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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87화 (87/100)
  • 87화

    멜로소

    그 후 나는 르나르가 나를 흔들려고 우울한 척할 만했다고, 생각하게 됐다.

    나라도 나에게 서운할 것 같았다.

    내 가족이 문제였던지라, 르나르가 애써 노력해도 풀리지 않았던 문제들이 내가 나서니 참 수월하게 해결되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빨리 결혼하고 싶다, 도저히 더 기다리지 못하겠다, 약식으로 결혼하겠다 주장하니, 대공과 오빠들은 맥을 못 추고 내게 휘둘리기 시작했다.

    고부갈등에서 남편의 역할이 중요하단 현실 세계에서 종종 듣던 이야기를 나는 이곳에서 이런 식으로 실감하게 됐다.

    물론 그 모든 설득의 과정이 아주 쉬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의외로 겔리온이 아주 급진적인 생각까지 하며 나와 끝까지 논쟁을 벌이려 했기 때문이었다.

    「잘 생각해 봐, 로즈. 너에게 결혼이란 제도가 꼭 필요할까? 너는 아버지와 우리가 평생 사랑하고 아끼며 책임지고 돌볼 거야. 그런 너에게 결혼이라는 건 오히려 불필요한 족쇄가 될 수도 있어. 벗고 싶어져도 벗기 어려운. 그렇게 르나르 황자가 좋으면 결혼까진 생각하지 말고 황자와 자유롭게 연애만 해보는 건 어때?」

    「겔리온, 정말… 그런 생각을 한다고? 지나치게 급진적인 것 같은데? 다른 세계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야.」

    「잘 생각해 봐. 혹시 황자의 얼굴에 잠깐 홀린 건 아닌 건지. 그 자식, 아니… 그 황자의 얼굴이면 어느 정도 판단력이 흐려질 순 있어. 이해할게.」

    「겔리온, 과거의 난 우리 가족만 있어도 충분히 행복할 것 같았어. 물론 난 지금도 겔리온을 포함해 우리 가족들을 정말 많이 사랑해. 그런데 르나르도 사랑해. 사랑하게 됐어. 그래서 하고 싶은 것일 뿐이야, 그 결혼. 르나르도 내 인생의 일부가 되길 바라서. 르나르가 내 가족이 되었으면 좋겠으니까.」

    결국 겔리온은 완고한 날 굴복 시키지 못했다.

    그런데 겔리온과 나눈 대화가 안나를 통해 더글라스를 거쳐 르나르에게도 들어간 것일까?

    이후 르나르는 매일매일 기분이 좋아 보였다.

    「대공녀님, 오늘 날씨가 왜 이렇게 좋죠?」

    「대공녀님, 오늘 식사가 정말 맛있네요…!」

    「대공녀님, 사랑합니다.」

    그런 르나르를 지켜보는 나도 고양되는 감정을 느꼈다.

    잘생긴 사람이 구름 위를 걷듯 행복해하는 걸 보는 것이 상당히 짜릿한 일이라는 걸 이 세계에 와 처음 느끼게 된 것이었다.

    비록 반란 뒤 후처리로 일에 치여 사는 나와 달리, 매일 같이 웨딩드레스 카탈로그만 보는 르나르의 모습을 보면 조금 얄밉기도 했지만.

    “오빠들이… 왜 르나르한텐 일을 안 시키는 거죠…?”

    투명한 겨울 햇살이 내리비치는 황성 내 나의 집무실.

    그 집무실 책상 앞 소파에 누워 여유롭게 드레스 카탈로그를 넘기는 르나르를 보며 내가 조금 불만스럽게 물었다.

    르나르가 페이지를 넘기던 손길을 멈추고 날 보며 씩 웃었다.

    “저는 이름을 빌려드렸잖아요. 제 외가인 루즈벨트 공작 가문의 이름.”

    “아주 금수저가 따로 없네요. 건물주 같아요. 건물 빌려주고 돈 받는. 르나르의 경우엔 그게 건물이 아니고 이름이긴 하지만.”

    “건물주요? 혹시 건물의 주인 같은 겁니까? 마탑의 주인 마탑주 같은?”

    “맞아요. 똑똑하네요.”

    르나르를 칭찬한 내가 의자 등받이에 깊이 기대앉고 기지개를 켰다.

    결혼식 준비와 제국의 안정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을 동시에 진행하려니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듯했다.

    “르나르, 이리 와요.”

    “……?”

    “나 졸려요. 입 맞춰줘요.”

    “……!”

    “잠 좀 깨게.”

    드레스 카탈로그를 내팽개친 르나르가 책상을 넘어 순식간에 내 쪽으로 왔다.

    “르나르…! 책상은 뜀틀이 아니에요…!”

    하지만 나는 그 이상 르나르를 나무라지 못했다.

    이미 입술이 그에게 삼켜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르나르의 입술이 닿는 순간부터 한껏 활기를 띤 마력이 온몸을 빠르게 순환하기 시작했다.

    맨솔 비누로 손을 닦는 것 같은 그 느낌을 나는 참 좋아했다.

    “고마워요. 이제 힘내서 일할 수 있겠어요.”

    “…여기서 멈추시려고요? 누구 마음대로?”

    르나르가 내가 앉은 의자를 그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저 키스 말고 다른 것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다른 것이요?”

    조용히 고민하던 내 얼굴이 점점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결혼까지 하겠다고 했으니 나도 아예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결혼한 우리가 뭘 하게 될지.

    “대공녀님, 왜 그러세요? 무슨 생각을 하길래 얼굴이 붉어지셨어요?”

    내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 같은 르나르가 얄밉게 웃으며 빙글거렸다.

    그러면서 내 귀를 만지작거리는 르나르 때문에 나는 어쩐지 더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참, 그나저나. 저희 신혼여행은 어디로 갑니까?”

    내가 붉어진 얼굴을 그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요리조리 얼굴을 돌리데, 르나르가 그런 내 얼굴을 야무지게 붙들어 쥐어 멈추게 하며 물었다.

    마주한 그의 눈은 기대감을 잔뜩 품고 있었다.

    “신혼여행이요? 아, 그건….”

    모르겠다.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다.

    ‘결혼하면 그러고 보니 신혼여행도 가야지, 참?’

    “제가 몇 군데 생각해 봤는데요.”

    다시 책상을 넘어간 르나르가 보고 있던 카탈로그 사이에서 팸플릿 몇 개를 꺼냈다.

    저게 왜 저기서 나오지?

    준비성이 철저한 남자였다.

    “초대 플루토나 제국 황제와 황후가 사랑을 꽃피운 도시 ‘칼룬드’는 어떠십니까? 황제와 황후가 이곳에서 처음 만나 뜨거운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는데요, 그 시절에 정략결혼을 다 물리치고 연애결혼을 했다고 하니 알만 하죠. 고풍스러운 건축물에 대비되는 화려한 정취가 특징이라고 합니다.”

    르나르가 여행사 가이드처럼 플루토나 제국의 도시를 내게 설명했다.

    “‘칼룬드’가 싫으시면 ‘펠린’은 어떠십니까? 여긴 절벽을 따라 마을이 형성된 게 특징인데, 특히 야경이 아주 기가 막힌다고 하네요.”

    “‘펠린’이면 해안 마을 맞죠? 여기쯤 있는?”

    내가 책상 한쪽 구석에 펼쳐놓았던 지도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물었다.

    “맞습니다.”

    르나르가 답했다.

    “기왕 바다가 있는 쪽으로 가려면 루즈벨트 공작 저택이 있는 ‘멜로소’ 지역은 어때요? 그곳도 해안을 낀 남부 지역이잖아요. 남부 지역 바다가 에메랄드빛으로 참 아름답다고 하던데…. 북부의 ‘칼룬드’나 서부의 ‘펠린’에 비해 수도인 이곳에서 더 가깝기도 하고요.”

    “아, ‘멜로소’….”

    갑작스러운 내 제안에 르나르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루즈벨트 공작령에 속했던 도시들은 모두 프릭 후작가에서 무단 점거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프릭 후작가는 지금 저희의 회유에 응하지 않고 있는 유일한 귀족 가문이기도 하고요. 루즈벨트 공작가가 재건되면 그동안 본 반사 이득을 모두 포기해야 하는 게 그쪽이니….”

    “어차피 오래 저항하진 못할 거예요. 국가사업에 잘못 손댔다 가문 전체가 재정적으로 어려워졌단 얘기를 들었거든요.”

    “미르엣 대공자님께 들은 내용인데 프릭 후작이 터넛 황제와 연이 있다고 합니다. 터넛 황제의 개가 주인 역할을 하는 그 지역에 대공녀님을 모실 수는 없습니다.”

    “그 땅의 원래 주인은 르나르여야 했닪아요. 르나르가 다시 주인이 되어야 할 땅이에요. 미리 보고 오는 것도 나쁘지 않죠.”

    “하지만….”

    “계속 그렇게 반대하는 건 꼭 프릭 후작이나 터넛 황제 때문만은 아닌 거죠? 뭐 때문이에요, 르나르? 말해 봐요. 나에겐 솔직하기로 했잖아요.”

    그가 이상하단 것을 눈치챈 내가 르나르에게 다가가 그의 새끼손가락을 꼭 잡으며 말했다.

    그런 내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르나르가 피식 웃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사실 루즈벨트 공작 저택은…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상태입니다. 코웰 공작 저택과 비교하면 유령의 집이 따로 없을 거예요. 대공녀님께 처음 보여드리는 제 과거가… 그런 모습인 게 싫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르나르는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르나르, 나는 현재의 르나르를 사랑하지만, 과거의 르나르도 사랑할 거예요. 그리고 현재의 르나르가 어떤 모습이어도 사랑할 것처럼, 나는 과거의 르나르가 어떤 모습이어도 사랑할 거고요. 나에겐 아무것도 꾸미지 말고, 거짓을 보여주려 하지도 말아요. 그러라고 내가 르나르와 결혼하려는 거니까.”

    “대공녀님….”

    “네, 르나르.”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정말.”

    “나도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요, 르나르.”

    “아뇨, 제가 더. 분명히 제가 더 사랑합니다.”

    달콤한 고백과 함께 내 입술을 먹기 시작한 르나르는 한동안 날 놓아주지 않았다.

    그가 나를 눕힌 내 집무실 소파와 책상 위가 엉망이 될 때까지.

    그러고도 놓아주지 않는 그 때문에 나는 꽤 오랫동안 아무런 일도 할 수가 없었다.

    그 후 시간은 빠르게 흘러 결혼식 당일이 됐다.

    결혼식 바로 전날까지도 나는 서류 더미 속에 파묻혀 있었어야 했고, 결혼식을 올릴 교회 성당을 내가 정한 걸 제외하면, 다른 모든 결혼식 준비는 르나르가 맡았다.

    심지어 내가 입을 웨딩드레스를 고르는 일까지도.

    “아가씨도 정말… 웨딩드레스를 결혼식 당일에 처음 보는 신부가 세상에 어디 있어요?!”

    “여기 있네.”

    “아가씨께서 드레스를 미리 보질 않으시니, 저까지 아가씨 웨딩드레스를 아가씨 결혼식 당일에야 겨우 보게 되었잖아요…!”

    내게 드레스를 입혀주던 안나가 억울한 듯 툴툴댔다.

    “미안해, 안나. 사실 르나르가 골라주는 드레스를 입고 싶었는데, 혹시 내 마음에 들지 않을까 봐 걱정됐어.”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아도 바꾸실 수도 없게 결혼식 당일에야 드레스를 보신 거예요?”

    “응.”

    그가 예전에 내게 선물한 퍼플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생각하면 심히 바꾸고 싶을 것 같았기에.

    “그래도 다행히 바꾸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으시겠어요. 정말 아름다워요, 아가씨. 긴 팔 드레스가 이렇게 잘 어울릴 수도 있다니….”

    다행히 이번에 르나르가 고른 드레스는 내가 보기에도 아름다웠다.

    “아가씨가 드레스 덕을 보는 건지, 드레스가 아가씨 덕을 보는 건지.”

    멀찍이 서서 날 보던 안나가 눈물을 그렁그렁 단 채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드레스를 입은 거울 속 나를 봤다.

    르나르가 골라준 웨딩드레스는 어깨 부분이 약간 봉긋한 긴 팔 드레스였다.

    긴 팔이었지만 팔 부분이 레이스라 속이 비쳐 답답해 보이진 않았고, 벨 라인으로 퍼지는 치마엔, 빛나는 은색 보석들이 은하수 속 별들처럼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수놓아져 있었다.

    가슴 위쪽 라인으로는 작은 흰 꽃들이 빼곡하게 장식되어 있었는데, 은색 보석들과의 어우러짐이 참 예뻤다.

    “드레스에 보석이 참 많네. 이게 다 뭐지?”

    “제가 알기론 실버 다이아몬드일 걸요?”

    “뭐, 다이아몬드? 이게 전부 다이아몬드라고?!”

    예식을 간단히 치르기로 하면서 아쉬워했던 르나르가 드레스로 사치를 벌인 걸까?

    내가 입은 드레스 한 벌이 도대체 얼마일지 나는 상상조차 하기가 어려웠다.

    “거의 다 끝나셨어요. 이것만 고정하면 돼요.”

    안나가 내 머리 위로 베일이 연결된, 흰 꽃으로 장식된 티아라를 올려주며 말했다.

    티아라까지 착용하고 나자 거울 속 내 모습은 겨울의 신부 그 자체였다.

    ‘이 세계에서 결혼까지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었는데….’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뭐라 정의 내리기 어려운 따스한 감정이 뭉근하게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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