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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82화 (82/100)

82화

풀 냄새, 바람 냄새

엘로즈의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투두둑 떨어졌다.

“고마워요. 정말. 정말 고마워서….”

목이 멘 그녀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엘로즈를 보며 릴리안이 생각했다.

‘그땐 제대로 보지 못해 미처 몰랐는데 정말 정석적으로 예쁘잖아? 얼마나 예쁜지 눈물로 얼굴이 범벅인데도 예뻐. 하얗고 예뻐. 정말 예뻐.’

이렇게 예쁜 여자를 울게 하는 건 죄악이 아닐까 릴리안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대체 어떤 악마가 저 남자를 저렇게 만들고 이 여자를 이렇게 울린 건지.

릴리안이 엘로즈를 침대 끝에 앉힌 뒤 르나르에게 다가가 그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 * *

릴리안이 르나르의 피를 뽑고 그 피에 이 액체, 저 액체를 섞어본 뒤 해독제를 만들러 떠났다.

나는 그제야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기사단장 리암이 걱정하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응. 괜찮아. 이제야 정신이 좀 드네.”

“드디어 혈색이 도시네요. 다행입니다.”

리암의 얘길 듣고 거울을 봤다.

그런데 다행이라고 하기엔 얼굴이 참 엉망이었다.

“좀 씻어야겠어.”

“네, 아가씨. 그럼 저는 문밖에서 지키고 있겠습니다.”

리암이 방안에 포진해있던 기사들을 이끌고 내 방 밖으로 사라졌다.

알렌은 릴리안을 따라갔기에, 방안엔 더글라스와 안나, 나만 남았다.

리암이 포함된 제 1 기사단을 제외한 다른 기사단들과 코웰 저택 사용인들은 모두 겔리온과 미르엣, 에반을 따라나선 뒤였다.

주변이 고요해지니 마음이 조금은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내가 욕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빠르게 씻고 밖으로 나와 보니 방안이 어쩐지 소란했다.

“아, 아가씨…!”

안나가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더글라스는 르나르 쪽으로 바짝 허리를 숙인 상태였다.

“황자님, 왜 그러세요. 어디가 불편하세요?”

내 시선이 곧 르나르에게로 향했다.

르나르는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한껏 몸을 비틀고 있었다.

“르나르, 왜 그래요. 어디가 많이 아파요?”

나는 달려가 무릎을 꿇고 그의 손을 붙잡았다.

여전히 젖은 내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르나르가 나를 봤다.

그러더니 몸을 비틀던 걸 멈췄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안심한 표정이었다.

“혹시… 날 찾고 있던 거예요?”

르나르의 입꼬리에 희미한 미소가 어른거렸다.

말랐던 눈물이 또다시 흘렀다.

르나르의 눈이 자꾸 감겼다.

피를 뽑고 잠들었던 르나르는 언제든 다시 의식을 잃을 수 있을 것만 같아 보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감긴 눈은 다시 뜨이지 않았다.

“미안해요. 내가 계속 옆에 있었어야 했는데.”

나는 꼭 쥔 르나르의 손에 얼굴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알려주고 싶었다.

내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으리란 것을.

그때, 텅 빈 내 네 번째 손가락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르나르가 걸어준 목걸이에서 얼른 반지를 빼, 내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꼈다.

반지는 처음 꼈을 때처럼 꼭 맞았다.

하지만 그때처럼 손가락이 물린 느낌은 아니었다.

내 일부인 듯 꼭 맞는 반지를 낀 손이 편안했다.

“일어나요, 르나르. 일어나요. 다 낫고 일어나면, 나랑 결혼해요.”

흐르는 눈물을 따라 더 간절해진 내 목소리가 르나르에게 전해졌다.

그때, 르나르의 긴 속눈썹이 흔들렸다.

“…대공녀님? 방금 황자님께서 움직이신 것 같지 않아요?”

“화, 황자님께서 아가씨 얘길 들으셨나 봐요…!”

“정신이 들어요? 정신이 들어요, 르나르?”

내가 불렀지만, 르나르는 조용했다.

그는 꼭 평온하게 잠이 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얼굴색이 전혀 없는 것만 제외하면.

그 순간, 알렌이 노크 없이 방문을 열었다.

“대공녀님! 해독제가 완성됐습니다!”

알렌의 표정이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그런 알렌을 문 옆으로 밀치며 릴리안이 방안으로 들어섰다.

“좀 옆으로 비켜 봐요, 지나갈 수가 없네.”

투덜대는 릴리안을 보는 알렌의 시선에 사랑스러운 사람을 보는 애정이 듬뿍 담겨있었다.

“대공녀님, 여기요. 아마 효과가 있을 거예요. 이미 말씀드렸지만 저만큼 마법약을 잘 만드는 실력자는 이 대륙을 통틀어도 없을 테니까요.”

릴리안이 맑은 초록색 액체가 담긴 유리병을 내게 건네주며 말했다.

내가 릴리안이 내게 준 해독제를 입에 머금었다.

그다음 르나르가 삼킬 수 있도록 그의 입안으로 해독제를 조금씩 흘려 넣었다.

긴장감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연이은 입맞춤으로 해독제 한 병을 비워냈을 때, 르나르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으…, 으으…! 으윽…!”

르나르가 괴로워했다.

놀란 내가 사색이 됐다.

“타…타는 것 같아……!”

르나르가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고통을 호소했다.

“릴리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이 사람 괜찮은 거예요?!”

“정상적인 반응이에요. 해독제가 독을 중화시키고 있어서 그래요. 근데 보통보다 반응이 빠르시긴 하네요. 혹시 평소에도 회복력이 좋으신가요? 해독제 흡수력이 상당하신 것 같은데.”

릴리안이 학자처럼 골똘한 표정으로 르나르를 관찰하며 말했다.

나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겠는 기분으로 다시 르나르를 봤다.

다행히 파리하던 르나르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내가 르나르의 손을 꼭 잡았다.

“조금만 참아요. 나으려고 아픈 거래요. 그러니 조금만….”

그때, 밖으로 나갔던 리암이 다급한 표정으로 방안으로 들어섰다.

“아가씨, 피하셔야겠습니다. 황궁 기사단이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와 저희 기사들과 대치 중인데, 그쪽 수가 워낙 많아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그쪽에서 아가씨를 내어 달라 요구하고 있습니다.”

올렌도의 마지막 발악인 듯했다.

“제가 갈게요.”

전부 불붙여 쫓아버려야지.

내가 잡고 있던 르나르의 손을 놓고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르나르가 떠나려는 내 손목을 붙잡았다.

“안 돼. 다쳐. 가지 마.”

아픔을 견디며 말하는 르나르는 어금니를 꽉 물고 말하고 있었다.

르나르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기꺼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산송장 같았으니까.

그에게 생명력이 돌아오고 있었다.

“르나르가 날 지켜줬잖아요. 이젠 제가 당신을 지켜줄게요.”

내가 땀에 젖은 그의 머리칼을 이마 뒤로 넘겨준 뒤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르나르가 짧고 굵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황궁 기사 수십 명이 방안에 들이닥쳤다.

리암이 앞으로 나서며 그들을 마주 봤다.

“안나, 아가씨를 모시고 도망쳐. 내가 길을 열어줄 테니.”

긴장한 리암이 들고 있던 검을 더욱 꽉 쥐었다.

리암 혼자서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는 분명 뛰어난 기사였지만 평범한 인간이었고 상대는 여러 명이었으니.

리암을 도울 생각으로 내가 불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때, 너무도 듣고 싶었던 장난기 어린 웃음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태어나신 집을 다 태우려고요? 그건 너무 아까운데. 이 방에 저희 추억도 있잖아요.”

그렁그렁 눈물을 달고 돌아보니 어느새 몸을 일으킨 르나르가 한결 나아진 얼굴로 날 보고 웃고 있었다.

르나르가 불이 붙은 내 손의 손목을 잡았다.

그가 살며시 흔들자 작은 성냥불이 꺼지듯 내 손에서 불꽃이 사라졌다.

“독에 중독된 절 대공녀님께서 살려주셨잖아요. 그러니 이번엔, 제가 대공녀님을 지켜드릴 차롑니다.”

르나르가 침대에서 바닥으로 내려섰다.

리암 쪽으로 걸어간 그는 너무도 여유롭게 리암의 손에서 검을 빼 들었다.

순식간에 빈손이 된 리암이 당황해 눈만 껌뻑였다.

그때, 르나르가 별안간 무언가 깨달은 듯 주변을 둘러봤다.

“아. 이곳 대공녀님 방이잖아요. 잊을 뻔했네요.”

그가 리암의 칼을 바닥으로 던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육중한 갑옷끼리 부딪치는 소리, 깨지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방안을 울렸다.

“눈 감으세요.”

붉은 피가 아예 터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내가 눈을 감았다.

잠시 후 한바탕 소란이 끝이 났을 때, 내 몸이 번쩍 공중으로 들어 올려졌다.

“……!”

놀란 내가 눈을 뜨려는데 다시 한번 르나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눈 뜨지 마세요.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겠어요?”

날 공주님 안기로 안은 르나르가 어딘가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잠시 후 신선한 공기가 코끝에 와 닿았다.

‘풀 냄새. 바람 냄새.’

양 볼을 스치는 간지러운 바람을 느낀 내가 나도 모르게 눈을 떴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건 초록색 풀과 잎이 가득한 정원이었다.

르나르가 멍하니 둘러보는 날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어제오늘 좋지 않은 붉은색을 많이 보셨잖아요. 시력 정화하시라고요.”

르나르는 나를 안은 채 그대로 정원 중심까지 걸어가 음악 소리 같은 물소리를 내는 분수의 난간에 날 앉혔다.

그러곤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흘러내린 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다 말했다.

“저 다 들었습니다.”

“다 들었다니, 뭘요?”

“대공녀님께서 제가 일어나면 결혼하자고 하신 거요.”

그걸 들었다고?

“어떻게요? 그때 르나르는 의식이 없었잖아요.”

“저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곧 죽겠다 싶은 정신에도 그건 들리더라고요. 자랑스러운 녀석.”

르나르가 장난스럽게 그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능글맞게 미소 지었다.

“그래서 결혼은 언제….”

“그게 지금 중요해요? 다 죽다 살아난 사람이.”

“그게 중요하지 않으면 대체 이 세상에서 뭐가 중요할 수 있겠습니까?”

“결혼 얘긴 르나르가 곧 죽을 것 같아서 하게 된 얘기였어요.”

“설마 저 멀쩡해졌다고 취소하시는 겁니까? 다시 아프러 갈까요?”

“쓸데없는 소리!”

르나르가 어디라도 갈 것처럼 몸을 일으키기에 내가 르나르의 얼굴을 붙잡아 다시 앉혔다.

내 손에 양 볼이 감싸진 르나르가 만족스럽다는 듯 씩 웃었다.

그런 르나르에게 내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혼 날짜보다도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저한테 지금 그것보다 중요한 건 없는데.”

“사랑해요.”

“…….”

능글거리던 르나르에게서 순식간에 표정이 사라졌다.

“사랑해요. 정말 사랑해. 이 말을 해줘야 했는데 다신 못 해줄까 봐 무서웠어요. 나는 르나르를 정말….”

그리고 나는 하던 말을 마무리할 수 없었다.

내 입술이 르나르에게 삼켜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분수 안으로 넘어가던 내 몸을 르나르가 허리를 받쳐 고정했다.

세레나데 같은 분수의 물소리가 다시 고요해진 정원을 가득 채웠다.

르나르의 강하게 뛰는 심장 소리가 분수의 노랫가락에 어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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