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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81화 (81/100)

81화

끔찍한 촌극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당신이 죽어버리면 난 어떡해야 할까.

사실 믿고 있었다.

당신만큼은 날 구하러 와줄 것을.

당신만큼은 날 버릴 일이 없다는 것을.

당신은 날 사랑하니까.

나도 당신을 사랑하니까.

난 이제 믿는데.

믿을 수 있는데.

그런데 날 믿게 한 당신이 죽어버리면 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지?

내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이제는 눈이 감긴 르나르의 얼굴을 감싸려 했다.

그런데 내 손이 닿자 그의 고개가 옆으로 꺾였다.

뜨거운 눈물을 쉴 새 없이 흘리며, 그의 얼굴을 감싸려던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신이시여, 제발. 제발…!’

기절해버릴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놓쳐 버릴 것 같은 의식의 끝자락을 가까스로 붙잡으며 나는 르나르의 심장 위에 귀를 댔다.

미약하지만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

르나르는 아직 살아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줘요, 제발. 제발.”

내가 간절한 목소리로 르나르에게 속삭였다.

그때, 동굴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들이 들렸다.

“아가씨!! 엘로즈 아가씨!!”

“르나르 황자님!! 어디 계세요!!”

코웰 가문 기사단이었다.

“여기요!! 이쪽이에요!!”

내가 목이 찢어지라 부르는 소리를 듣고 기사들이 달려왔다.

“르나르가 다쳤어요!! 빨리……, 르나르를……!!”

르나르는 기사들에 의해 코웰 저택으로 옮겨졌다.

호출된 코웰 가문 주치의는 곧바로 르나르를 진찰했다.

르나르는 숨은 붙어 있었지만, 겉으로 보기엔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한참 르나르를 살피던 주치의가 곤란하단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독에 중독된 상태이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약 중 그 무엇에도 제대로 된 반응이 없는 걸 보면……. 이 독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저희가 해독제를 가진 독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독이 아니라고요? 그렇다면….”

“마법약 제조법으로 만들어진 독 같습니다. 마법약에만 치료 효과가 있는 크리센트 약초에 황자님께서 미약한 차도를 보이시는 걸 보니.”

주치의의 설명을 들은 내가 르나르를 봤다.

르나르가 아주 조금은 나아진 것처럼 보였다.

차도라고 하기엔 아예 들리지도 않았던 숨소리가 조금 들리기 시작했단 정도뿐이었지만.

“그렇지만 이대로라면 내일을 넘기시기 힘들 겁니다.”

주치의의 다음 말에 나는 머릿속에서 번개가 치는 것을 느꼈다.

르나르가 어깨에 맞은 화살의 화살촉에 독이 발라져 있던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화살은, 원래는 르나르가 아닌 날 노린 것이었다.

날 살리려던 르나르가 대신 화살을 맞은 것이었고.

‘내가 죽길 바라면서 마법약 제조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

범인은 확실했다.

“케이시를 잡아 와. 멀리 도망치지 못했을 거야. 최대한 빨리…!”

내 명을 받은 코웰 가문 기사단이 내 방 밖으로 사라졌다.

“알렌. 알렌이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요. 부탁해도 될까요?”

내가 르나르의 발치에 무릎 꿇고 앉아 쉼 없이 우느라 얼굴이 엉망이 된 알렌을 보며 물었다.

알렌이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나를 봤다.

“뭡니까, 대공녀님? 르나르 님을 살릴 수 있는 일입니까?”

“가능성이 있어요.”

“그렇다면 뭐든지, 뭐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내가 알렌에게 마법사의 야시장 위치를 적은 쪽지를 건넸다.

* * *

해가 뜨기 전 가장 깊은 어둠이 내리깔린 시간.

캐스티나를 잡으러 간 코웰 가문 기사단이 저택으로 돌아왔다.

캐스티나가 내 앞에 무릎 꿇려졌다.

“놔!! 이거 놔…!!”

캐스티나가 그녀의 어깨를 누른 기사의 손길을 뿌리치려 애쓰며 발악했다.

그런 캐스티나를 보는 내 감정은 깊은 바다의 밑바닥보다 고요했다.

“갈색 지붕의 집에 있었습니다. 짐을 싸 도망치려던 것을 잡아 왔습니다.”

캐스티나의 머리는 산발이었고 그녀의 치맛자락은 곳곳이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대체 넌 왜 그랬어야만 했을까.

나는 네 행복을 바랐는데.

“설명해.”

그녀에게 말하는 내 목소리에 한기가 흘렀다.

이에 캐스티나가 몸을 흠칫 떨었지만, 그녀는 이내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며 내게 시치미를 뗐다.

“네가 산적 놈들에게 왜 잡혀갔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네가 그놈들 심기를 건드렸겠지!!”

“그것에 관해서도 할 말이 있지만 지금 내가 묻는 건 그게 아니야.”

“……그럼?”

“무슨 독 썼어. 르나르한테.”

내가 필요로 하는 정보는 오직 하나였다.

해독제에 관한 것.

캐스티나가 날 납치하라고 산적들을 사주했을 거라는 건 너무 당연해 물을 필요조차 없는 것으로 느껴졌다.

“네가 만든 거잖아. 르나르 몸속에 퍼진 독.”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네 같잖은 연기에 놀아나 줄 시간 없어.”

“생사람 잡는구나, 난 정말 모르는 일……! ……!”

말을 끝내기 전 캐스티나의 얼굴이 돌아갔다.

이성을 잃은 내가 캐스티나의 뺨을 때렸기 때문이었다.

캐스티나의 머리채를 쥔 내가 그녀의 고개를 들게 해 르나르를 보게 했다.

“당장 살려내.”

흔들리던 캐스티나의 금안이 르나르에게 고정됐다.

캐스티나는 잠시 그대로 그렇게 굳어 있었다.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리고 그녀는 이내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하하하! 하하하하!”

코웰 가문 기사들이 곧 뽑을 태세로 검을 쥔 채 캐스티나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캐스티나가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너도 내가 르나르를 마음에 둔 걸 알고 있는 거지? 그래서 곧 죽을 것 같은 저 남자를 내게 보게 한 거지? 근데 그러면 뭐가 달라질 것 같아?! 르나르는 살아난다고 날 좋아해 주지 않을 거야, 내가 갖지 못할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나아-!”

캐스티나가 벽 쪽으로 날아갔다.

모르겠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캐스티나를 던지고 숨을 헉헉대는 내 눈에선 눈물이 쉴 새 없이 흐르고 있었다.

머리를 쥐고 바닥을 뒹구는 캐스티나가 울며 웃었다.

끔찍한 촌극이었다.

* * *

눈앞이 흐려졌다.

알렌은 팔을 들어 흐르려는 눈물을 쓱쓱 닦았다.

그럼에도 야속한 눈물은 금세 또 차올라 알렌의 하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한동안 숲을 헤매던 알렌이 마법사의 야시장에 도착한 건 밤샘 장사를 마친 시장 상인들이 하품하고 기지개를 켜던 새벽 4시쯤이었다.

‘굴참나무. 굴참나무.’

알렌이 연신 두리번대며 엘로즈가 말해준 그 나무를 찾았다.

그리고 그 나무 아래엔 정말 마법약을 파는 좌판이 있었다.

팔리지 않은 마법약을 가방에 넣으며 구시렁대던 릴리안이 그녀를 보는 빤히 알렌을 봤다.

‘귀…귀엽다.’

그것이 알렌에 대한 릴리안의 첫인상이었다.

인형처럼 예쁘장한 생긴 그 소년은 나쁜 일이 있어 한참 울기라도 한 건지 눈 밑이 빨갰다.

‘안돼, 이러면 안 돼. 눈만 마주쳤을 뿐인데 귀엽단 생각이라니…!’

릴리안이 핑크색 눈동자가 보이지 않게 눈을 꼭 감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보라색 단발이 찰랑찰랑 흔들렸다.

금방 사랑에 빠지고 마는 자신의 성향을 릴리안은 잘 알고 있었다.

특히 그녀는 잘생긴 남자, 귀여운 남자에게 약했다.

그녀가 지난번 사랑에 빠졌던 건 잘생긴 남자였다.

자신의 좌판 앞에서 쓰러진 그 남자에게 릴리안은 한눈에 홀딱 반해, 진정제를 핑계로 입까지 맞추려 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애인이 있었다.

임자 있는 남자는 결코 마음에 담지 않는 것이 릴리안의 철칙이었다.

다행히 금방 사랑에 빠진 만큼 금방 잊긴 했지만, 그래도 그 남자를 잊기 위해 릴리안은 한동안 마음고생을 해야 했다.

‘그런데 또 이렇게 금방 사랑에 빠지려 하다니…!’

한 번 더 고개를 저은 릴리안이 눈을 떴다.

그런데 백발에 적안을 가진 그 소년이 릴리안 앞에 다가와 있었다.

“네가 릴리안이야?”

“제 이름을… 어떻게 아세요?”

“당신이 필요해. 같이 가줘야겠어.”

* * *

“수도 알베인은 점령했지만, 황성을 함락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레이시아나 제국군이 황성에 모여 있는 데다 그 성이 과거 요새로 쓰기 위해 지어진 곳이라. 성문을 여는 일이 만만치 않은 모양입니다.”

플루토나 제국에서부터 날아온 마법 전서조가 전해준 편지 내용을 훑으며 코웰 가문 기사단장 리암이 내게 설명했다.

그러곤 초조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저희도 출발해야 합니다. 원래는 어젯밤 플루토나 제국으로 넘어가려고 하셨잖아요. 지금쯤 그레이시아나 제국 황실에도 반역 소식이 전해졌을 겁니다. 저희가 아직 여기 있단 걸 알면 올렌도 황자가 이곳을 습격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는 바 아니었다.

코웰 저택에 더 머무르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캐스티나가 정신을 놓아버린 상황에서 내 마지막 희망은 릴리안이었는데, 마법사의 야시장과 가까운 건 플루토나 제국보다도 코웰 저택이었다.

그래서 나는 떠날 수 없었다.

르나르를 혼자 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내가 옆에 있어 줄게요. 지켜줄게요.”

나의 마력이 그의 마력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며, 내가 두 손으로 감싸 쥔 르나르 손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크리센트 약초의 힘으로 조금 기력을 되찾은 르나르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려 나를 봤다.

빛을 잃은 적갈색 눈동자에 나는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사위가 조금 밝아졌다.

르나르의 눈동자 색을 닮은, 방금 태어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거친 숨소리가 섞인 알렌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은 것은 그때였다.

“엘로즈 님, 말씀하신 분을 모셔왔습니다…!”

“릴리안!”

내가 릴리안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인 그녀의 한 손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잘 왔어요, 정말 잘 왔어요. 마법약 제조법으로 만든 독을 해독해줄 사람이 필요해요. 사례는 얼마든지 하겠습니다. 부탁드려요. 제발 저 사람을 살려주세요.”

눈물이 쏟아졌다.

이제 다 마른 줄 알았는데 어디 숨어있던 건지.

릴리안은 침대 위 르나르의 얼굴을 확인하고 조금 놀라고는 이내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봤다.

그러곤 날 안심시키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만큼 마법약을 잘 만드는 실력자는 이 대륙을 통틀어 저뿐일 테니까요.”

릴리안의 따뜻한 손이 내 손 위에 얹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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