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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83화 (83/100)
  • 83화

    해 지기 전에

    “엘로즈 아가씨!! 르나르 황자님!!”

    기사단장 리암이 르나르와 나를 부르며 정원에 나타난 건 그때였다.

    깊은 입맞춤을 이어가던 르나르가 내게서 입술을 뗐다.

    “아, 이 중요한 순간에. 치워버려도 됩니까?”

    그 말을 하는 르나르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 사이 리암이 분수대 근처까지 달려왔다.

    “쓰러진 황궁 기사들을 묶어놓고 아가씨와 황자님을 찾았는데 계신 곳을 알 수가 없어 또 놀랄 뻔했습니다. 여기서 뭐 하고 계셨습니까?”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던 내가 어색하게 웃었다.

    리암의 시선이 내게서 르나르에게로 돌아갔다.

    그가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르나르를 살폈다.

    “황자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리암의 물음에 르나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르나르를 보는 리암의 회갈색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마치 5일째 아침 해 뜰 무렵 동쪽에서 간달프를 발견한 아르곤처럼.

    “황자님. 대공 각하와 도련님들께서 수도 알베인은 점령했지만, 황성을 아직 함락하지 못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리암.”

    내가 기사단장을 불렀다.

    ‘아무리 그래도 르나르는 방금까지 죽다 살아난 사람인데.’

    하지만 리암은 그런 내 부름을 애써 못 들은 척하고 말을 이었다.

    르나르가 싸우는 모습을 보고 그의 실력을 한눈에 알아본 모양이었다.

    “그레이시아나 제국군이 황성 앞에 배수진을 친 데다 그 성이 과거 요새로 쓰기 위해 지어진 곳이라 성문을 여는 일이 만만치 않은 모양입니다. 혹시 지금 바로 플루토나 제국 쪽으로 이동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내가 다시 리암을 부르려 하는데 르나르가 날 막았다.

    그러곤 몸을 일으켰다.

    “가야지. 원래 선두에 서기로 했었으니까.”

    그런데 일어서던 르나르가 별안간 작게 휘청거렸다.

    “괜찮아요, 르나르? 혹시 아직 많이 아픈 거예요?”

    아랫입술을 세게 문 르나르를 보며 내가 물었다.

    하지만 이내 르나르는 태연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공녀님 예비 남편은 약골이 아닙니다.”

    르나르가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곤 리암을 향해 말을 이었다.

    “다친 기사들은 주치의에게 맡기고 싸울 수 있는 기사들은 준비시켜. 재정비되는 대로 출발하지.”

    * * *

    리암이 기사단을 준비시키는 동안 남은 사람들도 떠날 준비를 했다.

    얼결에 함께 가게 된 릴리안이 갈아입은 갑옷을 이리저리 살펴보다 망설이는가 싶더니 별안간 내게 물었다.

    “저… 대공녀님. 그 흑발 남자분 정말 괜찮으실까요? 저는 괜찮은데 오히려 그 남자분이 걱정이에요. 중독된 독이 해독 과정에서 고통도 심하고 원래대로면 해독하는데 시간도 많이 소요되는 독이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마구 움직이셔도 괜찮을는지….”

    “괜찮아.”

    내가 뭐라 입을 열기도 전 문가에서 르나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턱에 팔짱을 끼고 기대서있던 르나르가 방안으로 들어섰다.

    릴리안 쪽을 보며 그가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난 멀쩡해. 보통 사람의 신체를 기준으로 날 판단하지 마.”

    “르나르. 좀 더 예의를 갖춰요. 당신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에요.”

    멈칫.

    내 타박에 내 쪽으로 걸어오던 르나르가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릴리안 쪽을 향해 허리를 숙이더니 우아한 말투로 말했다.

    “제 생명을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이디. 덕분에 목숨을 건졌군요.”

    “아뇨, 전 그저….”

    “전 한 여자에게만 예의 바른 편이지만 제 아내 될 사람이 이걸 원하는 것 같아서요.”

    “르나르…?”

    내가 원한 그림은 이게 아닌데.

    당황한 내가 릴리안을 봤지만 다행히 릴리안은 내게만 예의 바르겠다는 르나르에게 오히려 감명 받은 것 같았다.

    그런 릴리안을 보고 싱긋 웃은 르나르가 다시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 제가 말씀드린 적 있었나요? 전 아무래도 위엄 있는 여자가 좋은 것 같다고.”

    르나르가 갑옷을 입은 나를 아래위로 살피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죠?”

    “옷이 잘 어울리신단 뜻입니다.”

    어쩐지 위험한 눈빛을 한 르나르가 씩 웃었다.

    그러곤 릴리안 쪽을 한번 슬쩍 보더니, 그녀가 짐을 싸느라 정신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내 귓가로 허리를 숙였다.

    그 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속삭였다.

    “대공녀님 갑옷 아래 깔려보고 싶다고요.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죠?”

    * * *

    전투 가능한 인원을 추려 플루토나 제국 황성에 도착했을 땐 석양이 질 무렵이었다.

    연한 붉은빛으로 물든 하늘을 배경으로 그레이시아나 제국군과 코웰 가문 병력이 대치하고 있었다.

    그레이시아나 제국군이 등진 것이 황성.

    황궁을 빼앗기면 안 됐던 그들이 황성 앞에서 배수진을 친 것이었다.

    “방어선 구축을 꽤 단단히 했네요. 저게 뚫리면 끝이라는 건 알고 있나 봅니다. 일단 저것부터 무너뜨리겠습니다.”

    새카만 개미 떼처럼 보이는 그레이시아나 제국군을 바라보던 르나르가 말했다.

    그러곤 날 보며 씩 웃더니 말을 덧붙였다.

    “해 지기 전에 끝나겠습니다.”

    “무리하지 마요.”

    “빨리 대공녀님과 황성에서 밤을 보내고 싶어서요.”

    여상히 말한 르나르가 그레이시아나 제국군 쪽으로 걸어갔다.

    우리 군을 뒤로하고 홀로 그들에게 가까워지는 르나르를, 그레이시아나 제국 병사들이 당황한 얼굴로 봤다.

    하지만 그들의 당황도 잠시.

    “세상에….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검에서 흘러나온 아까 그 하얀 빛은 뭐지? 그게 검기라는 건가?”

    “마력을 검에 흘려 넣어 검기로 발현시킨 것이 분명해. 그런 걸 책에서만 봤지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르나르가 싸우는 걸 지켜보던 우리 쪽 병사들이 넋을 잃은 채 한 마디씩 감탄했다.

    나 또한 르나르가 검기까지 쓰는 것은 처음 봤기에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소드 마스터란 참 놀라운 존재였다.

    르나르는 정말 해가 다 지기도 전에 그레이시아나 제국군 방어선을 무너뜨려 버렸다.

    한나절 넘게 유지된 대치 상황을 단숨에 끝낸 것이었다.

    황성과 쓰러진 적들을 배경으로 한 르나르가 여유 있는 태도로 뒤돌았다.

    그러곤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나를 향해 물었다.

    “밖은 정리된 것 같네요. 이제 성문을 열게 할까요?”

    그런데 다음 순간, 르나르가 왈칵 얼굴을 찡그리더니 손으로 입을 막고 크게 기침했다.

    그가 손을 뗐을 때 그의 손엔 검붉은 핏덩이가 쥐어져 있었다.

    “르나르! 괜찮아요, 르나르?!”

    놀란 내가 그를 부르며 달려갔다.

    그 사이 르나르는 단단한 땅에 검을 박아 넣더니 그 검에 의지해 주저앉았다.

    내가 르나르 곁에 꿇고 앉았다.

    나를 따라 달려온 릴리안이 르나르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해독제를 더 만들어야 할 것 같아요. 해독제가 독을 다 잡지 못한 상태에서 많이 움직이셔서 남은 독 기운이 다시 퍼진 것 같아요.”

    “남은 해독제가 없나요?”

    “없어요. 한 번에 조금씩 밖에 만들 수 없는데 아까 만든 건 이미 대공녀님 저택에서 다 사용해서.”

    “그럼 지금 바로 해독제를 더 만들어줘요. 부탁할게요.”

    “네, 만들게요. 그런데 주방을 쓸 수 있으면 해독제 만드는 시간이 훨씬 절약될 텐데…. 황성을 여는 건 불가능할까요?”

    릴리안이 난감한 표정으로 굳게 닫힌 성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내가 황성을 봤다.

    성벽 위에 이쪽을 내려다보며 덜덜 떨고 있는 병사들이 보였다.

    아무래도 평범한 인간의 능력으론 보이지 않는 르나르의 활약을 보고 겁을 먹은 것 같았다.

    ‘저걸 잘만 이용하면….’

    “레오. 성안으로 전서조를 날려 메시지를 전해줘. 지금 바로 성문을 열면 모두 살려주겠다고.”

    내가 어느새 곁에 와 있던 레오에게 부탁했다.

    “황자가 지금 이 상태인데 그게 통할까? 무슨 다른 생각이 있는 거야?”

    레오의 질문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가 그런 날 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그래. 난 널 믿으니까.”

    막사 쪽으로 돌아갔던 레오는 잠시 후 내게 다시 돌아왔다.

    “전서조를 날렸어. 지금쯤이면 성안에서 우리 메시지를 받아봤을 거야.”

    나는 돌아온 레오에게 내게 기대있던 르나르를 맡긴 뒤 몸을 일으켰다.

    황성 쪽으로 한 발 짝 다가섰다.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 르나르를 안고 있기도 했고.

    나는 내가 만들 수 있는 가장 큰불을 상상했다.

    ‘모양은 역시…. 그게 제일 좋겠지…? 한국인 감성으로.’

    다음 순간, 곤룡포의 용을 닮은 커다란 불꽃이 맑은 어둠과 뒤섞이기 시작한 노을빛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저, 저게 뭐지?!”

    “드, 드래곤인가?!”

    놀란 그레이시아나 제국 병사들이 성벽 위에서 우왕좌왕 흩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몸이 긴 용은 그 긴 몸으로 플루토나 제국 황성을 몇 번 휘감은 뒤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러곤 거칠게 몸을 틀어 성벽 안쪽 그레이시아나 제국 병사들을 향해 돌진했다.

    “으악!! 으악!!”

    “오지 마!! 오지 마!!”

    혼비백산한 그레이시아나 제국 병사들이 지르는 비명이 성문 바깥까지 들렸다.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 용은 아무것도 집어삼키거나 태우지 않았다.

    하지만 알 수 없는 형상을 한 불꽃이 성안을 활보하며 날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이미 사기를 잃은 병사들에겐 충분한 위협이 될 터였다.

    “성문을 열고 항복하라!! 그럼 너희 모두를 살려주겠다!!”

    목소리가 큰 우리 쪽 병사 한 명이 황성을 향해 소리쳤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드르륵- 드르륵-

    무거운 쇳소리와 함께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청동 문이 열렸다.

    때마침 황성을 다시 휘감던 용 모양 불꽃이 하늘로 치솟으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 이겼다.”

    우리 쪽 병사 중 누군가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겼다!!! 이겼다!!!”

    이내 코웰 가문 병사들 사이에서 거센 함성이 터져 나왔다.

    “마법이라는 게… 이 정도의 위력을 가진 거였어…?”

    어느새 내 바로 뒤까지 와 있던 미르엣이 어안이 벙벙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멋지죠? 저 마법을 부린 주체가 제 부인이 될 사람입니다!”

    미르엣에게 자랑하는 르나르의 목소리도 들렸다.

    뒤돌아보니 르나르가 날 보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날 보고 웃어주는 그가 아름다웠다.

    그런데 다음 순간.

    이제껏 억지로 깨어있던 듯, 르나르가 그를 지탱하던 레오의 품으로 쓰러지며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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