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략남이 훅 들어왔어-89화 (89/100)
  • 89화

    저 예뻤습니까?

    목욕 후 안나가 준비해 준 옷 가방을 조심스레 열어본 나는 안심했다.

    황성에서 안나와 나눈 대화 때문에 솔직히 좀 걱정했었기 때문이었다.

    「첫날밤이요? 그럼 지난번엔 그냥 안고만 주무신 거세요? 제가 준비해드린 그 얇은 실크 잠옷을 입고?」

    「언제를 말하는 거야? 내가 르나르 앞에서 아픈 척했을 때?」

    「네.」

    「응.」

    「그분… 생각보다 독한 분이셨네요…. 하지만 두고 보라죠…! 결국 제가 이기고 말 거니까.」

    이상한 곳에 경쟁심을 불태우는 안나였다.

    안나가 준비해 준 잠옷은 아래쪽에 검정 레이스가 달린 붉은 실크 나이트가운이었다.

    평소 내가 입는 잠옷들보다도 점잖아 보인다고 평 내릴 수 있을 만큼 평범해 보였다.

    ‘뭐야, 괜히 걱정했네.’

    조금 허탈하단 생각까지 하게 된 내가 가운을 들었다.

    그런데 가운 안에서 뭐가 툭, 떨어졌다.

    그리고 떨어진 그 얇고 작고 레이스 가득한 것을 보고 나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이게 뭐야…… 이 시대에도 이런 게 있었다고……?”

    혹시 직접 상상해 제작 맡긴 것일까.

    나는 결국 그것을 입지 못한 채 맨몸에 가운만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차라리 맨몸을 선택했을 정도로…

    그것들은 내가 보기엔 좀 그랬다.

    방 안에 르나르가 없어 아직 오지 않았나 생각하며 둘러보니, 발코니 난간에 기대고 서서 밤바다를 보며 와인을 마시고 있는 르나르가 보였다.

    르나르는 여관 욕실 샤워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아. 나도 저걸 입을 걸 그랬나?’

    그렇게 생각한 내가 다시 욕실로 가려고 뒤돌려는데, 내 기척을 느낀 르나르가 뒤돌아 나를 봤다.

    “어디 가시려고요.”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눈을 휘어 웃은 르나르가 내게 말했다.

    새하얀 달빛이 깃든 르나르의 적갈색 눈동자가 일렁였다.

    그가 손에 든, 그의 눈동자 색과 같은 색 와인이 찰랑였다.

    그의 뒤로 보이는 짙은 밤바다 색으로 머리가 물든 르나르였다.

    그리고 쏟아질 듯 촘촘한 무수한 하얀 별들.

    “예쁘다….”

    홀린 내가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싱긋 웃은 르나르가 내게 다가오더니 와인 잔을 들지 않은 손으로 내 허리를 감았다.

    “지금 유혹하시는 겁니까?”

    “유혹은 르나르가 하고 있었는데. 아니었나요?”

    “제가요?”

    “방금 예뻤잖아요.”

    “저 예뻤습니까?”

    “자기 잘생긴 거 알면서…. 굳이 묻는 건 왜 묻는 거예요?”

    “대공녀님 입을 통해 듣는 건 더 짜릿하거든요.”

    능글맞게 말한 르나르가 내 눈을 뚫어지게 봤다.

    그다음엔 입.

    마치 내 입이 어딨는지 알려주고 싶은 것처럼.

    “제 입이 어딨는진 저도 알아요.”

    “정확히는 입이 아니라 입술을 보고 있습니다만.”

    “그거 맛있어요? 저도 한 모금 줘봐요.”

    내가 르나르가 든 와인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안 됩니다.”

    “왜요?”

    “이거 꽤 독해서요.”

    “저도 성인이에요. 독한 술 마실 수 있어요.”

    “대공녀님, 이거 마시고 잠들까 봐. 오늘 밤이 긴데.”

    순간 밤바다를 지나온 바람이 르나르와 내 사이를 갈랐다.

    나는 어쩐지 마른침을 삼키게 됐다.

    “맛은 보게 해드릴게요.”

    싱긋 웃은 르나르가 내게 입을 맞췄다.

    그가 혀를 넣자 달콤 쌉싸름한 와인 맛이 입안을 감돌았다.

    “…맛있네요.”

    르나르가 입술을 뗐을 때 내가 말했다.

    “뭐가요?”

    “와인이요.”

    “아, 대공녀님. 저도 맛있는 거 먹고 싶은데.”

    와인잔을 바닥에 내려놓은 르나르가 다시 내게 입을 맞춰왔다.

    그가 얽어 오는 혀를 느끼고 있는데, 나의 나이트가운 허리 리본이 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 르나르가 갑자기 동작을 멈췄다. 그는 나이트가운이 내려가며 드러난 내 어깨를 가만히 바라보는 중이었다.

    “혹시 안에… 아무것도 안 입으신 겁니까…?”

    “…….”

    “젠장.”

    그 뒤로도 몇 마디 욕지거리를 더 뱉은 르나르가 내게 다소 거칠게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입맞춤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여전히 입술을 맞붙인 채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날 안은 르나르가 키스를 이어가며 침대로 걸어갔다. 그사이 내 나이트가운이 바닥에 떨어졌다.

    내가 침대 위에 눕혀졌다.

    천장이 보였고 그다음엔 르나르가 보였다.

    “오늘은 제가 리드할 테니… 대공녀님은 따라만 오세요.”

    르나르의 샤워가운이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놀란 내가 눈을 감았다.

    내게 몸을 붙인 르나르가 내 눈을 핥아 다시 눈을 뜨게 했다.

    “눈 감으시면 안 되죠. 저도 이렇게 다 보고 있는데.”

    거칠어지려는 숨소리를 억누르는 르나르가 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시선으로 훑었다.

    그다음엔 손으로.

    그다음엔 입술로.

    밤새 이어진 르나르가 리드하는 행위는 빨갛게 동이 터올 때나 되어 겨우 끝났다.

    그것도 꽤 충격받은 내가 결국 엉엉 울며 그를 떼어놓을 지경이 되어서야.

    “너무해요…!”

    “뭐가요?”

    “르나르가 그렇게 배려심이 없는 사람인 줄은 정말 몰랐어요. 내가 그렇게 멈추라고 했는데…. 어떻게 한 번을 안 멈추고…!”

    “…못 들었는데.”

    “나한테 거짓말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정말 못 들었습니다. 저도 처음이라 제가 그렇게 이성을 잃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계속 힘들기만 하셨습니까?”

    “……네?”

    “계속 힘들기만 하셨냐고요.”

    “…….”

    “전혀 좋지 않으셨어요?”

    내가 우물쭈물 대답을 망설이자 대충 눈치챈 르나르가 달게 웃었다.

    “점점 더 괜찮아지실 겁니다.”

    르나르가 나를 안아왔다.

    그러곤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내 얼굴에 촉촉 입을 맞췄다.

    그러다 다시 손이 아래로 내려가는 르나르였다.

    소드 마스터는 밤새 그렇게 몸을 쓰고도 힘이 남아도는 모양이었다.

    “나 힘들어요…!”

    “전 안 힘든데, 대공녀님.”

    내 말을 가볍게 무시한 르나르가 내 안에서 손을 움직였다.

    눈앞이 다시 하얗게 점멸해왔다.

    “그리고 저, 환영받고 있는 것 같아요.”

    그의 말을 이해한 내가 우는 얼굴을 했다.

    “참을 수가 없네요, 정말.”

    그런 날 보고 짧게 감상평을 뱉은 르나르가 내 위로 몸을 올렸다.

    그다음엔 내 안에서 느껴지는 그의 감각.

    밤새 익숙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생경한.

    르나르가 다시 나를 풀어준 건 한낮이 다 되어서였다.

    줄 끊어진 마리오네트보다 흐물흐물해진 내가 여기서 더하면 파혼이라고 엄포를 놓고 나서야, 그는 제정신을 차리고 품에서 날 놓아줬다.

    “…나 이제 밤이 무서울 것 같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대공녀님. 대공녀님께서 걱정하시는 그 일은 낮에도 일어나거든요.”

    능글맞게 말하는 르나르에 내가 경악했다.

    르나르가 교태를 담은 눈웃음을 짓고는 내 목선을 따라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안 돼요.”

    “알아요.”

    “근데 또 왜….”

    “그냥 입 맞추는 거예요. 대공녀님 빨리 회복하셔서 제가 또 맛있게 먹을 수 있게.”

    내가 르나르를 밀치고 이불 속으로 몸을 숨겼다.

    이불 위로 르나르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다음엔 그가 침대 밖으로 내려서는 소리.

    그리고 르나르는 이불로 감싼 채로 나를 침대 위에서 들어 올렸다.

    “씻으셔야죠. 나가서 점심 먹으려면.”

    그리고 세 시간 후.

    르나르는, 깨끗해지긴 했는데 아까보다도 녹초가 된 나를 안고 욕실 밖으로 나왔다.

    그 뒤 나는 르나르가 내 머리를 말려주고 옷을 입혀주는 동안 꾸벅꾸벅 계속 졸았다.

    거의 잠들었다 깨어났을 때 난 외출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랍스타 버터구이 먹고 싶다고 하셨었죠? 어제 저녁 먹으면서 그러셨잖아요. 오늘은 그거 먹으러 가요.”

    르나르는 비틀대는 날 거의 안다시피 해 해변과 이어진 1층 식당으로 데리고 나갔다.

    짭조름한 바다 내음이 코끝에 닿았을 때야 나는 겨우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르나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위로 허리를 숙이더니, 그가 내게 씌워놓은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이리저리 매만졌다.

    덕분에 얼굴에 그늘이 생기자 나는 다시 잠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잠들지 마세요. 밥은 먹고 주무셔야죠.”

    무서운 내 남자가 날 보며 피식거리며 웃었다.

    그때, 고요한 평화를 깨는 어린아이들의 다투는 소리가 쨍하게 울려 퍼졌다.

    르나르와 나의 시선이 동시에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인 금발의 여자아이 앞에, 옥수수를 든 주황 머리 남자아이가 있었다.

    “너희 집엔 이것도 없지?!”

    남자아이는 잘 구워진 옥수수를 행색이 다소 초라한 제 앞의 여자아이에게 자랑하고 있었다.

    “아주 못된 꼬마네요.”

    르나르가 눈썹 한쪽을 삐뚜름하게 올리며 말했다.

    “너희 엄마는 이런 것도 못 구해다 주니까 내가 불쌍해서 주는 거야. 딴 사람 주지 말고 너만 먹어.”

    남자아이가 여자아이 손에 옥수수를 억지로 쥐여 줬다.

    남자아이는 쌀쌀맞은 표정이었지만 귀 끝이 붉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여자아이는 자존심이 무척 상한 표정을 짓더니, 남자아이가 준 옥수수를 땅에 냅다 집어 던져버렸다.

    “난 이딴 거 안 먹어, 너나 먹어!!”

    여자아이가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곤 빽 소리치더니 홱 돌아 가버렸다.

    남자아이는 크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니, 니나…? 잠깐만…! 난 그게 아니라…!”

    남자아이가 허둥지둥 여자아이를 쫓아갔다.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를 좋아하나 보네요.”

    내가 확신하며 말하자 르나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좋아하는 거라고요? 저게요? 저게 어떻게 좋아하는 사람한테 할 수 있는 행동이란 말입니까? 자기가 가진 걸 자랑하고, 못된 소리만 하고.”

    “아직 어리잖아요. 제가 봤을 땐 분명 좋아하는 거예요.”

    내가 현실 세계에서 읽은 적 있는 소설 하나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 소설에선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에게 감자를 줬었지, 아마?

    “이해할 수 없네요. 좋아하는 사람에겐 온종일 잘 해줘도 모자란 것이 정상인데.”

    “온종일 잘 해줘도 모자란 게 정상인데 르나르는… 조금 전까지도 나한테 그런 거예요…?”

    르나르가 자기는 죄 없다는 표정으로 씩 웃었다.

    나와 르나르가 그렇게 티격태격하는데, 둘둘 말린 종이를 든 피터가 나와 르나르에게 다가왔다.

    “편안한 밤 보내셨습니까, 도련님. 여기… 어제 부탁하신 공작가를 떠나 흩어진 사용인들을 정리한 목록입니다.”

    “응. 고마워.”

    르나르가 종이를 받아들었다.

    그때, 여자아이를 쫓아가다 돌아온 주황 머리 남자아이가 피터 뒤에 숨더니 휙 얼굴만 내밀었다.

    “할아버지, 이 사람들은 누구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