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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84화 (84/100)
  • 84화

    어떻게 하길 바라지?

    다음 순간 눈을 떴을 때 르나르가 보게 된 것은 어둠에 묻힌 침대 천장이었다.

    ‘엘로즈는?!’

    화들짝 놀란 르나르가 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침대 발치에 엎드린 채 잠들어 있었다.

    르나르가 깨어나는 것을 기다리다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르나르가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하얬다.

    발코니로 나가는 문 양쪽에 버티고 선 음각된 대리석 기둥이 흰색.

    벽도 흰색, 천장도 흰색, 바닥도 흰색.

    그나마 색이 있는 것은 금으로 만들어진 침대 천장을 받치는 기둥뿐이었다.

    ‘이곳은 천국인 걸까?’

    르나르가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뻗어 잠든 엘로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르나르의 손길을 느낀 엘로즈가 잠에서 깼다.

    “으음…. 르나…, 르나르?! 깨어난 거예요?! 괜찮아요?! 어디 아픈 데는 없어요?!”

    눈이 동그래진 엘로즈가 르나르에게 달려들어 이리저리 살펴보며 포탄 같은 질문들을 쏟아냈다.

    가볍게 웃은 르나르가 엘로즈의 손목을 낚아챈 뒤 침대 위로 눕혔다.

    엘로즈는 금방 르나르 아래 깔린 모습이 됐다.

    “괜찮습니다. 해독제를 더 먹은 상태라는 걸 대공녀님께 묻지 않아도 알겠네요. 반역은요? 어떻게 됐습니까? 성문이 열리는 것까지는 제가 봤는데.”

    “성공했어요. 황성을 완전히 장악했고 터넛 황제가 꼭두각시로 세워놨던 황제는 지금 지하 감옥에 있어요. 영지를 가진 귀족 가문들은 반역 전부터 저항하지 않겠단 뜻을 밝혔었으니 크게 문제 될 거 없을 것 같고요.”

    “그럼 저희가 지금 있는 이 방은….”

    “외국 귀빈 접대용 숙소라고 하더라고요. 다른 방들은 기존 황족 분위기가 짙어서 정리가 필요하대요.”

    “외국 귀빈 접대용. 어쩐지 이불이 부드럽더라고요.”

    르나르가 장난스럽게 히죽 웃고는 엘로즈를 안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품 안의 그녀에게서 살짝 떨어져 그녀를 들여다보다가, 다시 그녀를 품에 넣었다.

    그러자 엘로즈가 르나르를 마주 안았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허리 아래로 반응이 생기는 것을 느낀 르나르가 물었다.

    “르나르 아프지 말라고요.”

    순박한 아이처럼 웃은 그녀가 답했다.

    “…….”

    르나르는 그 순간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잠시 후 르나르가 조심스럽게 엘로즈한테 물었다.

    “대공녀님.”

    “네, 르나르.”

    “저희는 어차피 결혼할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아닙니다.”

    엘로즈와의 사이에 이불을 낀 르나르가 엘로즈를 꽉 안았다.

    반역은 성공했다.

    목표했던 바가 얼마 남지 않았다.

    어차피 노력한 거, 르나르는 조금 더 인내심을 발휘해보기로 했다.

    “저희 결혼 언제 합니까? 최대한 빨리했으면 좋겠는데.”

    그 인내심이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 * *

    “그래서.”

    “……네? 황자님?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그래서. 내가 보낸 기사들은 전부 묶여 있었고, 대공녀는 놓쳤고, 플루토나 황성은 이미 코웰 가문이 점령했고. 그래서. 이중 내가 이해 못 한 게 있나?”

    “맞게 잘 이해하셨습니다. 그러니 부디 다른 명령을….”

    “다른 명령? 대체 무슨 명령을 내리라는 거지?!”

    올렌도가 연하늘색 눈동자를 날카롭게 치켜뜨며 책상을 내리치자 그에게 명령을 요구하던 기사가 움찔했다.

    “대공녀를 내 앞에 데려오라 했지만, 네놈들이 무능력해 그 명령도 수행하지 못했잖아. 플루토나 황성을 재점령하라고 명령 내리면 그건 할 수 있겠나? 대공녀도 데려오지 못한 너희들이?”

    엘로즈를 붙잡아 오라고 한 것은 올렌도의 마지막 미련이었다.

    그렇게 데려온다고 엘로즈가 그를 좋아해 주지 않을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보낼 수만은 없던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의 기사단이 엘로즈를 데리고 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

    엘로즈는 르나르가 지키고 있을 것이었기 때문에.

    “난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다른 명령은 없어. 이만 물러나 봐.”

    책상이 내려쳐지는 소리에 놀란 토끼를 올렌도가 쓰다듬어 달래며 말했다.

    토끼가 피신하듯 올렌도의 품을 파고들었다.

    슬픈 눈을 한 올렌도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퍼졌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올렌도의 기사가 불현듯 생각난 듯 말을 덧붙였다.

    “아, 그리고 황자님. 코웰 저택을 뒤지던 중 지하 감옥에서 케이시 양을 발견했습니다.”

    “…케이시? 케이시가 왜 코웰 저택 지하 감옥에 있던 거지?”

    “그것까지는 저희도 잘….”

    “케이시는 지금 어디 있나.”

    “아직 코웰 저택 지하 감옥에 있습니다.”

    기사의 대답에 올렌도의 표정이 골똘해졌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는 집무실 책상 서랍을 열며 기사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케이시를 황궁으로 데리고 와.”

    “네, 황자님.”

    서랍을 닫은 올렌도의 손엔 마법 전서조 종이가 들려있었다.

    * * *

    분명 아침인 듯한데 감은 눈꺼풀 위로 어두움이 어른거렸다.

    의아하게 느낀 르나르가 미간을 찌푸리며 눈꺼풀을 들고 보니 그의 얼굴 위를 웬 새 한 마리가 낮게 날며 돌고 있었다.

    새의 날개 아래엔 문신처럼 르나르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마법 전서조였다.

    새를 한 손으로 잡은 르나르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밤새 품에 안고 잔 엘로즈를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누인 뒤 붙잡은 새를 들고 발코니로 나갔다.

    얌전히 붙잡혀 있던 새는 르나르가 머리를 쓰다듬자 편지로 변했다.

    편지는 짧았다.

    [코웰 저택 지하 감옥에서 빨간 머리 발견. 내가 이 여자를 어떻게 하길 바라지?]

    올렌도의 글씨체를 알아본 르나르의 머리가 기울어졌다.

    무엇을 바라고 이런 편지를 보낸 걸까.

    하지만 편지 수신인이 엘로즈가 아닌 르나르였다면 원하는 답장은 뻔했다.

    르나르가 받은 편지 아래 짤막한 답장을 적었다.

    [그 여자. 엘로즈를 죽이려고 함. 네 마음대로 해.]

    불이 필요해져 벽난로 쪽으로 다가가던 중 잠시 멈춘 르나르가 엘로즈를 봤다.

    엘로즈는 피곤했는지 여전히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아침에 보는 외국 귀빈 접대용 숙소는 지난밤보다 더 하얗게 보였다.

    발코니로 나가는 문 양쪽에 버티고 선 음각된 대리석 기둥이 흰색.

    벽도 흰색, 천장도 흰색, 바닥도 흰색.

    르나르는 하얀 방안에 누운 하얀 엘로즈가 새삼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마치 밟지 않은 눈처럼.

    그의 것이란 자국을 꼭 남기고 싶게.

    그때, 르나르의 뜨거운 시선을 느낀 엘로즈가 문득 잠에서 깼다.

    절반쯤 아직 꿈속인 것 같은 엘로즈의 연보라색 눈동자가 멍하니 르나르를 봤다.

    “…왜 그렇게 보고 있어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닙니다. 아무 일도 없습니다.”

    대답한 르나르가 편지에 불을 붙였다.

    마법 전서조 종이가 새가 되어 날아갔다.

    “…방금 뭐가 날아간 거 같은데?”

    “복수를 향한 제 미련이 날아갔습니다. 전 대공녀님만 있으면 될 것 같거든요.”

    르나르가 유혹하는 목소리로 침대 위로 올라간 뒤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엘로즈를 들어 품에 안으니 아직 잠이 다 깨지 않은 엘로즈가 피식 웃으며 르나르의 품에 머리를 비볐다.

    엘로즈를 옆으로 눕힌 르나르가 그녀의 귓가에다 대고 속삭였다.

    “그나저나 저희 결혼은 언제 합니까?”

    “…글쎄요. 이곳 플루토나 제국 상황이 안정되고 나면요?”

    “그게 얼마나 걸릴까요?”

    “적어도… 1, 2년…?”

    엘로즈가 달 수를 계산하는지 손가락을 여러 개 접어보며 말했다.

    “1…1, 2년이요?!”

    엘로즈의 이성적인 답변에 르나르가 경악했다.

    * * *

    “황자님, 거기서 뭐 하세요? 왜 혼자 불을 멍하니 보고 계세요?”

    더글라스가 벽난로 안 춤추는 불꽃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르나르에게 물었다.

    코웰 형제들을 만나러 간 엘로즈는 방에 없었다.

    “생각 중.”

    “무슨 생각이요?”

    “결혼할 생각.”

    그렇게 말한 르나르가 고개를 휙 돌려 더글라스를 봤다.

    그러곤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1, 2년은 도저히 못 기다려.”

    꽤 사나운 그의 기세에 더글라스가 괜히 움찔했다.

    “1, 2년이요? 대공녀님께서 1, 2년 후에 결혼하자고 하신 겁니까?”

    금세 처연한 표정이 된 르나르가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요? 지금 황자님과 결혼하시기엔 확신이 안 드신대요?”

    다시 표정이 바뀐 르나르가 더글라스를 노려봤다.

    “그런 건 아니고. 일단 플루토나 제국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아. 그런 거라면 충분히 납득이 가네요. 기다리셔야겠습니다.”

    더글라스의 깔끔한 결론에 르나르의 표정이 구겨졌다.

    “넌 어떻게 그렇게 남의 일처럼 말할 수 있는 거지?”

    “정말 남의 일이니까요.”

    “내가 결혼하기 전까진 너와 안나도 결혼은 꿈도 못 꿀 줄 알아.”

    으르렁대는 르나르에 더글라스가 또 움찔했다.

    언제는 그와 엘로즈 둘만 잘 남겨주기만 하면 더글라스와 안나를 팍팍 밀어주겠다고 계약까지 하자고 해놓고.

    계약서를 써준다고 했을 때 썼어야 했다.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말을 잘 바꾸는 양아치 황자였으니.

    “그래도 괜찮습니다. 저와 안나 양은 당장 1, 2년 안에 결혼할 생각은 없었거든요.”

    “어떻게 결혼 생각이 없을 수가 있지? 넌 안나 양을 사랑하지 않아?”

    “사랑의 귀결이 꼭 결혼이어야 한다고 누가 그러던가요. 저희는 결혼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랑을 추구합니다만.”

    “아주 선구자 나셨군. 회귀라도 한 거야? 그런 사상이 인정받을 수 있으려면 몇 세기는 족히 지나야 할 것 같은데?”

    르나르가 비아냥거리는 말에 더글라스가 신경 쓰지 않는단 듯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네놈 사상은 존중해. 하지만 난 엘로즈와 빨리 결혼이 하고 싶어. 엘로즈가 내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선포하고 싶단 말이야.”

    “대공녀님과 결혼하신다고 대공녀님이 도련님 소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엘로즈는 지금도 내 거야.”

    저 남자는 이해시키지 못하겠구나.

    빠르게 포기한 더글라스가 르나르의 미간 사이를 꾹 눌렀다.

    “자꾸 얼굴 구기시면 여기 주름 생기셔요.”

    르나르가 귀찮다는 듯 그런 더글라스의 손을 쳐냈다.

    작게 한숨 쉰 더글라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아무리 황자님 얼굴이라도 그 나이에 주름 생기는 건 대공녀님도 별로 안 좋아하실 걸요?”

    이에 제 손가락으로 미간 사이를 누르는 르나르를 보며 더글라스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 상태의 르나르가 조용히 읊조렸다.

    “아무튼, 난 1, 2년씩은 못 기다려. 결혼도 하기 전에 말라 죽고 말걸.”

    “못 기다리시면 어쩌시게요.”

    “생각해봐야지.”

    “계략이라도 쓰실 생각이시면 애초에 관두세요. 황자님께서 계략 쓰시는 거 대공녀님께서 안 좋아하시잖아요. 대공녀님께는 계략 쓸 때마다 거의 다 들키기도 했고.”

    그때였다.

    르나르의 적갈색 눈동자가 반짝 빛난 건.

    “잠깐, 더글라스…. 너 방금 뭐라 그랬지?”

    “뭐가요? 대공녀님께는 계략 쓸 때마다 거의 다 들켰다고요?”

    “그거 말고. 그 전에.”

    “도련님께서 계략 쓰시는 거 대공녀님께서 별로 안 좋아하신다고요.”

    “그래, 바로 그거.”

    르나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씩 웃었다.

    안 좋은 예감이 든 더글라스가 몸을 휙 돌려 도망치려 했다.

    르나르가 그런 더글라스의 목덜미를 낚아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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