나르와 마을 남자들, 피터, 그리고 나는 여관의 빈 식당에 모여 앉아있었다.

    일렁이는 램프등 불빛만이 정적이 깔린 식당 내부를 가득 채웠다.

    이내 대장장이 제임스가 이를 으드득 갈며 르나르에게 고했다.

    “그놈들이 넓은 공터를 지나는 바람에 더 따라붙을 수가 없었습니다. 숨을 곳이 없어서….”

    ‘낮에도 공터를 지나는 바람에 더 쫓지 못했다고 했는데?’

    오늘 낮 노예 사냥꾼들을 쫓은 마을 사람들이 르나르에게 전한 얘기를 내가 떠올렸다.

    잡아 고문하는 방법으론 그들의 근거지를 찾을 수 없었기에, 르나르와 마을 남자들은 노예 사냥꾼을 보면 잡지 않고 몰래 쫓는 것으로 작전을 바꿨다.

    그런데 우리가 근거지 찾는 걸 눈치챈 것일까?

    벌써 공터를 이용하는 것도 두 번째였다.

    근거지로 가는 경로에 공터가 있다기보단 근거지로 조심해서 가기 위해 공터를 거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가 근거지를 찾는 걸 눈치챈 걸까?”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건지 르나르가 제임스에게 물었다.

    제임스가 잠시 고민해보다 대답했다.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눈치챘다기엔 지나치게 태평해 보였거든요. 자기들 무리 중 한 명이 죽은 것도 아마 모르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원래도 납치 후엔 항상 공터를 지났었단 뜻일 텐데….”

    르나르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식당이 일순 다시 조용해졌다.

    그 순간 식당 안 사람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평소에도 근거지를 철저히 숨기는 놈들이었구나.’

    마을 남자들 낯빛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희망을 잃은 것만 같은 표정들이었다.

    “근거지를 찾을 방법이… 정말 없는 걸까요…?”

    빵집 주인 캐스퍼만이 마지막 잎새를 바라보는 얼굴로 르나르에게 물었다.

    당장 뾰족한 수가 없는 르나르가 깊은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그때, 르나르에게 다가선 내가 식탁 위 르나르의 손을 꼭 잡았다.

    * * *

    나와 르나르만 단둘이 남은 식당.

    “안 됩니다.”

    매섭게 눈을 뜬 르나르가 서늘한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단호함으로 따지면 나 또한 만만치 않았다.

    “제가 제안한 방법이 아니면 르나르에게 다른 방법이 있나요?”

    “그 방법 말고 다른 방법이 이 세상에 없다 해도 전 그 방법만큼은 절대 쓰지 않을 겁니다. 대공녀님을 미끼로 쓰라뇨. 어떻게 제게 그런 제안을 하실 수가 있죠?”

    날 보는 르나르의 눈빛에 원망이 담겼다.

    나는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티를 내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을 미끼로 쓸 수는 없잖아요.”

    “왜 없습니까? 돈이면 다 되는 세상입니다.”

    “르나르….”

    “미끼를 쓰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면, 돈을 쓰든 뭘 쓰든 대공녀님을 대신할 사람을 제가 구해오겠습니다.”

    “단순히 그 문제뿐이면 저도 이렇게 고집 부리진 않아요. 하지만 생각해봐요, 르나르. 과연 나보다 그 일을 더 잘할 사람이 있을까요?”

    “절 설득하려고 하지 마세요.”

    “전 그들 근거지에 도착하는 동시에 르나르에게 마법 전서조를 날릴 거예요. 르나르가 나에게 답장을 쓰면 마법 전서조가 다시 내게 돌아올 테니, 르나르는 전서조를 따라 날 구하러 와요. 근데 그 일을 나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마법 전서조 종이에 불을 붙여야 하는 그 일을? 손발이 묶일 가능성도 있는데?”

    “대공녀님께선 참… 잔인하십니다.”

    르나르가 인상을 썼다.

    르나르의 적갈색 눈동자에 슬픔이 깃들었다.

    “전서조가 제게 오다 사냥이라도 당하면요? 아니면 전서조가 미쳐서 대공녀님이 있는 곳을 못 찾아가면요?”

    르나르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이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럴 가능성은 보통은 희박하다는 거 르나르도 알잖아요. 가끔 그런 경우도 있긴 하지만, 우리가 꼭 그 상황에 해당하게 되진 않을 거예요.”

    “그놈들이 산적 놈들처럼 마력을 제한하는 장치를 가졌으면요? 그래서 대공녀님께서 마법을 쓸 수 없게 되면요?”

    “그때는 캐스티나라는 변수가 있었어요. 캐스티나가 내가 마녀라는 걸 미리 알렸기 때문에 그들이 그런 걸 준비해둔 거예요. 하지만 노예 사냥꾼들은 그들과 달리 방심하고 있어요. 프릭 후작가에서 뒤를 봐주고 있으니까. 지난 납치 상황들에서도 특별한 도구를 사용하지 않은 거, 르나르도 잘 알고 있잖아요.”

    “그렇다고 해도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르나르, 이곳은 이제 나의 제국이기도 해요.”

    “…….”

    “코웰 가문이 반역을 일으킨 이상 코웰 가문이 책임도 져야죠. 이곳 제국민들을 지키는 책임을요. 그리고 무엇보다, 루즈벨트 공작령의 영지민들이에요. 나는 르나르의 영지였어야 할 이곳에서 아이들과 여자들이 억울하게 붙잡혀가는 걸 더는 보고만 있을 수 없어요. 그리고 니나도 구해야죠.”

    “하지만 대공녀님…. 대공녀님이 다치시면…….”

    르나르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려왔다.

    “저는 정말 못 삽니다.”

    “제가 왜 다쳐요? 저한테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르나르가 구해줄 거 아닌가요?”

    “하……. 그렇게 일부러 밝은 목소리 내지 말아주실래요? 손바닥엔 손톱자국 내고 계시면서.”

    놀란 내가 주먹 쥐고 있던 손을 폈다.

    긴장하면 나도 모르게 나오는 버릇이었다.

    르나르가 나를 당겨 그의 품에 안았다.

    “제가 꼭…, 구해드릴 겁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내가 르나르를 든든하게 느끼며 그의 단단한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쿵쿵 뛰는 그의 심장 소리가 좋았다.

    그 후 르나르는 마을 사람들에 수소문해 무술 실력이 뛰어난 여자 용병을 구했다.

    아무리 내가 마녀라도 나 혼자 보내는 건 마음이 놓이지 않는단 것이었다.

    나와 용병 메일린은 니나 어머니의 낡은 드레스로 옷을 갈아입은 뒤 드레스 못지않게 낡은 앞치마를 맸다.

    빈민가에 무난히 섞여들기 위해서였다.

    “얼굴이… 너무 튑니다. 대공녀님께선 평소 단아한 게 매력이신데 지금 대공녀님 얼굴은 오히려 지나치게 화려해 보여요. 이거 아무래도 실패할 것 같습니다. 지금이라도 그만둡시다.”

    어느새 곁에 다가온 르나르가 날 이리저리 뜯어보며 불만스럽게 말했다.

    르나르의 마음은 하루에도 몇 번씩 손바닥 뒤집히듯 뒤집히는 중이었다.

    본인이 꼭 구해주겠다고 했다가.

    날 절대 못 보내겠다고 했다가.

    내가 르나르의 옷깃을 잡아당겨 그를 숙이게 한 뒤 그의 입에 촉 입을 맞췄다.

    르나르가 또 슬픈 눈을 했다.

    “근거지에 닿자마자 전서조를 보낼게요. 한눈팔지 말고 딱 기다리고 있어요.”

    “대공녀님만…. 대공녀님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나만 기다리고 있어요.”

    “당신만 기다리겠습니다.”

    르나르는 한동안 꼭 잡은 내 손을 놓지 못했다.

    * * *

    나와 메일린은 빈민가 근처 시장을 반나절 정도 돌다 빈민가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심상치 않은 낌새는 우리가 빈민가에 들어서기 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가씨, 뒤에. 수상한 남자가 따라붙었습니다.”

    내 뒤에 바짝 붙은 메일린이 조용히 속삭였다.

    나 역시 눈치채고 있던 바였다.

    숨길 생각도 없는지 인상이 험악한 남자는 티 나게 나와 메일린 뒤를 밟고 있었다.

    조금 그렇게 걷다 보니 다른 방향에서 비슷한 인상을 가진 남자가 또 나타났다.

    나와 메일린은 무의식중에 두 남자와 멀어질 수 있는 방향을 택해 걷게 됐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이게 노예 사냥꾼들이 사냥감을 모는 방식이구나.

    그렇게 쫓기듯 몰리다 보니 다다른 곳은 막다른 골목이었다.

    허, 하는 작은 숨을 내뱉는 순간 허리 쪽으로 차가운 금속성 물체가 닿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시선을 살짝 내리고 보니 날카롭게 벼려진 단검의 칼날이 보였다.

    “어금니 꽉 다물어. 뱃가죽 찢기고 싶지 않으면.”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메일린 쪽을 봤다.

    그녀 뒤에도 칼을 든 남자가 서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메일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이자 메일린이 걷기 시작했다.

    그녀 뒤의 남자가 그녀를 밀고 가는 방향으로.

    이윽고 도착한 숲속엔 커다란 짐마차가 있었다.

    짐마차의 짐칸은 커다란 천막이 감싸고 있어 안이 보이지 않았다.

    노예 사냥꾼들은 우리를 태우기 전 입에 각각 재갈을 물렸다.

    손목 또한 두껍고 거친 밧줄로 묶었다.

    어찌나 강하게 묶었는지 피가 잘 통하지 않을 정도였다.

    이내 마차 짐칸 천막 안으로 밀어 넣어지자 나는 메일린과 나처럼 손이 묶인 다른 여자들을 볼 수 있었다.

    중간중간 니나처럼 아주 어린 아이들도 보였다.

    나는 눈에서 불꽃이 타오르는 것 같은 진노의 감정을 느꼈다.

    짐마차는 한참을 달렸다.

    사방이 막혀 있어 밖을 볼 순 없었지만, 마차가 덜컹거리며 달리기도 하고 부드럽게 달리기도 하는 것을 보니 이들이 길을 다양하게 바꿔가며 근거지로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참을 가다 보니 마부석에 앉은 남자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한번 사냥 다녀올 때마다 이게 무슨 고생이야. 매번 이렇게 복잡하게 돌아가야 해? 이것보다 빨리 갈 수 있는 길이 몇 개인데.”

    “그래도 곧 도착이니까 참아.”

    “내 말은 효율적이지가 않다는 거지, 효율적이지가. 어차피 프릭 후작이 우리 뒤를 봐주고 있으니 문제 될 것도 없을 텐데.”

    “보스 철칙이 그런 걸 우리가 별수 있나. 그래도 난 이해해. 붙잡은 사냥감들을 모두 한곳에 보관하니 조심하자는 거겠지.”

    그리고 그 뒤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마차가 멈췄다.

    메일린이 재빨리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메일린은 뒤적인 내 앞치마 주머니에서 수신인이 르나르인 마법 전서조 종이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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