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략남이 훅 들어왔어-86화 (86/100)
  • 86화

    마지막 계략

    새파란 새벽하늘에 동이 터올 무렵 나의 감정 상태는 복잡했다.

    오빠들의 뒷담화를 듣게 된 르나르에게 미안한 감정 반, 침실에 오지 않은 르나르에게 서운한 감정 반.

    ‘결혼하고도 싸우면 집에 안 들어올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결국 새하얀 아침 햇살이 세상을 가득 채울 때까지 르나르를 볼 수 없었던 난 다시 정원으로 향했다.

    복잡한 머릿속을 비우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곳에 르나르가 있었다.

    그는 세상과 단절된 것 같은 분위기로 그곳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르나르, 밤새 어디 있었던 거예요! 걱정했잖아요!”

    급하게 르나르에게 달려간 내가 벤치의 르나르 옆 빈자리에 앉았다.

    르나르는 나를 흘긋 보고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한껏 가라앉은 표정이었다.

    우울한 얼굴이었다.

    한동안 의욕적이었고 밝았던 르나르가 그런 분위기였으니 나는 더 신경이 쓰였다.

    밤새 르나르에게 서운했던 것도 잊게 된 것이었다.

    “르나르, 혹시 화났어요?”

    풀어줘야지 하는 생각에 내가 르나르에게 물었다.

    “아뇨, 안 났습니다.”

    여전히 어두운 얼굴로 르나르가 답했다.

    “음… 제가 보기엔 난 것 같은데….”

    “잘못 보셨습니다.”

    “화가 난 게 아니면 속상한 걸까요? 괜찮으면 입 맞춰 줄래요? 나 어제 르나르 기다리다 한숨도 못 자서 지금 엄청 피곤한데…….”

    잘하지 못하는 애교까지 조금 섞어 가며 내가 가만히 르나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르나르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는 이내 나를 슬쩍 밀어내더니 다시 책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책을 봐야 해서요.”

    “…….”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잠시만… 아주 잠깐이면 되는데.”

    “죄송합니다.”

    당황한 내가 눈만 깜빡였다.

    머릿속이 멍해졌다.

    나는 르나르에게 거부당한 것이었다.

    ‘결혼하면 손도 안 잡아주고. 안아주지도 않고. 입맞춤도 안 해주고….’

    내 머릿속에 자꾸 부정적인 생각들이 떠올랐다.

    현실 세계에서 결혼 생활과 관련된 인터넷 게시물들을 가끔 접했던 게 문제인 듯했다.

    그런데 그게 작은 문제는 아니었다. 이후 나는 계속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어야만 했으니까.

    그때 더글라스가 은근슬쩍 다가와 혼자인 내게 말을 건넸다.

    “황자님과 잘 풀리지 않은 것이세요?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더글라스를 보고 있자니 나는 괜스레 화가 났다.

    르나르가 떠올라서.

    “저 상처받았어요.”

    “상처받으셨다고요? 그게 무슨….”

    “…….”

    “아이고 우리 황자님, 큰일 나셨네. 그러니까 머리 쓰지 마시라니까.”

    그런데 더글라스가 별안간 이상한 소리를 했다.

    “…머리요?”

    내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묻자 더글라스가 급하게 손을 들어 자기 입을 막았다.

    왜인지 조금 어색하게 보이는 놀란 표정으로.

    * * *

    맑은 어둠이 깔린 달 밝은 밤이었다.

    탁- 탁- 탁- 탁-

    빠르게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이내 침실 문이 벌컥 열리며 르나르가 들이닥쳤다.

    “대공녀님, 아프시다면서요. 어디가 아프세요!”

    안나를 통해 얘길 들었을 르나르가 빠르게 침대까지 다가섰다.

    이미 더글라스를 통해 모든 설명을 들은 내가 르나르를 보며 옅게 웃었다.

    오늘 낮 더글라스의 설명은 이랬다.

    처음엔 이용하려 내게 접근한 게 맞았기에, 르나르는 사실 오빠들의 뒷담화에 별다른 상처를 받지 않았다고 했다.

    그럼에도 우울한 척한 것은 연기라고 했다.

    침울한 그를 북돋워 주려 내가 결혼을 서둘러줄까 봐.

    ‘다시는 거짓말하지 않기로 내게 약속해 놓고.’

    계략을 쓰는 것도 거짓말하는 것과 진배없는데.

    르나르는 그걸 몰랐던 걸까?

    나는 이참에 툭하면 거짓말하고 계략을 쓰는 르나르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게 됐다.

    예전에 신의 손으로 만든 마카롱 때문에 한 적 있는 가짜 아픈 척.

    다행히 우울한 척하던 르나르는 내가 아프단 소리엔 계략을 잊고 달려온 듯했다.

    “르나르… 나 아파요….”

    내가 르나르에게 팔을 뻗었다.

    헐레벌떡 침대 위로 올라온 르나르가 나를 끌어안았다.

    그러다 멈칫하며 고개를 숙여 내 잠옷을 봤다.

    이 계략을 위해 안나가 내게 입힌 잠옷이 조금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잠옷이… 평소보다 얇은데요…?”

    내가 르나르가 오기 전 흥분했던 안나를 떠올렸다.

    「아니, 아가씨의 입맞춤 요구를 거절하셨다고요?! 황자님께서요?! 아뇨, 아가씨. 오늘은 그 잠옷은 안 되세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입혀드릴 게 있으니까… 이걸 입으시면……! 황자님께서 절대 아가씨의 입맞춤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실 거라고요. 두고 보세요……!」

    “르나르, 나 아파요… 입 맞춰 줄래요…?”

    과연 안나에게 통찰력이 있었던지 르나르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조급하게 입을 맞추려 했다.

    내가 그 순간 손으로 입술을 가렸다.

    “…대공녀님?”

    “생각해 보니 안 되겠네요. 르나르는 나한테 입 맞추는 걸 싫어하는데… 내가 아프다고 억지로 요구할 수는 없는 거겠죠.”

    “…제가 싫어한다고요? 대공녀님께 입 맞추는걸요?”

    “싫어하는 거 아니에요? 아까 정원에서의 일… 생각나지 않아요?”

    슬픈 연기를 하는 내게 르나르가 당황한 얼굴을 보였다.

    “그건, 대공녀님. 그건 그러니까….”

    “혹시 나와의 입맞춤이 싫은 게 아니라면 그냥 내가 싫어진 걸까요? 정말 그런 걸까요, 르나르? 우리 결혼은 없던 일로 하는 게 좋을까요?”

    “비약입니다!”

    르나르가 득달같이 소리쳤다.

    “그건 절대… 안 될 말씀이십니다….”

    “그렇다면 이해가 잘 안 돼요. 아침의 일을 생각하면 르나르는 나와의 입맞춤을 싫어하는 게 분명한데… 르나르가 싫지 않은 걸 싫은 척했을 리도 없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내 질문에 르나르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작게 웃고는 내게 물었다.

    “왠지 이미 다 알고 계신 것 같은데. 아니십니까?”

    내가 마주 웃었다.

    그러곤 조금 엄해 보일 표정을 걸고는 타이르는 말투로 르나르에게 말했다.

    “르나르. 내게 거짓말하지 않기로 약속했잖아요.”

    “거짓말을 한 건 아니고… 정확히 말하자면 계략을 쓴 겁니다.”

    “제가 보기엔 그게 그거예요. 르나르가 계략 쓰는 걸 제가 별로 안 좋아한다는 건 르나르도 알고 있는 사실 아니었어요?”

    “그건 맞습니다만… 그렇지만 저도 억울합니다, 대공녀님. 세상엔 계략 없이 순수한 노력만으론 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저도 아버님과 형님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꽤 애써 노력했지만, 아버님과 형님들은커녕 대공녀님마저도 제 노력을 몰라주시고….”

    르나르가 버려진 강아지의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내 측은지심을 자극했다.

    그리고 나는 또 르나르에게 미안해졌다.

    내가 그의 노력을 몰라줬단 사실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미안…… 미안해요, 르나르.”

    “대공녀님의 사과를 바라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 아닙니다.”

    “아뇨, 들어줘요. 진심이에요.”

    “…….”

    “르나르를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부터 사실 나는… 르나르가 계략을 쓰지 않길 바랐었어요. 계략 없인 살아남기 힘든 환경이었던 걸 알게 됐는데, 그래서 계략을 쓰는 것에 익숙해진 것 같아 마음이 아파서… 근데 그게 싫었던 내가 계략을 쓸 수밖에 없었을 정도로 르나르를 몰아붙였다니. 내가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나도 이제 같이 노력할게요.”

    “…같이 노력이요? 대공녀님 그 말씀은 혹시….”

    “같이 해요, 노력. 결혼을 빨리할 수 있게. 저도 온갖 정성을 쏟을게요.”

    “그게 정말이십니까?!”

    되묻는 르나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미안한 마음에 내가 얼른 그를 안았다.

    * * *

    품에 안긴 엘로즈를 마주 안는 르나르의 머릿속에 엘로즈의 방금 말을 끌어내기 위한 그동안의 노력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도련님께서 계략 쓰시는 거 대공녀님께서 별로 안 좋아하신다고요.」

    「그래, 바로 그거. 엘로즈는 내가 계략 쓰는 걸 싫어해. 그런데 내가 또 계략을 쓰면, 그녀 성격에 계략을 안 써도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할 거야.」

    「그 말인, 즉… 대공녀님을 노력하게 만들려고 일부러 계략을 쓰겠단 말씀이세요…?”」

    「바로 그거지. 그리고 엘로즈가 노력하면, 그 결혼은 성사될 수밖에 없을 거야. 결국엔 엘로즈를 이길 수 없는 코웰 가문 남자들이니.」

    「계략을 써서 들키는 게 계략이라… 계략 속 계략이네요. 근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혹시라도 대공녀님께서 진실을 알게 되시면 많이 서운해하실 것 같은데….」

    「그래서 이번만큼은 절대 안 들키려고 해.」

    「그게 더 나쁜 것 같아요.」

    「어차피 엘로즈 아니면 이제 계략을 쓸 일도 없어. 나쁜 놈들은 머리 쓸 것 없이 몸으로 쓸어버리면 되니.」

    「그럼 이게 도련님의 마지막 계략이 되는 건가요?」

    「응. 내 마지막 계략. 목표는 내 사랑하는 이와의 결혼이야.」

    그 이후 르나르가 문을 고장 낸 방에 더글라스가 코웰 형제들을 불러모은 것도, 더글라스가 르나르의 거짓 계략을 엘로즈에게 일러바친 것도 모두 르나르의 계략의 일부였다.

    ‘그걸 위해 얼마나 어르고 달래야 했던지….’

    못하겠다고 떼를 쓰는 더글라스 때문에 결국 더글라스와 안나의 신혼살림까지 책임지기로 한 르나르가 왠지 사기당한 것 같단 생각에 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 소리를 들은 엘로즈가 르나르 품에서 얼굴을 들었다.

    “왜요, 르나르? 갑자기 웬 한숨이에요?”

    무구하게 묻는 엘로즈의 목소리에 르나르는 회상에서 깨어났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르나르가 엘로즈를 내려다보며 방긋 웃었다.

    계략이란 쓸 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르나르 입으로 다시 말해줘요.”

    “제 입으로요? 뭘요?”

    “앞으론 계략을 쓰지 않겠다고. 제가 기억할 수 있도록요.”

    “저는 앞으로 계략을 쓰지 않겠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무언가 바라는 게 있다고 거짓 감정을 꾸며내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공녀님, 당신을 속이지 않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하는 제 말은 모두 진심일 겁니다.”

    진지하게 고백한 르나르가 눈을 반짝이는 엘로즈를 안아 그의 허벅지 위에 앉혔다.

    그러곤 그녀에게 은근슬쩍 물었다.

    “그나저나 대공녀님 아프신 건… 빨리 나으셔야죠.”

    “아뇨, 괜찮아요. 그건. 내가 르나르를 일부러 속인….”

    엘로즈는 하려던 말을 끝낼 수 없었다.

    이미 알던 진실을 듣지 않으려는 르나르가 그녀의 입술을 삼켜버렸기 때문이었다.

    르나르는 거기서 멈추지 못했다.

    순간 이성을 잃은 르나르에 의해 조금 찢어지던 엘로즈의 실크 잠옷은, 짐승은 되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마지막 인내심을 끌어모은 그로 인해 다행히 제 모양을 유지하게 됐다.

    표정이 정돈되지 못한 르나르가 엘로즈에게서 입술을 뗀 뒤 거친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저희 빨리 결혼해야 합니다. 저 이제 더 이상은 정말 못 참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