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제가
“우리 짓이라는 건 남겼나?”
걸걸하고 거친 목소리가 신경을 긁었다.
“네, 부두목. 이 계집의 하녀를 버려두고 왔으니 하녀가 깨어나면 저희에 관해 알릴 겁니다. 깨어나는데 시간이 좀 걸리긴 하겠지만요.”
“그래. 첫 단추는 끼웠군. 그럼 이제 저 계집의 머리와 팔을 각각 잘라 상자에 담아….”
시끄러웠다.
참 듣기 싫은 목소리들이었다.
인상을 찌푸리며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는데 고개가 휙 위로 들려 올라갔다.
무의식중에 씹어버린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났다.
머리가 윙윙 울려 아픈 머리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손을 앞으로 끌어올 수가 없었다.
내 손이 무언가에 속박된 채 뒤로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던 내가 불을 만들어보려 했다.
불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날 붙잡고 있는 것이 마력의 흐름을 억제하고 있단 강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내 얼굴을 쥔 남자가 물었다.
“마녀라면서?”
“…….”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 표정인데? 다 아는 방법이 있지.”
“…….”
“허튼 짓 할 생각은 마. 능력을 억제하는 구속구를 차고 있어 아무 소용없을 테니까.”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자가 빙글거리며 웃었다.
그러곤 한 손으로 쥔 내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보기 시작했다.
“…마녀는 다 이렇게 생긴 건가? 반반하네.”
“…….”
“죽이기 전에 재미나 좀 볼까?”
“부두목. 그럼 저는 잠시 나가 보겠습니다. 하시려는 일 끝나시면….”
하지만 사방이 붉은 돌벽으로 이루어진 작은 방에서 나가려던 남자는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내가 내 얼굴을 쥔 남자의 얼굴에 침을 뱉었고 남자가 내 배를 차면서 내가 반쯤 정신을 잃어버리는 소동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이 계집이, 얌전히 죽여줄 수도 있었는데…!”
내 배를 찬 남자가 날 내려다보며 뇌까렸다.
그러다 제 손바닥을 봤다.
내 얼굴을 쥐었던 그 남자의 손에 피가 묻어있었다.
“이 계집이 벌써 다쳤나?”
“온전한 상태는 아닐 겁니다. 아무래도 마차 사고를 내고 잡아 온 것이다 보니.”
나를 찬 남자가 내 머리채를 잡았다.
신음을 흘리며 얼굴을 드는데 남자의 소름 끼치는 눈동자가 내 옆 볼에 고정됐다.
내가 몸부림쳤지만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고 나를 들여다봤다.
그러곤 하는 말이.
“베였네. 그런데 모양이 꼭.”
“…….”
“달 같군.”
내 옆 볼의 상처를 들여다보던 남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곤 다른 남자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렇지 않나, 스올?”
“저희 문장 같네요.”
옆에서 내 상처를 같이 들여다보던 스올이란 남자가 내 얼굴과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태피스트리엔 누운 것처럼 뒤집힌 검은 초승달 그림이 짜여 있었다.
“이건 계시야. 제물을 바칠 때 달님께서 알아보시기 쉽도록 우리가 이 모양으로 상처를 내잖아. 그런데 이 계집은 얼굴에 아예 그 상처를 달고 왔으니.”
“달님께서 이 계집을 제물로 바치길 원하시는 걸까요?”
“시체를 황자에게 보내는 건 취소한다. 대신 제물을 바칠 준비를 해. 이 계집을 오늘 밤 바로 달님께 바친다.”
내 머리채를 잡고 있던 남자가 바닥을 향해 던지듯 나를 놨다.
바닥에 얼굴을 부딪친 내가 감았던 눈을 뜨며 시야의 초점을 잡기 위해 애썼다.
스올이라 불린 남자가 내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다음 순간 알싸한 통증이 뒤통수에 퍼지는 것을 느끼며 내가 다시 정신을 잃었다.
* * *
램프등이 일렁이는 코웰 대공의 집무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엔 여전히 짙은 먹구름이 가득했다.
르나르는 어쩐지 불길한 기분에 멍하니 하늘을 봤다.
겔리온이 그런 르나르의 이름을 불러 그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겔리온은 이전에 하던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제 1사단 선두엔 자네가 서 줬으면 좋겠는데. 자네 실력은 이미 엘로즈를 통해 충분히 들었으니….”
겔리온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의 정적인 분위기를 뒤흔드는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똑똑똑똑-
“도련님,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겔리온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집무실 문이 열렸고 코웰 가문 기사단장 리암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리암의 얼굴은 보일 듯 말듯 푸르스름하게 질려있었다.
리암을 보는 르나르 고개가 조금 기울어졌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점심때 즈음 돌아오겠다고 하신 아가씨께서 오시지 않아 기사단 몇몇이 보던트 상점 거리로 향했는데, 가던 길에 아가씨를 수행 나갔던 기사 둘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길에서…. 둘 다 외상을 입고 정신을 잃은 채 발견됐는데 아가씨께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덜컹-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집무실 창문이 흔들렸다.
일렁이는 램프등 불빛이 겔리온과 르나르의 얼굴에 짙은 음영을 새겨넣었다.
겔리온과 르나르는 미동조차 없었다.
위압감을 느낀 리암이 작게 침을 삼켰다.
“아가씨를 찾기 위해 기사들을 이미 더 보냈습니다. 수색은 시작되었지만, 도련님과 황자 전하께도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
무거운 침묵이 집무실에 내려앉았다.
숨쉬기가 조금 어려워진 리암이 막힌 숨구멍을 뚫기 위해 고개를 숙이려던 찰나,
드르륵-
르나르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는 곧바로 곁에 세워뒀던 검을 집어 들었다.
“제가 찾아 모시고 가겠습니다. 죄송하지만 플루토나 제국엔 먼저 가 계십시오. 저는 대공녀님을 찾아 최대한 빨리 따라가겠습니다.”
오늘 저녁 메뉴를 묻는 듯한 심상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르나르의 적갈색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짙게 가라앉았단 사실을 겔리온은 알아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르나르의 수색이 시작된 건 쓰러진 기사들이 발견된 곳에서부터였다.
르나르는 그곳에서부터 대공가 마차 목격자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코웰 가문 문장이 워낙 화려했던지라 마차 목격자는 다행히 뜨문뜨문 이어졌고, 르나르와 기사들은 제국의 서쪽 산 초입에서 대공가 마차를 봤다는 마지막 목격자를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마지막 목격자의 증언에 근거해 산을 뒤지기 시작했다.
르나르와 기사단은 곧 그곳에서 쓰러진 대공가 마차와 안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황자님, 이곳에 저희 마차와 아가씨 하녀가 있습니다!”
기사의 외침에 순식간에 마차 쪽으로 달려간 르나르가 마차 안을 살폈다.
그런데 엘로즈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르나르는 조금씩 숨통이 조여 오는 것을 느꼈다.
기사들이 깨우고 옮기던 안나의 찢어지는 울음소리가 르나르의 귀에 들린 건 그때였다.
“아, 아가씨……! 아가씨!!”
눈물을 뚝뚝 흘리며 몸을 벌벌 떠는 안나가 제 손안의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안나의 시선이 닿는 곳까지 시선을 내린 르나르가 그 자리에서 굳었다.
안나의 손에 들린 것은 단검으로 대충 잘린 듯한 엘로즈의 새하얀 머리칼 일부였다.
잠시.
르나르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다음 순간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안나를 윽박지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 아가씨…, 아가씨……!”
“정신 차려, 안나! 아무것도 생각나는 게 없어?!”
“달……. 검은 달이요……!”
“…….”
“잠깐 정신을 차렸을 때 본 것 같아요. 아가씨를 끌고 간 남자들 손목에 검은 초승달 문신이 있었어요.”
뒤로 누운 검은 초승달.
그것은 르나르가 얼마 전 황제의 명령으로 습격한 산적 집단이 사용하는 문장이었다.
르나르가 두목의 목을 벤 산적 집단.
‘나 때문이구나. 나 때문에 엘로즈에게 이런 일이.’
르나르의 적갈색 눈동자가 안쓰러울 만치 흔들렸다.
르나르는 곧바로 그 산적들이 은신처로 사용하던 동쪽 산의 동굴로 향했다.
하지만 동굴은 비어 있었다.
르나르의 습격을 받고 두목을 잃은 그들이 은신처를 바꾼 것은 당연한 절차였다.
“이 산과 마차가 있던 서쪽 산은 아닐 거야. 마차를 그곳까지 가져다 놓은 건 나름 머리를 쓴 것일 테니. 하지만 산이 익숙한 녀석들이 또 산으로 숨어들었을 것이 분명해. 수도 위주로 활동해야 하니 수도를 떠나지도 않았을 거고. 수도 안의 산, 그 산의 동굴들을 전부 뒤진다. 특히 지도엔 나와 있지 않은 규모 있는 동굴 위주로. 서둘러. 빨리!”
르나르가 빠른 그의 걸음을 쫓지 못해 이제 막 동굴에 들어선 리암에게 명령했다.
명령을 받은 리암이 코웰 가문 기사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르나르 또한 마법 전서조를 사용해 알렌을 호출한 뒤, 빠른 속도로 빈 동굴을 빠져나갔다.
* * *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내 눈앞에 보인 것은 창살이었다.
‘…감옥인가…?’
그런데 감옥이라 하기엔 뭔가 이상했다.
앞을 봐도 옆을 봐도 뒤를 봐도 보이는 것이 창살.
게다가 위로 둥글게 모이는 형태의 이건….
‘새장……?’
내가 갇힌 곳은 새장이었다.
사람인 내가 들어갈 만큼 커다란 청동 새장에 새도 아닌 내가 갇혀있었다.
당황해 몸을 움직이니 새장이 기우뚱 기울어졌다.
새장은 산처럼 쌓인 장작더미 위에 위태롭게 얹어져 있었다.
차가운 공기를 느끼고 위를 보니 새장이 있는 이 동굴 천장에 큰 구멍이 있었다.
구멍을 통해 달이 보였다.
그 순간 난 직감할 수 있었다.
‘제물이라더니 날 태워죽일 작정이구나.’
구속구가 채워진 팔이 여전히 뒤쪽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마법만 쓸 수 있어도 뭐라도 해볼 수 있을 텐데.’
마법을 쓸 수 없으니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멍청하게 당하고만 있어야 하는 내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구속구를 어떻게든 풀어보려 발버둥 치니 온몸 구석구석에서 여물지 않은 통증이 물속에 떨어진 잉크처럼 번져왔다.
나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아팠지만 아픔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도망칠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침착해.’
잘 잡히지 않는 시야의 초점을 잡기 위해 내가 눈을 깜빡였다.
장작더미 아래쪽으로 산적으로 보이는 남자 수십 명이 어슬렁어슬렁 거리고 있었다.
동굴 벽을 따라서는 긴 다리와 사다리, 계단 등이 있었다.
그런데 복잡한 계단들 사이에서 나는 눈에 띄는 빨간 머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빨간 머리의 주인을 알아본 내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다음 순간, 내가 그녀를 불렀다.
“캐스티나!”
나를 보던 캐스티나가 흠칫 놀라더니 근처 돌기둥 뒤로 숨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나는 노예 시장에서 이 세계의 여자 주인공을 구하면 안 되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