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뒷담화
플루토나 황성을 점령한 지 며칠 후.
플루토나 제국의 주요 귀족 가문을 만나러 간 대공과 레오, 미르엣이 돌아왔다.
한자리에 모인 대공과 형제들을 만나러 가는 길.
르나르의 표정이 밝았다.
평소에도 어두운 표정은 아니었지만 도저히 묻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을 정도로.
“…르나르,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생각해 봤는데, 저 대공녀님과 좀 더 빨리 결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요? 어떻게요?”
“대공녀님께선 가만히 지켜보시기만 하면 됩니다.”
르나르가 자신 있다는 듯 눈을 휘어 웃었다.
도톰하게 올라오는 그의 애교살을 보고 예쁘다고 생각하던 내가 이내 얼굴에 물음표를 달고 고개를 기울였다.
* * *
대공과 코웰 형제들이 임시 회의실로 사용 중인 황제의 집무실.
“반란으로 혼란스러운 현 제국을 좀 더 빠르게 안정시킬 방법을 찾았습니다.”
가만히 대공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르나르가 별안간 입을 열었다.
“그게 뭔가.”
후작 가문 하나의 예상치 못한 저항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코웰 대공이 반색하며 물었다.
싱긋 웃은 르나르가 말을 이었다.
“제 출신을 이용하는 겁니다. 제 어머니는 플루토나 제국의 건국 공신 가문이자 제국민의 많은 사랑을 받은 루즈벨트 가의 공녀시니, 그런 어머니 아들인 제가 코웰 가문의 플루토나 제국 통치를 지지한단 걸 알면 플루토나 제국민들도 이 반란이 그레이시아나 제국민끼리의 싸움이란 시각에서 벗어나게 될 겁니다.
그건 대공께서 플루토나 제국민이 아니란 이유로 항거 중인 프릭 후작가에 큰 압박이 되겠죠.”
“흠. 그렇겠군.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대공이 보일 듯 말 듯 미소 지었다.
괜찮은 생각으로 여기는지 겔리온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르나르가 그다음 덧붙인 말이 대공을 멈칫하게 했다.
“현 상황이 빨리 마무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저와 로즈가 빨리 식을 치를 수 있을 테니까요.”
“……식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난데없는 르나르 말에 에드워드 코웰 대공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르나르는 여유로웠다.
“아. 모르셨군요, 각하. 따님께서 제게 청혼하셨습니다.”
싱긋.
르나르가 웃었다.
흔들리는 벽안 다섯 쌍이 모두 내 쪽을 향했다.
그런데 쓰러진 르나르에게 일어나면 결혼하자고 내가 말하긴 했지만, 엄밀히 따지면 청혼은 르나르가 먼저 한 게 아니었던가?
조금 억울해진 내가 노려보니 르나르가 다시 싱긋 웃으며 내게 윙크했다.
‘저 여우.’
잘생기면 다인 건가?
그래, 내가 생각해도 다인 것 같다.
“로즈는 결혼하기엔 아직 어려.”
코웰 대공의 말이었다.
오빠들도 대공의 말에 공감하는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르나르가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로즈가 제게 청혼을….”
내가 청혼했다고 하면 대공과 오빠들이 마냥 그의 편이 되어줄 것으로 알았던 걸까?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는 르나르였다.
‘하긴.’
내 목숨을 두 번이나 구했으니 쉽게 허락을 얻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에 대한 대공과 오빠들의 집착도 확실히 정상은 아니었으니.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얘기하지. 지금은 혼란스러운 제국을 안정시키는 게 먼저이니.”
대공이 급하게 결혼에 관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제국을 안정시키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포기하지 않은 르나르가 물었다.
“글쎄… 그래도 3, 4년은 지나야 하지 않을까?”
겔리온이 내가 어림짐작으로 말한 시간보다 긴 시간을 제시했다.
“3…… 3, 4년이요……?”
겔리온의 말을 들은 르나르는 절망스러워 보였다.
대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하네, 황자. 지금 당장 처리해야 하는 다른 일이 생각났어.”
누가 봐도 변명이었다.
“아빠, 그래도 마시던 차라도 마저 드시고…!”
순식간에 시무룩해진 르나르가 신경 쓰였던 내가 대공을 불렀다.
하지만 대공은 잠시 멈춰 뒤돌아 슬쩍 웃어주기만 했을 뿐, 다시 우리 쪽으로 걸음을 돌리지는 않았다.
르나르는 이제 비 맞은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까 많이 기대한 것 같던데….’
평소보다 표정이 밝았던 황성 복도에서의 르나르를 내가 떠올렸다.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르나르. 아버지께서 제가 결혼하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보셔서 저러시는 거예요. 갑작스러워서. 르나르가 싫어서 저러시는 건 분명 아니에요.”
살살 달래자 르나르가 쓰게 웃었다.
“그럼요. 절 싫어해서 저런 반응을 보이시는 건 분명… 아니실 것으로 저도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르나르의 얼굴엔 서운함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나는 르나르가 안쓰러워졌다.
‘우리 가족이 너무한 게 아닐까? 르나르가 황성 점령에서만 해도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데.’
그런 생각을 절로 하게 될 정도로.
낮고 긴 한숨을 내쉰 르나르가 슬픔을 감추려는 듯 큰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런데 그 사이로 올라간 르나르의 입꼬리가 보이는 것 같은 건 내 착각인 걸까?
그 후 난 황성 이곳저곳에서 코웰 대공과 르나르가 같이 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게 됐다.
정확히는 르나르가 대공을 일방적으로 따라다니고 있었지만.
“각하, 로즈와 제 결혼 말입니다.”
“각하, 로즈와 제 결혼식에 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님!”
며칠간의 감상으론 집착도 그런 집착이 따로 없었다.
그리고 그 집착은 비단 대공에게만 국한되지도 않았다.
“형님들, 제가 제국을 빠르게 안정시킬 다른 방안을 생각해 봤습니다만.”
르나르는 오빠들을 붙잡고 매일 같이 브리핑하려 했다.
제국의 안정으로 시작해 나와의 결혼으로 끝나는 내용을.
그 결과 에드워드 코웰 대공은 사교계를 주름잡는데 일가견 있는 미르엣을 데리고 플루토나 귀족들을 만난다며 밖으로 돌기 시작했고, 겔리온은 집무실에, 레오는 기사들과 대련하는 연무장에 각각 틀어박혔다.
에반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대공과 오빠들은 해야 하는 일을 하러 가는 것일 뿐이라 했지만….’
내가 보기엔 아니었다.
그들이 몰두하는 일 중엔 필요 이상인 일도 있었고 시기상조인 일도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얼굴을 보기 어렵게 된 오빠들이 한곳에 모인 모습을 보게 된 건 보름달이 무척 밝았던 초겨울의 어느 밤이었다.
나는 정책 구상 마무리를 위한 참고 서적을 찾기 위해 요즘 자주 찾는 서궁 서재로 향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달빛이 스며드는 긴 복도를 지나던 길.
불빛이 흘러나오는 열린 방 문틈에서 코웰 형제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열린 방문을 닫아주려는데 들려오는 겔리온의 목소리가 날 멈칫하게 했다.
“난 그냥 우리 로즈 결혼 안 시켰으면 좋겠어. 평생 우리가 데리고 살자. 어떻게 로즈를 다른 놈한테 보내.”
르나르가 들으면 또 서운해질 만한 이야기였다.
‘요즘 오빠들을 설득하려고 부단히 애쓰는 것 같던데….’
뒤이어 더글라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더글라스도 함께 있는 줄은 몰랐는데.
“그렇지만 대공녀님께서도 저희 도련님과의 결혼을 원하실 것 같긴 합니다. 저희 황자님과 함께 계실 때 대공녀님, 무척 행복해 보이셨거든요.”
맞는 말이네 싶었던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르나르와 함께 있으면 난 정말 행복하니까.
그런데 에반이 그런 더글라스의 말에 딴지를 걸었다.
“엘로즈가 행복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난 그놈을, 아니, 황자를 믿을 수 없어. 황자는 마치 남색가인 것으로 행동해 나를 속였으니까…!”
르나르가 나와의 결혼 얘기를 하고 다닌 뒤로 르나르가 남색가가 아니었단 걸 알게 된 에반이었다.
“이미 날 속인 적 있는 사람을 내가 어떻게 신뢰할 수가 있겠어?!”
‘그건 에반이 나와 르나르가 함께 있는 걸 마음에 안 들어 했으니까. 그리고 르나르를 마음에 안 들어 했으니까.’
내가 나도 모르게 르나르의 편을 들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뒤이어 미르엣이 한 말엔 반박할 내용을 생각해낼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나에게 접근해 나와 지인이 된 것도 처음부터 의도가 있던 것 같아. 황자의 어머니 가문이 터넛 황제 때문에 멸문됐단 얘길 아버질 통해 들었어. 그렇다면 그런 거 아니야? 황제에게 할 복수에 날 통해 우리 가문을 이용하려 했던 것. 그러다 엘로즈를 이용하려 방향을 바꿨다가 사랑에 빠진 거고. 내 말이 틀려?”
너무 정확한 분석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나와 같은 느낌을 받은 건지 더글라스가 침묵을 유지했다.
‘아니, 더글라스. 아무리 맞는 말이라도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어떡해. 어떻게든 르나르 편을 들어줘야지.’
어느새 방 안의 상황에 몰두한 내가 전전긍긍하며 생각했다.
그 순간 미르엣이 못 박았다.
“나는 그렇게 속이 음흉한 놈에겐 우리 로즈 못 맡겨.”
그때 내 뒤에서 작은 침음이 들렸다.
뒤돌아본 나는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르… 르나르…?”
내 목소리가 흘러 들어간 방 안이 조용해졌다.
“르나르, 오빠들 말은 나쁜 말이 아니라… 아니, 그게 그러니까….”
“아닙니다, 대공녀님. 없는 말, 하신 것들도 아니신데요, 뭘.”
얼굴에 표정이 없는 르나르가 내게서 등을 돌린 뒤 뚜벅뚜벅 걸어갔다.
당황한 내가 어쩔 줄 몰라 하다 따라가며 그를 불렀다.
“르나르!”
하지만 르나르는 그런 내 부름에 반응하지 않은 채 정원 쪽을 향해 빠르게 사라졌다.
“잠시만요, 르나르! 나와 얘기 좀 해요!”
내가 정원으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디뎠다.
하지만 정원에 르나르는 없었다.
“뭐야… 분명 이쪽으로 나갔는데…?”
르나르가 사라진 곳을 알지 못했던 나는 어쩔 수 없이 침실로 돌아가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르나르가 여전히 회복 중의 상태였기에 요즘 계속 같이 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뜬눈으로 밤새 기다렸음에도.
르나르는 결국 침실에 나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