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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90화 (90/100)
  • 90화

    공작가 저택

    “아, 그 꼬마가 그쪽 손자였어?”

    르나르가 아이를 힐긋 보곤 곧 고개를 돌리며 별 감흥 없이 물었다.

    “예, 도련님. 제 손자 아폴로입니다. 폴, 인사드려야지.”

    피터가 손으로 아이 머리를 눌렀다.

    하지만 아이는 목에 힘을 꼿꼿이 주곤 제 할아버지한테 반항했다.

    “싫어, 할아버지. 저 사람들이 누군데!”

    “할아버지가 일했던 공작가 공녀님 아드님과 부인분이시란다.”

    “아, 공녀님? 할아버지가 맨날 자랑한 그 예쁜 공녀님? 유령 저택 공녀님?”

    폴이 눈을 빛내며 큰 소리로 말하자 피터가 사색이 됐다.

    “도, 도련님, 그게 아니라….”

    “뭐 어때. 사실인데.”

    르나르가 읽던 고용인 목록에 여전히 시선을 고정한 채 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몇 년 전 방문했을 때가 마지막이었지, 아마? 그때도 엉망이었으니, 지금은 더 엉망이겠군. 루즈벨트 공작 저택.”

    “몇 년 전 방문이 마지막이실까요? 그럼 이번 여행길에서는 아직 저택을 들르지 않으셨겠군요. 그러시다면 제 손자 아이에게 두 분께 저택을 안내하게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피터가 말했다.

    르나르가 고개를 저었다.

    “됐어. 로즈와 나, 둘만 가도 되니까.”

    그런데 폴이 르나르의 말허리를 자르며 끼어들었다.

    “나도 저 형 싫어. 예쁜 누나만 안내해 줄 거야. 누나가 부서지는 바닥을 밟으면 안 되니까. 저 무서운 형은 아무렇게나 되라지?”

    폴의 말에 르나르가 무섭게 눈을 치켜떴다.

    “너 이 자식, 예쁜 걸 아는구나?”

    그런데 말하는 목소리에 뿌듯함이 담겨 있었다.

    “형한텐 누나가 아까워.”

    “혹시 감별사 같은 꿈이 있나? 재능이 있는 것 같은데, 네가 잘되면 내가 고용해 주지.”

    “내가 잘되면 왜 형한테 고용 받아야 해?”

    “한 마디를 안 지는 뚝심도 있어. 마음에 들어.”

    “폴, 도련님껜 형이라는 호칭을 쓰는 게 아니란다.”

    당황한 피터가 어쩔 줄 몰라 했다.

    르나르가 상관없다는 손을 한 번 휘휘 저었다.

    “나는 그럼 누나만 안내해 주면 되는 거지?”

    폴이 피터를 보며 물었다.

    “벌써 이렇게 노리는 사람이 많으니, 제가 한눈을 팔 수가 없네요.”

    르나르가 날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뒤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정말… 여기로 들어가라고…?”

    폴이 가리킨 담벼락 아래 개구멍을 보고 르나르가 눈썹 하나를 비뚜름하게 올렸다.

    “응. 저 문은 잠겨 있어.”

    폴이 멀찍이 보이는 저택 정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문과 문 사이에 쇠사슬이 감겨 있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렇다고 우리 부인님께도 여길 기어들어 가라고 하다니. 넌 정말 신사의 예의가 없구나?”

    르나르가 폴의 목덜미를 잡아 달랑달랑 들어 올렸다.

    “뭐, 뭐 하는 짓이야! 이거 안 놔?!”

    폴이 소리 지르며 공중에서 버둥대는데, 르나르가 그런 폴의 팔을 잡아 그의 목에 매달리게 했다.

    “꽉 잡아. 한 번에 넘을 거니까.”

    폴을 목에 단 르나르가 담벼락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그러곤 달리고 도약해 담벼락을 발로 차 추진력을 얻고는, 그의 키에 몇 배가 되는 담벼락을 훌쩍 넘어버렸다.

    나는 그 순간 코웰 저택 내 방을 제 집처럼 드나들던 르나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소드 마스터의 침입을 막아내는 법에 관해 내가 고민하는 사이, 폴을 반대쪽에 둔 르나르는 다시 내 쪽으로 넘어와 있었다.

    그러곤 심각한 내 표정을 보고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이유도 모르고 키득키득 웃고는 눈 한쪽을 찡긋해 조용히 하란 표시를 했다.

    그다음 내게 소리 없고 짧지만 진한 입맞춤을 했다.

    그 뒤 얼굴이 빨개진 나를 한 팔로 안고 다시 담벼락을 훌쩍 넘었다.

    “뭐야, 왜 이렇게 늦었어. 누나는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 어디 아파?”

    아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꼬마는 몰라도 돼.”

    르나르가 그렇게 말하길래 당황한 내가 조잘조잘 떠들기 시작했다.

    “날씨가 더워서. 수도는 이제 겨울인데 여기는 아직 덥구나.”

    “이게 더워? 하긴. 수도가 겨울엔 확실히 더 춥대. 할아버지가 그랬어. 나는 수도엔 안 가봐서 잘 모르겠지만.”

    순진한 폴은 다행히 내 얕은수에 넘어가 주었다.

    르나르가 그런 폴을 보며 자꾸 키득댔기 때문에 나는 몇 번씩 르나르의 단단한 팔을 몇 번이나 꼬집어야 했다.

    그때마다 지난 밤이 생각나 오히려 난감해야 했지만….

    “누나, 조심해! 거긴 밟으면 땅이 꺼져!”

    폴이 얇은 판자가 덧대어진 바닥을 밟으려 한 나를 자기 쪽으로 당기려 했다.

    하지만 폴이 날 잡기도 전, 나는 르나르에 의해 잡아당겨졌다.

    “내 부인님께 손대지 마. 아무리 꼬마라도 이건 용납할 수 없어.”

    날 품에 안은 르나르가 폴을 보며 눈을 사납게 떴다.

    폴이 복어처럼 볼을 부풀렸다.

    “누나는 형 싫대.”

    “누가 그래?!”

    “내가.”

    “네가 뭔데.”

    “르나르… 아이를 상대로 그렇게 진지하게 싸우지 말아 줄래요…?”

    “형은 정말 못됐어! 자꾸 못되게 굴면 노예 사냥꾼들이 형을 잡아갈 거야! 노예 사냥꾼들은 못된 아이들만 잡아간다고 우리 할아버지가 그랬어!”

    “노예 사냥꾼?”

    그 단어의 뜻을 몰랐던 내가 폴에게 되물었다.

    이에 르나르가 나를 흘긋 보더니 허리를 숙여 내 귀에 속삭였다.

    “원래는 범법자들을 붙잡아 노예로 만드는 자들을 칭하는 자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는 평범한 사람들도 납치해 노예로 만든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프릭 후작가에서 뒤를 봐주고 있어 잡히지 않고 있는 것 같다고 레오 대공자님께서 제게 귀띔해주셨습니다.”

    “그게 정말이에요?!”

    놀란 내가 반문했다.

    사람을 강제로 잡아 노예로 만든다니.

    현실 세계 개장수의 개 납치 이야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돈 때문이 분명합니다. 손해 본 재산을 그런 짓으로 메꾸려는 거겠죠.”

    “당장 그 문제부터 해결해야겠네요.”

    르나르와 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서로에게 속삭였다.

    그때, 앞서가던 폴이 걸음을 멈췄다.

    “여기서 낳으셨다고 했어. 예쁜 공녀님이, 예쁜 아기를.”

    폴이 문 없는 방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순간, 르나르의 동작이 멈췄다.

    깨진 창문을 통해 스며들어온 햇살을 반사한 적갈색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르나르?”

    “…….”

    “르나르….”

    “아.”

    내가 어깨에 손을 올리자, 르나르가 그제야 내 목소리를 들은 듯 작은 탄성을 뱉었다.

    “몰랐던 거예요? 저 방이 르나르가 태어난 방인걸?”

    “…얘기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이 저택에 올 때는 늘 저 혼자 왔기 때문에….”

    르나르의 입꼬리가 굳어 있었다.

    르나르의 탄생을 저주라 자주 말하던 원작의 엘리 루즈벨트 공녀를 나는 그 순간 떠올렸다.

    내가 르나르에게 손깍지를 꼈다.

    “같이 갈까요?”

    내가 묻자 르나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복도에 폴을 세워두고 르나르와 나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문도 없는 방이었지만 의외로 방안은 깔끔했다.

    요람과 커튼을 제외하곤 방 안에 아무것도 없어 그런 것 같기도 했지만.

    천장까지 닿는 긴 창문 틈으로 바람이 불자 얇은 하얀색 시폰 커튼이 텅 빈 방 안으로 나부꼈다.

    르나르가 커튼을 한 손으로 잡아 갈무리했다.

    “문도 떼어 간 주제에 이건 남겨뒀네요.”

    르나르가 방에 유일하게 남은 가구인 요람을 흘긋 보곤 말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 요람을 살폈다.

    군데군데 보석을 떼어간 흔적이 있었지만 요람 자체는 그냥 둔 것을 보니, 빈 공작가를 털어간 누군가의 양심이 요람까지 가져는 건 허락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무라서 남겨둔 건가.”

    “요람이라서 남겨둔 것 같아요. 나무가 좋은 나무라 땔감으로만 팔아도 돈이 꽤 될 것 같으니.”

    내가 요람을 손으로 쓸며 말했다.

    그런데 요람의 난간에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다.

    ‘왜 여기만… 나뭇결이 사라지고 이렇게 부드러워진 걸까…?’

    내가 그 부드러운 곳을 손으로 짚고 요람 안을 봤다.

    시선이 닿는 곳이 딱 아기 머리가 있을 자리였다.

    순간 요람에 누운 작은 아기와 그 아기를 지켜보는 어머니의 이미지가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원작의 외전 1이 떠올랐다.

    [사랑해, 사랑해 우리 아가.]

    르나르가 처음 태어났을 때.

    그리고 터넛에게 배신당하게 될 줄 몰랐을 때.

    그때까지만 해도 원작의 엘리는 분명 르나르를 많이 사랑했었다.

    “…르나르.”

    “네, 대공녀님.”

    “르나르는 사랑받는 아기였어요.”

    “……?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내가 요람에서 비켜섰다.

    르나르의 시선이 내가 잡고 있던 난간에 꽂혔다.

    “르나르의 어머니는 꽤 자주, 아니, 정말 자주, 이 방에서 바로 이곳을 잡고 르나르를 내려다봤을 거예요. 그래서 난간이 이 부분만 이렇게 닳은 거고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여기 이렇게 증거가 있는데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대공녀님. 저희 어머니는…. 대공녀님께선 이해하지 못하시겠지만, 저희 어머니께서는….”

    말하는 르나르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러다 이내 무표정해진 후, 한층 차분해진 르나르는 이제 준비됐단 분위기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절 사랑하지 않으셨습니다. 제 탄생이 저주라고 늘 말씀하셨으니까요.”

    “그건… 르나르의 어머니께선 공작가가 무너지고 많이 힘드셔서 그런 거예요. 게다가 르나르가 황제 폐하의 얼굴을 아예 안 닮진 않았으니, 르나르에게서 터넛 황제 폐하를 보고 더 괴롭기도 하셨겠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르나르를 아예 사랑하지 않았던 건 아니실 거예요. 난간이 이렇게나 해질 만큼 요람을 붙잡고 있는 건 분명… 쉬운 일은 아니니까.”

    내 말에 르나르가 다시 요람을 봤다.

    르나르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하지만 커튼 사이로 스며든 빛이 맺혀서인지 그의 눈동자는 어쩐지 온기가 감돌기 시작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제가 속아 드려야겠죠?”

    잠시 후 르나르가 나를 보며 물었다.

    장난기가 조금 담긴 목소리로.

    “지금 내 말, 못 믿는 거예요?”

    “대공녀님께선 항상 절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주고 싶어 하시잖아요. 전 대공녀님만 있어도 충분히 행복한데. 대공녀님께선 그걸 모르시고….”

    “르나르.”

    내가 르나르의 얼굴을 붙잡아 날 보게 했다.

    “믿어줘요. 난 지금 르나르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거짓말하는 게 아니에요. 나에겐 정말, 르나르가 사랑받는 아기였단 확신이 있어요.”

    나는 르나르에게 믿음을 주고 싶었다.

    내가, 사람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내가, 이젠 르나르 덕에 코웰 가문 가족들이 아닌 다른 사람도 믿게 되었으니까.

    르나르를 믿게 되었으니까.

    여차하면 다른 세계에서 왔단 이야기까지 하고 외전 얘기를 해주고 싶었을 정도로, 나는 르나르를 믿게 하고 싶었다.

    그가 사랑받는 아기였단 사실을.

    “혹시 어머니께 사랑받았던 게 싫은 거예요?”

    “……아뇨, 당연히 그건 아니죠.”

    “근데 왜 사랑받은 적 없었을 거라 확언하는 건데요?”

    “확언… 하는 건 아니고….”

    “……?”

    “사실… 평생 단 한 순간만이라도 어머니께 사랑받은 적이 있었던 거면 좋겠다…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

    “그런데 착각하게 됐다가 아닌 걸 알게 되면 슬프잖아요.”

    르나르가 내가 아닌 바닥 쪽으로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깊어진 그의 적갈색 눈동자 위로 길고 촘촘한 속눈썹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르나르가 어렵게 말한 진심에 나는 가슴이 뭉근하게 저며왔다.

    “말해줘서 고마워요, 르나르. 근데 르나르. 르나르는 이 방에서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았을 거예요. 난 확신할 수 있어요. 나 믿어줄래요?”

    내가 간절한 목소리로 묻자 르나르가 가볍게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대공녀님을 못 믿으면 누굴 믿겠습니까?”

    내가 그런 르나르를 보며 마주 웃었다.

    “그나저나 태어난 방을 보게 된 기분이 어때요?”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내가 부러 밝은 목소리로 르나르에게 물었다.

    “글쎄요.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이네요.”

    “이 방에서 아기를 낳으면 르나르처럼 예쁜 아기가 나오는 거군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때, 내 허리를 감아오는 체온 오른 손길이 느껴졌다.

    “…아기 생각이 있으신 겁니까?”

    “아예 없진 않겠죠? 어차피 결혼이란 걸 하기도 했고….”

    내가 뒤를 돌아 내 허리를 감은 르나르를 봤다.

    날 보는 그의 눈빛이 진득했다.

    “낳으려면 먼저 만들어야겠네요.”

    르나르가 야하게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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