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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78화 (78/100)
  • 78화

    어떤 노력

    “저 어때요, 엘로즈 님?”

    내가 골라준 드레스를 입은 캐스티나가 단상 위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커다란 리본이 등 뒤에 달린 튜브탑 네크라인 펄 핑크 실크 드레스였다.

    “예뻐요.”

    만족한 내가 말했다.

    그 드레스를 입은 캐스티나는 현실 세계 바비인형 같았다.

    나는 그 드레스와 함께 캐스티나에게 선물할 드레스 몇 벌을 추가로 더 골랐고 롤랑이 신상 라인이라며 추천한 구두까지 합해 전부 구매했다.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부담될 돈도 아니었다.

    내 플렉스를 지켜보던 캐스티나 표정이 어쩐지 어두워졌다.

    “엘로즈 님!”

    그녀가 뭔가 결심한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저랑 같이 점심 먹고 들어가세요, 제가 대접할게요!”

    나에게 생각보다 많이 받게 된 것이 미안한 모양이었다.

    내가 괜찮다고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조금 일찍 들어가 봐야 해서요. 점심 전에 돌아가겠다고 얘기해놓고 나왔거든요.”

    “…정말요? 그럼… 케이크 한 조각만이라도 드시고 가세요!”

    캐스티나가 롤랑의 드레스 샵 바로 건너편 디저트 가게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망설이자 그녀가 내 손을 꼭 잡아 왔다.

    “아무것도 대접해드리지 못하면 제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요. 네? 엘로즈 님….”

    캐스티나의 금안이 잘게 흔들렸다.

    그러고 보면 오늘이 엘로즈 평생 캐스티나를 보게 될 마지막 날일 수도 있었다.

    반역에 성공해 플루토나 제국을 점령하고 나면 굳이 그레이시아나 제국으로 돌아올 필요가 없었으니.

    “…그럼 딱 한 조각만이에요?”

    “네!”

    캐스티나가 내게 팔짱을 꼈다.

    우리 두 사람이 맞은편 디저트 가게로 향했다.

    오늘도 짙은 먹구름이 낀 하늘로부터 불어온 바람이 차가웠다.

    “이제 곧 겨울이겠네요.”

    캐스티나가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 사이 캐스티나가 주문한 홍차와 케이크 두 조각이 나와 캐스티나 앞에 각각 놓였다.

    그런데 그녀가 주문하지 않은 3단 트레이 디저트 세트도 함께였다.

    눈을 깜빡이던 캐스티나가 고개를 기울이며 웨이터 쪽을 바라보니 웨이터가 내 쪽을 쳐다보곤 싱긋 웃으며 말했다.

    “미르엣 대공자님께서 언젠가 미리 주문해놓고 가셨습니다. 나중에 대공녀님께서 따로 방문하시면 챙겨드리라고요. 대공녀님께서 영 저희 가게를 찾아주시지 않아 이제야 챙겨드릴 수 있게 되었네요.”

    그러고 보니 이 가게에 온 것이 오늘이 처음이 아니었다.

    롤랑의 드레스 샵에서 드레스를 맞춘 후 미르엣과 몇 번 이 가게에 들른 적이 있었다.

    “고마워요.”

    내가 인사하며 팁을 건네니 웨이터가 반듯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팁을 받아 사라졌다.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본 뒤 조용히 케이크를 먹던 캐스티나가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 갑자기 입을 열었다.

    “엘로즈 님께서는…, 가족들에게도 많이 사랑받으시는 것 같네요.”

    내가 대답 대신 미소 지었다.

    굳이 부정할 필욘 없을 것 같았다.

    코웰 가문 가족들이 날 사랑해주는 건 나 또한 크나큰 감사함으로 여기는 부분이었기에.

    캐스티나가 각설탕을 넣고 조용히 차를 저었다.

    그러곤 시선은 여전히 찻잔에 고정한 채 내게 물었다.

    “엘로즈 님께선… 그 사랑을 받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셨나요?”

    난데없는 질문이었다.

    이에 내가 얼굴에 물음표를 걸고 캐스티나를 봤다.

    시선을 느꼈는지 캐스티나가 고개를 들어 나를 마주 봤다.

    날 직시하는 금안이 진지했다.

    “알려주세요. 진심으로 궁금해졌거든요.”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게 됐다.

    ‘왜 저런 걸 묻는 걸까?’

    정말 어떤 노하우라도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걸까?

    내가 대답을 주저해도 캐스티나는 날 보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으면 보내주지 않을 듯한 기세였다.

    잠시 생각하던 내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난….”

    “…….”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

    “사랑받기 위해서. 정말 아무것도 따로 한 게 없어요.”

    진짜였다.

    태어나보니 날 사랑해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태어난 후였고,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그저 운이 좋았다.

    나라고 늘 운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현실 세계 나의 삶은 아주 어렸던 시절부터 엉망이었으니.

    하지만 그 암울했던 삶으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나는 사랑받기 위해 애써 노력하진 않을 것이었다.

    어차피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날 사랑해줄 생각이 없는 사람을 날 사랑하도록 억지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이 내가 현실 세계에서 깨달은 삶에 관한 진리였다.

    ‘내가 나여도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고마운 것이었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받은 사랑에 보답해주면 될 일이었다.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 사람을 위해 애써 나를 바꿀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노력하고 싶지 않았어요. 사랑받기 위해서.”

    “…….”

    “사랑받고 싶어서 애써 나를 바꿨는데 그랬는데도 사랑받지 못하면 너무 억울하잖아요?”

    “…….”

    “힘 빠지고. 난 그냥 그 힘 빠지는 게 싫어서….”

    조용히 말을 마친 내가 내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홍차를 마셨다.

    그러곤 시선을 돌려 시계를 찾았다.

    똑-

    딱-

    똑-

    딱-

    근처 벽에 걸린 추시계를 슬쩍 보니 오전 11시.

    슬슬 일어날 시간이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러자 어쩐지 혼란스러운 표정의 캐스티나가 따지듯 내게 말했다.

    “아뇨, 아닐 거예요. 아무런 노력도 안 했는데 그렇게 사랑받을 수 있으셨을 리가 없어요. 제게 알려주기 싫어 노력한 적 없는 척하시는 거예요. 그게 아니면 스스로가 노력한 것조차 모르는 엘로즈 님의 위선….”

    말하던 캐스티나가 별안간 입을 다물었다.

    감정에 휩쓸려 지켜야 할 선을 넘어버린 걸 문득 깨달은 듯했다.

    그런 캐스티나의 평가에 굳이 덧붙일 말도 없었고 덧붙일 시간도 없었다.

    조용히 미소 지은 내가 캐스티나에게 물었다.

    “남은 케이크는 포장하는 게 낫겠죠?”

    “엘로즈 님…!”

    마차에 오르기 직전 캐스티나가 날 불렀다.

    내가 뒤돌았다.

    그녀가 내게 다가섰다.

    “오늘… 같이 드레스 골라주셔서 감사해요. 선물해주신 드레스와 구두들도 전부 감사하고요. 제가 머물도록 허락해주신 집도 감사하고 또… 부족하지 않게 주시는 생활비도 감사….”

    캐스티나가 갑자기 내게 고마운 것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디저트 가게에서 내게 선 넘은 발언을 한 것이 미안했던 걸까?

    하지만 캐스티나에게 딱히 화난 것이 아니었기에 화낼 것도 없었다.

    “아니에요. 다 내가 캐스티나에게 주기로 약속한 것들인걸요. 캐스티나가 올렌도 황자 전하를 만나줬으니까.”

    “…….”

    “올렌도 황자 전하와 캐스티나는. 행복한 거 맞죠?”

    내가 물었다.

    잠시 잠잠한 눈빛으로 날 보던 캐스티나가 밝게 눈을 휘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요.”

    그녀의 눈꼬리가 경련했다.

    내가 그 경련을 이해하려 노력하며 바라봤다.

    그때, 마차 안에서 기다리던 안나가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이제 출발하셔야 해요.”

    내가 캐스티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캐스티나가 날 마주 보며 웃었다.

    “안녕히 가세요, 엘로즈 님.”

    “조심히 들어가요, 케이시.”

    이내 내가 마차에 오르고, 마차가 출발했다.

    나는 마차 뒤쪽에 난 작은 창으로 멀어지는 마차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캐스티나를 작은 점이 될 때까지 바라봤다.

    * * *

    “…안나는 어떻게 생각해? 그레이시아나 제국으로 돌아오지 않는 거.”

    창밖으로 흐르는 풍경을 가만히 응시하던 내가 별안간 안나에게 물었다.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가씨?”

    안나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

    “플루토나 제국에서만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플루토나 제국을 점령한 후 그레이시아나 제국을 공격하지 않을 생각을 문득 하게 된 것이었다.

    대공에게 집착하는 터넛 황제가 식물인간 상태가 됐으니 플루토나 제국을 점령한다고 그레이시아나 제국에서 빼앗긴 속국을 되찾고자 발버둥치지 않을 것 같았다.

    또 올렌도와 캐스티나도 다스리고 살 곳이 필요할 테니.

    난 내가 이어준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의 사랑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 마차가 심하게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으앗! 아가씨, 괜찮으세요?!”

    놀란 안나가 건너편 날 감싸려 했다.

    휘청이는 안나가 위험할 뻔했단 생각이 스치듯 들었다.

    “응, 괜찮아. 너는 괜찮아, 안나? 잭이 운전을 왜 이렇게 하는 거지?”

    내가 당황한 채 말했다.

    그런데 그런 나의 말에 안나가 더 당황하며 눈이 동그래졌다.

    “잭이요?! 출발할 때 저희 마부는 세바스찬이었잖아요…!”

    “출발할 땐 그랬지. 그런데 디저트 가게 앞에선 마부가 잭이었어.”

    세바스찬과 잭.

    두 명 전부 코웰 저택에서 일하는 마부였다.

    그래서 마부가 바뀐 것을 눈치챘음에도 나는 그것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컨디션에 따라 교대하는 것은 같은 저택에서 일하는 마부끼리 종종 행하는 일이었기에.

    그런데 놀란 안나의 얼굴을 보고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단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 아가씨. 잭은…, 잭은…. 분명 지난주에 마부 일을 그만뒀는데….”

    그렇게 말하는 안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순간 마차가 다시 한번 심하게 요동쳤다.

    그러곤 곧 뒤집힐 것 같은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거기 서……! 저택은 그 방향이 아니잖아!! 잭!!”

    “대체 어딜 가는 거야!!”

    마차를 따르던 호위 기사들이 마차를 향해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머릿속에서 번개가 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기서 나가야 해.”

    내가 마차 문을 붙잡았다.

    문을 열고 뛰어내리기라도 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미리 손써놓은 것인지 마차 문이 안에서 열리지 않았다.

    “아, 아가씨, 어쩌죠?! 문이 열리지 않아요…!!”

    내가 놓은 마차 문을 다시 밀던 안나가 말했다.

    그 순간, 밖에서 검끼리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데릭! 넌 마차를 따라가! 아가씨를 보호…! 으악…!”

    호위 기사 제스퍼의 목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안나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아, 아가씨. 제스퍼 기사님께서 당하셨나 봐요…. 제, 제스퍼 기사님께서…!”

    마차는 여전히 지나치게 빠르게 달리고 있었고 나는 생각을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마법을 써서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불을 만드는 것밖에는. 마차에 불을 붙이면 오히려 나와 안나가 위험….’

    그때였다.

    시야가 뒤집혀 버린 건.

    마차가 자비 없이 구르고 있었다.

    난 중심을 완전히 잃은 안나를 안았다.

    바로 다음 순간부터 간격 짧은 통증이 온몸에 피어올랐다.

    그리고 다섯 번째 커다란 통증이 왔을 때 나는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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