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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80화 (80/100)
  • 80화

    나의 로즈

    ‘내 정체를 알고 있었어?’

    놀란 캐스티나의 손끝이 벌벌 떨렸다.

    진짜 이름을 듣게 되자 캐스티나는 벌컥 후회하는 감정이 들었다.

    산적들로 하여금 엘로즈를 납치하도록 사주한 것이 캐스티나였다.

    르나르가 목숨보다 아끼는 사람이 엘로즈란 것을 알려주며, 르나르에게 복수하는 것보다 엘로즈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인 복수가 될 것이라 조언하며.

    ‘그런데 저 여자를 죽인다고 르나르가 내 것이 될까?’

    그런 의문이 문득 들고나니 캐스티나의 후회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지경에 이른 캐스티나였다.

    캐스티나는 차라리 엘로즈가 빨리 죽어버렸으면 했다.

    이것이 한때는 황녀였던 캐스티나가 한 짓이란 걸 그 아무에게도 알릴 수 없도록.

    “왜 빨리 안 죽이는 거지?! 너희 부두목이란 작자는 대체 뭘 망설이는 거야…!!”

    캐스티나가 불안한 마음에 케빈을 닦달했다.

    케빈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캐스티나를 달래기 위해 썼다.

    “황녀님, 황녀님, 황녀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당장 안 죽을 뿐이지 저 하얀 새는 곧 죽을 목숨이니까요.”

    “그러니까 곧 죽을 사람을 왜 바로 안 죽이는 거냐고!”

    “부두목께서 제물로 바칠 재목이라 판단하셨다고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저도 잘 몰라요. 하지만 저희는 명령에 따라야만 합니다. 두목이 없는 지금의 상황에선 부두목의 명령이 곧 달의 뜻이니까요.”

    맹목적인 숭배를 세뇌받은 집단이었다.

    그들은 자연물인 달을 숭배했고 또 교주였던 두목을 숭배했다.

    두목이 사라진 지금 두목에게 기대되던 역할은 부두목이 맡고 있었고.

    케빈 또한 집단의 일부였기에 달을 숭배하고 부두목을 따랐다.

    캐스티나는 아무리 그녀라도 엘로즈를 곧바로 죽이도록 케빈을 설득할 순 없겠단 사실을 곧 깨달았다.

    그렇다고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캐스티나가 청초한 금안에 눈물을 머금고 케빈의 양손을 그녀의 작은 손안에 꼭 쥐며 말했다.

    “케빈, 저 나쁜 여자가 도망치면 어떡하지? 날 무척 괴롭힌 여자란 말이야.”

    케빈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를 확인한 캐스티나는 품속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냈다.

    짙은 자주색의 반투명한 액체가 작은 유리병 안에서 찰랑거렸다.

    “희박한 가능성이지만 불에 타 죽지 않을지도 몰라. 저 여자는 마녀니까. 우리는 저 여자가 어떤 능력을 갖췄는지는 모르기도 하고.”

    “그, 그럴 수도 있을까요? 죽지 않을 수도?”

    “만약 저 여자가 불에 타 죽지 않으면 화살촉에 이걸 묻혀 저 여자를 향해 쏘도록 해. 이건 통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니. 마녀와 마법사들에게 치명적인 독이야.”

    캐스티나가 그녀가 든 작은 유리병을 케빈에게 넘겼다.

    유리병을 받아든 케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결의를 다졌다.

    “알겠습니다, 황녀님. 제가 황녀님을 도울 겁니다. 그러니 황녀님께선 아무런 걱정하지 마시고 마음 편히 기다리고만 계세요!”

    캐스티나가 그런 케빈을 보며 조금 안심해 웃었다.

    * * *

    수도에 산과 동굴이 한두 개가 아니었기에, 노을이 질 때쯤 시작된 산맥 수색은 맑은 어둠이 깔리고 그 어둠이 점점 짙어질 때까지 오랜 시간 이어졌다.

    하지만 엘로즈와 산적들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르나르는 침착하려, 이성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스스로에 대한 무력감에 그는 곧 무너져버릴 것만 같았다.

    알렌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르나르 님! 손목에 달 문신이 있는 남자를 찾았습니다!”

    알렌이 끌고 오는 남자가 르나르의 시야에 들어왔다.

    남자의 손목에 정말 누운 달 모양 문신이 있었다.

    “산길을 걷는 걸 붙잡았습니다. 녀석들과 한패가 분명한 것 같은데 은신처가 어딘지 입을 안 엽니다.”

    알렌이 끌고 온 남자를 르나르 앞에 무릎 꿇렸다.

    남자는 이미 알렌에게 맞은 건지 얼굴이 엉망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건방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차라리 날 죽여! 네놈들한테 달님의 새로운 후계자이신 부두목 위치를 알려줄 순 없으니까! 네놈들 손에 두목을 잃은 것도 억울…, 으억…!”

    그러나 남자는 건방진 표정을 오래 유지할 수 없었다.

    르나르가 남자의 얼굴을 주먹으로 내리찍었기 때문이었다.

    뼈가 부서지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아니.

    벌써 부서진 걸까?

    두려움을 느낀 남자의 눈빛이 변했다.

    “미안하지만 그 소원은 이뤄주지 못하겠네. 은신처를 불기 전에는 절대 네놈을 죽여주지 않을 거니까.”

    “…….”

    “제발 죽여 달라 절절 기게 만들어주지.”

    남자를 보며 웃는 르나르의 적갈색 눈동자가 살기와 광기로 번뜩였다.

    * * *

    “달이여! 우리의 수호자여!”

    제사장처럼 차려입은 부두목이 장작더미 아래에서 하늘을 보며 외쳤다.

    천장의 뚫린 구멍을 통해 달이 보였다.

    그 순간 나는 그 달을 만들었을 신에게 빌었다.

    ‘제발 살려주세요. 저. 살고 싶어요.’

    “당신께 제물을 바칩니다. 이 제물을 받으시고 악랄한 황제의 개에게 고통의 참모습을 알려주소서! 심장이 갈가리 찢어 발겨지는 피의 고통을!”

    “와아!!”

    부두목이 외치자 산적들이 환호했고 이내 장작더미에 불이 붙었다.

    불은 빠른 속도로 장작을 삼키며 순식간에 새장이 있는 꼭대기까지 치솟아 올랐다.

    공기가 매캐해지고 숨 쉬는 게 점점 더 어려워졌다.

    ‘이대로 죽는 건가?’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차라리 다 태워져 시체가 남지 않길 바랐다.

    타다 남은 날 보면 코웰 가문 가족들이 슬퍼할 테니까.

    르나르도 걱정됐다.

    그러고 보니 사랑한단 말을 한 번도 해주지 못한 것 같다.

    내게 청혼도 해줬는데.

    “르나르. 르나르…!”

    한 번만 더 그를 보고 싶었다.

    딱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그런데 그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진 걸까?

    눈앞에 르나르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를 닮은 형체가 움직일 때마다 시뻘건 피가 분수처럼 치솟아 올랐다.

    그 형체를 좀 더 보고 싶었는데 시꺼먼 연기가 눈앞을 가려왔다.

    폐부가 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정신이 점점 혼미해졌다.

    익숙한 목소리가 의식을 깨운 건 그때였다.

    “엘로즈!!”

    새장이 흔들리나 싶더니 창살이 휘어졌다.

    휜 창살을 한 번 더 벌린 형체가 새장 안으로 들어섰다.

    구속구가 부서지는 느낌이 났다.

    억세고 거센 힘이 이윽고 날 품에 안았다.

    “늦어서. 늦어서 미안해. 이제 집에 가자.”

    르나르와 맞닿은 볼이 축축해지는 것을 느끼며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날 안은 르나르가 새장 밖으로 나섰다.

    그때였다.

    르나르가 동작을 멈춘 건.

    “…르나르?”

    불안해진 내가 그를 부르는 것과 동시에 르나르가 재빨리 날 품속으로 끌어넣으며 몸을 웅크렸다.

    무언가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피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잠시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르나르의 어깨에 박힌 화살을 보고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봤을 때, 알렌의 칼을 맞고 쓰러지는 남자가 보였다.

    붉은 머리칼을 가진 여자가 엎어지고 구르며 달리고 있는 것도 보였다.

    내가 잇자국이 날 정도로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르나르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빨리 가자.”

    르나르가 어깨에 박힌 화살을 그냥 뽑곤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무릎이 금방 꺾였다.

    르나르의 얼굴이 파랗게 변하기 시작하는 게 평범한 화살에 맞은 것 같지가 않았다.

    “…걸을 수 있겠어요?”

    르나르의 품에서 벗어난 내가 그를 부축하며 물었다.

    르나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내 내 품속으로 무너져 내렸다.

    내가 주변을 둘러봤다.

    주변이 온통 불이었다.

    ‘…할 수 있을까?’

    알 수 없었지만 해야만 했다.

    내가, 내가 만든 불을 다룰 때의 기분으로 눈앞의 화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신체 전체를 따라 흐르는 마력이 느껴지며 불길이 내 의지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됐다…!’

    내가 장작을 삼키던 불들을 산적들 쪽으로 향하게 했다.

    르나르의 검날을 마주하지 않은 운 좋은 산적들을 내 불길이 덮쳤다.

    “…멋진데?”

    고통을 참는 듯 어금니를 꽉 물면서 르나르가 씩 웃었다.

    숯이 된 장작더미 위에 남은 불은 금방 꺼질 작은 불씨들뿐이었다.

    내가 르나르를 부축해 장작더미 아래로 내려갔다.

    나와 르나르가 걸음을 디딜 때마다 산적들을 덮친 불꽃이 길을 내어주며 갈라졌다.

    르나르가 알려준 동굴 입구까지 가는 일은 비교적 수월했다.

    그런데 입구에 거의 다다랐을 때 르나르의 무릎이 다시 한번 꺾였다.

    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내가 르나르와 함께 동굴 바닥을 굴렀다.

    “미안, 미안해.”

    그 상황에서 내 머리를 감싸 바닥에 부딪히지 않게 한 르나르가 내게 사과했다.

    르나르의 어깨에서 흐른 피가 돌바닥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상했다.

    르나르의 상처가 처음 생겼을 때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르나르는 마법사이니 회복력이 좋아 조금은 치료가 될 줄 알았는데 말이었다.

    “잠깐만요, 르나르. 가만 있어 봐요. 일단 지혈을 하고 움직여야겠어요.”

    내가 치마를 길게 찢어 르나르의 어깨를 감았다.

    하얀 치마 천이 금세 붉게 물들었다.

    한 번 더 감아주기 위해 다시 치마를 찢으려는데 르나르가 내 손을 잡았다.

    의아해 그를 보니 그가 드러난 내 맨다리를 봤다.

    지금 그게 문제냐고 소리친 내가 다시 치마를 찢으려는데 르나르가 다시 날 멈추게 했다.

    화내려 했다.

    하지만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아무런 반응을 보일 수 없었다.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나를 보는 르나르의 텅 빈 눈빛은 분명 죽음을 앞둔 자의 그것이었다.

    “할 말이 있어.”

    금방이라도 끊길 것 같은 숨으로 르나르가 말했다.

    “아냐, 하지 마. 안 들을래.”

    “들어, 정말. 지금이 아니면….”

    내 눈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못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니까….”

    “…….”

    “사랑해. 처음부터 그랬어.”

    “…….”

    “사랑해, 나의 로즈.”

    르나르의 눈동자에서 빛이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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