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략남이 훅 들어왔어-88화 (88/100)
  • 88화

    도련님

    버진로드를 따라 흰 꽃이 빼곡히 장식된 결혼식장.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통과한 오색 빛깔 햇살이 나와 대공의 걸음걸음을 비추어줬다.

    마치 신의 축복처럼.

    사제의 기도 이후 나와 르나르는 혼인 증서에 서명했다.

    서명 중 문득 고개를 들고 보니, 대공과 레오, 겔리온이 눈물을 참고 있는 것이 보였다.

    미르엣과 에반은 이미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중이었다.

    가족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결혼할 수 있다니 행복했다.

    “이제 맹세의 입맞춤으로 결혼식을 마치겠습니다.”

    라는 사제의 말에 가족들이 도끼 눈을 뜬 건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하지만 가족들이 이상의 반응을 보이기 전 르나르가 내게 빠르게 입을 맞춰 버렸기 때문에 결혼식은 무리 없이 끝날 수 있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멜로소 도시의 고급 여관에 도착했을 땐 이미 날이 저문 뒤였다.

    다섯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여관의 분위기는 멜로소 도시 전체의 분위기와 비슷했다.

    일단 깨끗했고, 눈에 띄게 화려하진 않았지만 멋스럽고 고풍스러운 느낌이 있었다.

    “이곳은 황족이 공작령를 방문하면 머물 수 있게 루즈벨트 공작가에서 지은 주거용 궁전을, 후에 루즈벨트 공작가에서 다시 여관으로 개조해 상업화한 곳입니다.”

    르나르가 내게 설명했다.

    “현재는 프릭 후작가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이니 관리는 잘 돼왔을 겁니다.”

    그런데 후작가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라는 여관엔 우리를 제외한 손님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했다.

    눈길이 닿는 곳에 보이는 것은 단정한 제복을 차려입은 직원들이 전부였다.

    “플루토나 제국 사람들은 여행을 좋아하지 않나요? 투숙객이 우리밖에 없는 것 같아요.”

    “네, 뭐… 그렇죠.”

    그때, 르나르와 내가 지나친 직원들끼리 속삭인 소리가 내게까지 들렸다.

    “저분들이 이번 주 내내 여관을 통째로 예약한 신혼부부야?”

    “대체 어느 가문 자제분들인 거지? 그 정도 재력인데 처음 뵙는 얼굴들인데….”

    “모르긴 몰라도 밉보이면 안 돼.”

    “……르나르?”

    내가 르나르를 불렀다.

    “……네, 대공녀님.”

    조금 망설이며 르나르가 대답했다,

    “혹시 숙소 예약에 돈을 얼마나 들였어요?”

    “무리 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정확한 금액을 말해줘요. 아, 참. 드레스 가격도 알고 싶은데.”

    “시간이 늦었으니 저녁은 방에서 드시는 게 어떻습니까? 피곤하실 것 같기도 하고….”

    “르나르 과소비 습관을 제가 고쳐주고 말 거예요.”

    “이럴 때 쓰려고 돈 벌어놓은 거 아니겠습니까.”

    르나르가 가벼운 입맞춤으로 내 입을 막으며 어서 올라가자고 계단을 향해 내 등을 떠밀었다.

    내가 반항하니 아예 날 들고 가버린 르나르였다.

    이후 나와 르나르는 텅 빈 5층 객실을 전부 둘러본 뒤 그중 가장 넓고 좋아 보이는 방을 머물 곳으로 골랐다.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넓은 발코니가 있는 방이었다.

    르나르가 발코니 문을 열자 바다 내음이 섞인 맑은 공기가 한껏 스며들어 내 기분을 들뜨게 했다.

    “밤의 바다는 에메랄드빛이 아니군요.”

    새까만 바다를 멍하니 보던 르나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밤바다 처음 봐요? 어렸을 적엔 이쪽 근처에 산 거 아니었어요?”

    어린 르나르의 멜로소 시절 원작 내용을 기억하는 내가 의아해져 르나르에게 물었다.

    르나르가 가볍게 웃었다.

    “살았었습니다. 근데 굳이… 바다 근처에 가지는 않았습니다. 바다가 아름답다고 생각했거든요. 아름답지 않은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걸 보는 게 싫어서.”

    “…….”

    “그런데 대공녀님을 만난 뒤론 전부 좋네요. 아름다운 바다도, 아름다운 대공녀님이 있는 이 세상도, 아름다운 제 대공녀님도.”

    “르나르….”

    르나르가 나를 만난 뒤의 세상이 아름답다고 하니 나는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마음이 몽글몽글해진 내가 그를 당겨 입을 맞추려 했다.

    그때, 똑똑하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르나르가 티 나게 인상을 썼다.

    “저녁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문밖에서 호텔 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르나르가 무시하고 입을 맞추려 하길래 내가 르나르를 애써 달래 밀어놓고 객실 문을 열었다.

    젊은 남성 직원이 끌고 온 트롤리엔 한눈에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가득했다.

    “와, 냄새 좋다…!”

    그래도 결혼식이라고 긴장해 아침부터 물밖에 먹지 못해서인지, 맛있는 음식 냄새가 코를 찌르자 나는 군침까지 꿀떡 삼키게 됐다.

    젊은 남성 직원 옆으로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노신사가 들어섰다.

    “저희 직원이 식사 테이블을 차리는 동안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런데 내게서 르나르에게로 시선이 옮겨가는 순간, 노신사가 굳어버린 듯 동작을 멈췄다.

    그러곤 음식이 세팅되는 내내 르나르를 힐끔힐끔 봤다.

    이후 상을 차린 직원이 나갔는데도 노신사가 나가지 않고 머뭇대자, 결국 르나르가 더는 모른 척하지 못하고 노신사에게 물었다.

    “내게 무슨 볼일이 있나?”

    그러자 노신사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람의 이름을 말했다.

    “루즈벨트 공녀님을… 혹시 엘리 루즈벨트 공녀님을 아십니까…?”

    노신사가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르나르의 눈썹 한쪽이 삐쭉 올라갔다.

    “이곳도 엄밀히 따지면 그 가문 소유인데. 내가 그 가문 마지막 공녀를 모를 리가.”

    르나르의 목소리는 무덤덤했다.

    하지만 갑자기 엘리의 이름을 듣게 된 그가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단지 그것뿐이십니까?”

    “그것뿐이 아니면?”

    “제가 그분을 좀 아는데… 그분과 지금 제 앞에 계신 손님께서 많이… 많이 닮으셔서요….”

    “……우리 어머니를… 개인적으로 아나…?”

    “맞으십니까?! 그분의 아드님이 맞으십니까?! 도련님…!! 저는 도련님께서 태어나시던 순간도 함께한 과거 공작저의 사용인입니다. 루즈벨트 공작 가문의 재정을 관리했었습니다. 첫눈에 엘리 공녀님을 닮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정말로 그분의 아들이시라니… 제가 살아생전 도련님을 다시 뵙게 되다니……!”

    놀라 펄쩍 뛴 노신사의 눈에 금방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르나르는 흥분하지 않았지만 눈이 조금 커진 상태였다.

    “공작가의 재정 관리인이었다고? 근데 왜 비슷한 일을 하지 않고 숙박업소 직원으로 일하고 있지?”

    “공작가 사용인들을 해고한 프릭 공작이 해고된 사용인들이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지 못하도록 수를 썼습니다. 루즈벨트 공작가를 위해 일한 적 있단 이유 하나만으로요. 저는 그나마 가진 노하우가 있어서 여기서 일하면서 그들이 필요로 할 때 재정적 조언을 가끔 건네고 있습니다만….”

    “유능한 인재라 멀리 보내진 않고 옆에 두고 이용한다는 거네. 그들에게 조언을 제공하는 대가는 제대로 받고 있나?”

    “아뇨, 받은 적 없습니다만, 받길 바란 적도 없습니다. 프릭 후작 가문엔 노동력 착취보다 더한 짓을 저지르는 쓰레기들뿐이거든요.”

    노신사가 쓰게 웃었다.

    그래도 르나르를 만난 노신사는 기뻐 보였다.

    “도련님, 어느새 이렇게 장성하셔서 결혼까지 하셨습니까. 도련님께서 이렇게 자라신 모습을 보려고 제가 열아홉 해 가까이를 이곳에서 참고 일했나 봅니다. 아아… 공녀님께선 잘 계십니까? 함께 오시진 않았고요?”

    “어머니는… 오래전에 죽었어.”

    “아… 그렇습니까… 공녀님… 참 좋은 분이셨는데….”

    “공작가가 무너지기 전엔 다정한 분이셨다고 하더군.”

    “지금 도련님의 모습을 공녀님께서 보셨다면 참 기뻐하셨을 겁니다. 오늘 결혼식을 하신 겁니까? 많이 피곤하시죠? 이런, 도련님을 배려하지 못하고 제가 말이 너무 많았습니다. 축객령을 내려주시면 두 분 쉴 수 있도록 전 이만 물러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만나서 반가웠어.”

    르나르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노신사에게 인사했다.

    내가 다 안타까워졌다.

    ‘그냥 이렇게 보내겠다고? 이제 영영 안 볼 것처럼?’

    르나르가 티는 안 내려 해도 노신사를 반가워하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에, 내가 나서야 하나 고민하며 속으로 전전긍긍했다.

    그때, 르나르가 노신사를 불렀다.

    “잠깐.”

    르나르가 부르는 소리에 노신사가 뒤돌았다.

    “도련님, 뭐 필요하신 거라도?”

    “공작가를 떠나 흩어진 사용인들 목록을 정리해주겠어? 내가 찾아 고용하고 싶군. 원한다면 자네도 고용해줄 수 있고. 원래 하던 일과 비슷한 일을 할 수 있도록 말이지.”

    “도, 도련님…!”

    “나는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는 지불할 예정이니 그 부분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그럼 저희는 다시 루즈벨트 가문을 위해 일할 수 있게 되는 겁니까?!”

    노신사가 의미를 두는 부분은 임금보다도 그쪽인 듯했다.

    “이미 사라져 없어진 가문에 무슨 명예가 있다고 그걸 기꺼워하는 건지… 난 이해할 수 없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면 그렇게 생각하도록 해. 어차피 내 몸에 흐르는 피 절반은 그 가문 것이긴 하니.”

    “도련님……!!”

    노신사가 다시 차오른 뚝뚝 흘리며 르나르를 안으려 했다.

    르나르가 질색하며 그를 피했다.

    “저리 가…! 곧 우리 부인님을 안아야 하는 몸인데.”

    “제, 제가 실수했습니다! 그럼 두 분 쉬실 수 있도록 전 이만 진짜 물러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참. 부탁할 게 하나 더 있는데.”

    “말씀하세요.”

    “여기서 제일 비싼 와인을 가져다주겠어?”

    르나르가 가져온 짐들 사이에서 작은 주머니를 하나 꺼내 노신사를 향해 내밀며 말했다.

    “와인 값을 지불하고 남는 돈은 그쪽이 챙기도록 하고. 그쪽 이름이….”

    “피터입니다, 도련님.”

    “후작가 놈들이 그동안 대가 없이 사용한 당신 노동력 값이야, 피터. 그걸로 충분하진 않겠지만.”

    “추, 충분합니다…! 도련님. 이거면 충분한 게 아니라 넘칩니다. 저는 루즈벨트 가문분들께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럼 나가주겠어? 난 이제 정말 내 부인님과 둘만 있고 싶은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꾸벅 인사한 피터가 와인을 가지러 떠났다.

    르나르가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런 르나르를 사랑스러워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갑자기 피터를 고용한 건 루즈벨트 가문 사람들이 제대로 된 처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게 보기 안 좋아서 그랬던 거죠?”

    “뭐… 비슷한 것 같긴 합니다.”

    내가 르나르에게 묻자 르나르가 멋쩍은 표정으로 우물우물 답했다.

    “잘했어요, 르나르. 르나르가 지금껏 쓴 돈 중에 가장 가치 있는 돈이었던 것 같아요.”

    “가장이요? 그건 좀 섭섭합니다. 제가 대공녀님 웨딩드레스를 얼마나 고심해서 골랐는데… 또 이곳 숙소는 얼마나 고르고 고르다 예약했는데….”

    “둘 다 좀 과했어요. 드레스는 보석이 너무 많았고, 숙소는 방 하나만 빌려도 될 것을 통째로 빌려버렸고.”

    “한 번뿐인 결혼식이잖아요. 완벽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르나르는 이미 내게 완벽해요.”

    내가 칭찬하며 입을 맞춰 주자 르나르의 동공이 순식간에 탁, 하고 풀렸다.

    나를 보는 르나르 눈빛이 탁해졌다.

    “대공녀님, 밥을… 밥을 꼭 먹어야 할까요…?”

    “그럼요, 먹어야죠. 나 배고파요.”

    그 뒤 식사를 하며 나와 르나르는 내일 일정에 관해 이야기 나누었다.

    그사이 피터가 새 와인을 가져왔지만 우리는 그 와인을 따지는 않았고, 식사가 끝난 뒤 나는 우리가 머무는 방 욕실로, 르나르는 다른 방 욕실로 각자 목욕을 하러 떠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