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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91화 (91/100)
  • 91화

    내가 거짓말 해서, 내가 나빠서

    그날 밤 르나르는 지난밤보다도 한층 더 끈질기고 집요했다.

    “아아, 싫어…. 싫어……. 인제 그만…….”

    “진짜 그만?”

    “아파. 아파요, 르나르. 나 아파….”

    “안 아플 텐데.”

    “내가 아프다는데…!”

    “쉬잇, 예쁘지.”

    내 머리가 쿵쿵, 침대 헤드에 부딪혔다.

    하지만 르나르는 그런 내 머리를 손으로 감싸 보호한 채 허리를 쳐올리던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깊어질 때마다 내 눈앞에서 하얀빛이 번쩍였다.

    놓아달라 엉엉 우는 나를 르나르는 밤새 꽉 붙들고 어르고 달랬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나는 르나르에게 완전히 토라진 상태가 됐다.

    “잘못했어요, 대공녀님.”

    “…….”

    “제가 진짜 잘못했는데.”

    “…….”

    “저 정말 안 봐주실 거예요?”

    르나르가 그에게서 등 돌린 내 맨 어깨 위에 입술을 지분거렸다.

    그리고 그 입술은 어깨에서 흉추로, 흉추에서 요추로,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곤….

    “르나르……!!”

    닿으면 안 되는 곳에 입술이 닿은 르나르에, 내가 질겁하며 몸을 일으켰다.

    이불을 확 걷어버리자 르나르가 고개를 들었다.

    “드디어 봤다.”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는 게 얼마나 얄밉던지.

    하지만 르나르는 태연하게 몸을 일으키더니 내 위로 몸을 눌러왔다.

    그러곤 내 볼에 입을 맞췄다.

    “이제 화 다 풀리신 거죠?”

    기죽은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그가 물었다.

    화를 내야 하는데.

    화가 나지가 않았다.

    이래서 남편은 잘생겨야 한다는 걸까.

    내 속을 읽은 것도 아닐 텐데 르나르가 나를 보며 눈을 휘어 웃었다.

    그러곤 내 품을 파고든 뒤 내 반려견 러블린처럼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르나르의 부드러운 머리칼이 내 빗장뼈를 간질였다.

    그리고 르나르가 왜 그렇게 애교를 부렸는지 이유를 알게 되기까진 나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르나르, 손……!”

    그리고 나의 다음 말은 르나르의 입술 위에서 부서져 버렸다.

    르나르가 깊은 입맞춤으로 내 입을 막아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밤새 이런 식이었다.

    내가 르나르를 막고, 르나르는 막는 나를 막고.

    ‘그렇다고 싫기만 했냐 하면.’

    “…….”

    나는 결국 르나르가 나를 놔줄 때까지 한나절을 더 그에게 붙잡혀 있었어야 했다.

    점심을 먹으러 나갈 수 있었던 건 해가 중천에 솟은 시각이었다.

    분명 해는 떴지만 구름 또한 잔뜩 껴 꽤 흐린 날이었다.

    르나르의 팔을 어깨에 두른 채 계단을 내려가는데, 어쩐지 여관 로비가 어수선했다.

    두리번대다 보니 얼굴이 눈물로 범벅된 금발의 여자가 소란의 중심에 서 있는 게 보였다.

    피터가 여자를 달래고 있었고 폴 또한 근처에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었다.

    “누…누나…!”

    울던 폴이 나를 발견하고는 쪼르르 달려와 내 치마폭에 얼굴을 묻었다.

    폴은 내 다리를 끌어안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니나가… 니나가 노예 장수들한테 잡혀갔어…!”

    고개를 든 아이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들이 뚝뚝 떨어졌다.

    “누나는… 누나는 부자지…? 부자니까 구해줘…. 니나를…. 누나가 안 구해주면 노예 사냥꾼들이 니나를 먼 곳에 팔아버릴 거야….”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폴은 이제 숨도 잘 쉬지 못할 정도로 헉헉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니나를 구해달라는 말만은 멈추지 않았다.

    “니나라면 네가 좋아하는 아이? 그 금발 꼬마?”

    르나르가 폴에게 물었다.

    폴이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니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거짓말해서…. 그래서 니나가 잡혀간 거야. 내가 나빠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나쁜 놈들이 나쁜 짓 한 걸 왜 네 탓을 해?”

    “내가 거짓말해서…. 내가 나빠서 니나를….”

    르나르가 폴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러더니 폴 옆에 무릎 꿇고 앉아 아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가 걔 구해다 줄게. 무슨 일이 있어도. 최선을 다해서. 약속할게.”

    르나르의 말에 폴이 고개를 들었다.

    “…그게 정말이야, 형?”

    “응. 약속할게. 좋아하는 사람이 납치된 기분을 나보다 더 잘 이해할 사람은 없을 것이거든.”

    르나르가 슬픈 눈을 하고 폴을 봤다.

    그리고 일어섰을 때, 르나르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날카로워져 있었다.

    * * *

    르나르가 니나를 구하기 위한 정보를 모은단 소식이 전해지자 여관 근처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너나 할 것 없이 한마디씩 던졌다.

    “저희 도시에서 납치 행각을 자주 벌이는 것으로 봐서 근거지가 이 근처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확실히 알려진 건 없습니다.”

    “프릭 후작가 놈들이 그놈들과 한패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후작가에서 수색을 한다고 나서도 매번 허탕이고, 그놈들 근거지가 이토록 베일에 싸여 있는 것이겠죠.”

    “놈들은 여자와 아이들 위주로 납치합니다. 환락가에도 팔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아주 찢어 죽일 놈들입니다!”

    안타깝지만 그들이 던진 말 중엔 니나를 빨리 찾는 데 쓸 만한 정보는 없었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는 마을 사람들의 태도는 대단히 고무적이었다.

    제임스만 봐도.

    “기사가 되고 싶어 검술을 배웠었습니다. 제가 도련님을 돕겠습니다. 돕게 해주세요!”

    마을 사람들에게 ‘대장장이 제임스’라 불리는 남자가 말했다.

    “저는 무예는 배운 적 없습니다만 힘으로 농사짓는 녀석이니 한두 놈쯤은 때려눕힐 수 있을 겁니다. 저도 돕게 해주세요.”

    “제 아내가 그놈들에게 납치당했습니다, 저도 돕게 해주세요!”

    제임스를 따라 다른 남자들도 팔 벗고 나섰다.

    그전부터 이를 갈아왔지만 그들끼리는 상대하기 어려웠는데, 나타난 르나르가 구심점이 된 모양이었다.

    “병력이 필요한 건 아니야. 그런 놈들 쓸어버리는 건 나 혼자서도 충분해. 하지만 감시할 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놈들 근거지를 모르는 상태이니.”

    “감시할 눈이요?”

    “잠복해서 납치 현장을 덮쳐야 해. 한 놈이라도 산 채로 붙잡아 근거지를 불게 해야지. 놈들이 언제 어디서 또 나타날지는 전혀 예상이 안 되는 건가?”

    “놈들은 빈민가 위주로 출몰합니다. 그리고 한번 납치를 시작한 구역에 눈에 띄는 여자나 아이가 없을 때까지 납치를 자행하곤 하니, 니나의 집 근처를 기점으로 잠복하다 보면 꼬리를 잡을 수 있을 겁니다.”

    “한번 납치를 시작한 구역에 눈에 띄는 여자나 아이가 없을 때까지?”

    제임스의 설명에 르나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그렇게 대범하게 행동하는데 아무도 지금껏 놈들을 잡아들이지 않았다고?”

    “그래서 프릭 후작가가 뒤를 봐주고 있는 게 분명하다는 생각을 저희는 하고 있습니다. 못 잡는 게 아니라 안 잡는 게 아니면, 도저히 이럴 순 없는 것이니까요….”

    제임스가 울다 지쳐 잠든 폴을 슬쩍 봤다.

    르나르의 시선도 잠시 폴에게 머물렀다.

    “곱게 죽이면 안 될 놈들이네. 노예 사냥꾼 놈들도. 프릭 후작가 놈들도.”

    르나르의 눈빛에 살기가 돌기 시작했다.

    * * *

    니나가 납치당한 지 사흘째.

    노예 사냥꾼 한 명이 빈민가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니나 나이대의 다른 여자아이를 끌고 가려다 르나르에게 덜미를 붙잡혔다.

    소식을 들은 나는 곧바로 르나르가 남자를 직접 고문하고 있다는 마을 대장장이 제임스의 집으로 향했다.

    내가 그 집 울타리 안으로 들어섰을 때, 마침 르나르가 제임스 비롯한 마을 남자들과 집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입은 옷이 완전히 피범벅이 된 르나르를 보고 내가 놀란 것도 잠시.

    르나르는 나를 보자마자 날 못 본 척하고 도망치려 했다.

    내가 그런 르나르를 서둘러 붙잡았다.

    “어디 가려고요.”

    “지금 더러워서…. 안 보셨으면 좋겠는데….”

    “르나르 피는 아닌 거죠? 르나르가 다친 건 아닌 거죠? 그것만 알려줘요. 나한텐 그것만 중요한 문제니까.”

    템포 빠른 내 목소리에 감추지 못한 걱정이 묻어났다.

    이에 달아날 궁리만 하던 르나르의 시선이 나에게 고정됐다.

    그는 곧 도망치려던 행동을 멈추고 허리를 굽혀 나와 시선을 맞췄다.

    날 안심시키는 게 먼저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제 피는 한 방울도 없습니다.”

    “정말이에요? 거짓말 아닌 거죠? 근데 어떻게 이 지경이 될 때까지 피에 젖었….”

    “놈이 터졌습니다.”

    르나르가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그 말을 이해 못 한 내가 눈만 깜빡였다.

    르나르는 그런 나를 보고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고는, 곧 다시 심각한 표정이 되어 조곤조곤 내게 설명했다.

    “잡아 온 노예 사냥꾼 놈이 터졌습니다. 몸속에서 폭발이라도 일어난 것 마냥, 펑.”

    “…….”

    “마을 사람들 설명에 따르면 저주일 거라고 합니다. 특정 내용을 말하려 하면 죽게 되는 저주요. 그놈이 근거지를 털어놓으려던 직전에 몸이 터졌으니,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저주가 가능하단 거예요? 그런 저주가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봐요.”

    “플루토나 제국에선 정보가 중요한 집단 내에서 이 마법이 종종 사용된다고 합니다. 그레시아나 제국에 비해 마법사가 많다 보니…, 여긴 그런 일도 가능한 것 같더군요.”

    하긴.

    나비를 홀리는 남자도 있고 불을 만드는 여자도 있는데.

    내가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르나르가 무심코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다.

    그러다 피 묻은 제 손을 보고는 고운 미간을 험하게 구겼다.

    “일단 씻고 오겠습니다. 대공녀님 앞에서 이런 꼴로 서 있는 걸 제가 더 견딜 수가 없네요.”

    르나르가 몸을 돌려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르나르만큼 피범벅은 아니지만 옷의 일부가 피에 젖은 남자들이 내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르나르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요 며칠 하늘엔 계속 먹구름이 끼어있었다.

    ‘니나를 구하는 게 어쩐지 쉽지 않은 일이 될 것만 같아.’

    나는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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