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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77화 (77/100)
  • 77화

    사랑하지 않을 수 있기란

    “이게 얼마만이에요, 황녀님. 황녀님을 그레이시아나 제국에서 뵙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는데…!”

    감격한 케빈이 눈물까지 글썽이며 말했다.

    캐스티나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 앞의 맥주잔으로 슬쩍 시선을 내렸다.

    거품 빠진 호박색 맥주의 찰랑거리는 수면 위로 케빈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

    케빈은 캐스티나가 플루토나 제국 황녀였던 시절 그녀를 지켰던 호위 기사 중 한 명이었다.

    캐스티나는 사실 케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케빈이 귀족 집안 자제가 아니라 떠돌이 용병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캐스티나는 그녀의 어머니가 평민이라 그녀에게도 평민 호위 기사가 생긴 것으로 생각해 케빈을 마뜩찮게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캐스티나가 티를 낸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케빈은 그런 캐스티나의 속마음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캐스티나와는 반대로 케빈은 캐스티나를 좋아했다.

    가까스로 기사가 된 그가 모시게 된 아름다운 황녀님.

    충성이든 사랑이든 케빈에게 감정이 생겨난 것은 소가 송아지를 낳고 말이 망아지를 낳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이치였다.

    그런데 플루토나 황실이 몰락한 이후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캐스티나 황녀를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다니.

    노을이 지기 시작한 하늘.

    겨울의 내음을 미약하게 담은 공기.

    온도. 습도.

    케빈은 이 모든 순간이 다 꿈인 것만 같았다.

    “고, 공주님. 이것 좀 드셔보세요.”

    케빈이 제 몫으로 나온 닭요리의 다리 부분을 뜯어 캐스티나의 접시에 조심스레 담았다.

    잘 삶아진 닭다리였다.

    한눈에 봐도 평민의 음식 같은 그 음식이, 캐스티나는 영 거북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예의가 뭔질 아는 그녀는 케빈을 향해 잘 재단된 미소를 곧 지어 보였다.

    “고마워, 케빈.”

    캐스티나의 금빛 눈동자와 눈을 마주친 케빈이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 그런 말씀 마세요. 더 좋은 곳으로 모셨어야 했는데….”

    그렇게 말하며 케빈이 주변을 둘러봤다.

    두 사람은 남자 셋이 이야기를 나누던 노상 테이블이 속한 술집 안에 들어와 있었다.

    밖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남자 셋도 캐스티나와 케빈을 따라서 안으로 자리를 옮긴 상태였다.

    “서둘러, 케빈. 더 늦으면 부두목께서 화내실지도 몰라.”

    남자 셋 중 한 명이 케빈에게 말했다.

    ‘부두목. 부두목. 부두목….’

    캐스티나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케빈을 포함한 남자 넷의 손목에 모두 누운 초승달 모양의 문신이 있었다.

    이들 모두 같은 조직에 속해 있는 걸까?

    “조금만 기다려줘. 그래도 오늘은 새로 알게 된 정보가 있으니 쉽게 화내지 않으실 거야.”

    케빈이 그를 재촉한 덩치 큰 남자에게 두 손을 모아 양해를 구하며 말했다.

    ‘새로 알게 된 정보.’

    캐스티나가 생각했다.

    그러곤 조금 아까 엿들었던 남자 셋의 대화 내용을 떠올렸다.

    「확실하다니까. 데려온 게 황궁 기사들이었는데 기사들은 그의 말에 꼼짝 못 하는 듯했고 오늘 얻은 정보가 그 황자가 흑발에 적안이란 정보니.」

    흑발에 적안.

    그렇다면 르나르가 맞았다.

    가까이서 보지 않는 이상 그의 눈동자는 적색으로 보이곤 했으니.

    하나의 내용을 떠올리자 다른 내용들도 연이어 캐스티나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어차피 혼자 다 죽였으면서 황궁 기사들은 대체 왜 끌고 온 거지?」

    「황제에게 본 것을 전하게 하기 위해서였겠지. 어차피 황제가 시킨 일이었을 테니.」

    「누가 시켰든 상관없어. 어차피 그 황자에게 두목 복수는 하고 말 거니까.」

    「하지만 어떻게? 발터, 너도 봤잖아. 그 황자, 보통 인간의 범주가 아니었어. 그 정도면 소드 마스터 급이라고. 남은 우리가 다 덤벼도 결코 이길 수 없을 거야.」

    르나르가 황제의 명령으로 꽤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그중엔 이 조직의 두목도 포함되어 있다.

    부두목은 살아 있고 부두목을 포함한 조직원들은 복수를 원한다.

    하지만 르나르가 뛰어나 복수할 방법이 요원하다.

    그것이 이들의 대화를 통해 캐스티나가 파악할 수 있던 전부였다.

    그리고 캐스티나는 그들이 르나르를 건드리지 않고도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알고 있었다.

    “케빈. 나 중요한 부탁이 하나 있는데.”

    “네, 황녀님.”

    “그 부두목이란 사람. 만나게 해줄 수 있어?”

    “네?! 황녀님께서 저희 부두목님을요?!”

    “닭다리 값은 해야지. 그 복수, 내가 도울 수 있을 것 같거든.”

    닭다리는 손대지도 않은 캐스티나가 케빈을 보며 웃었다.

    * * *

    르나르가 웃었다.

    르나르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잔잔한 비늘구름이 깔린 서쪽 하늘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코웰 저택에 데려다주겠다던 르나르가 나를 데리고 온 곳은 코웰 저택은 물론 수도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였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오늘 노을이 예쁠 것 같단 르나르의 추측은 정답이었다.

    붉은 하늘과 푸른 구름이 적당히 뒤섞인 오묘한 하늘이 내 숨을 멎게 했다.

    르나르의 눈동자와 코웰 가문 남자들의 눈동자를 동시에 닮은 그 하늘을 내가 사랑하지 않기란 불가능했다.

    손가락을 꽉 무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을 느끼게 된 건 그때였다.

    “이게… 뭐예요…?”

    내가 르나르가 뭔가를 끼워놓은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내 머리 색을 닮은 새하얀 다이아몬드가 노을빛을 머금고 반짝 빛났다.

    “반역이 끝나면 저와 결혼해주세요, 대공녀님.”

    르나르가 평소와 다름없는 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놀랐다.

    르나르가 내 손에서 반지를 빼갔다.

    갑자기 받은 것을 갑자기 빼앗긴 내가 더 놀라 르나르를 봤다.

    부드럽게 웃은 그가 내게 한 걸음 다가서더니 내 목을 조심스레 안았다.

    아니, 안는 줄 알았다.

    르나르가 내게서 한 발 짝 멀어졌을 때 그가 내게 끼워줬던 반지는 줄에 엮여 목걸이가 된 채 내 목에 걸려있다.

    “뭘 그렇게 놀라고 놀라십니까. 거절하실지 받아주실지 전혀 감이 안 잡히게.”

    “…르나르…….”

    “지금 당장 대답해달라는 거 아닙니다. 대공 각하께서 군대를 일으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지금 결정하시긴 여러모로 부담스러우실 테니까요. 하지만 대공녀님만 준비되시면 저는 언제든 대공녀님을 제 반려로 맞을 겁니다. 확신이 생기셨을 때 이 반지를 손가락에 끼워주세요. 그럼 제가 알아서 알아듣겠습니다.”

    무어라 말해야 할까.

    보랏빛으로 변하기 시작한 하늘은 아름다웠고 내 눈앞의 르나르는 그보다 눈부셨다.

    하지만 손가락을 무는 반지보다 목에 걸린 목걸이가 훨씬 가볍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걸 눈치챈 듯 르나르가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가 입을 맞췄다.

    내가 밀어내지 않았다.

    혀끼리 얽히기 시작한 우리 두 사람의 키스는 보랏빛 노을이 사라지고 잉크 빛 맑은 어둠이 하늘을 물들이기 시작할 때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 * *

    르나르가 내게 청혼 비슷한 것을 한 다음 날.

    멍한 표정일 내가 창가에 의자를 놓고 앉아 조용히 창밖을 바라봤다.

    짙은 먹구름이 옅게 깔린 하늘이 회색빛이었다.

    하지만 그 밖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실 내 머릿속은 르나르로 가득했다.

    ‘…르나르.’

    내가 좋아하는 르나르.

    날 사랑한다는 르나르.

    나를 반려로 맞겠다는 르나르.

    나도 그를 사랑하는 것 같다.

    그러니 마음 같아선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와 결혼한 내가 갑자기….

    ‘원래 세계로 돌아가게 되면…?’

    올렌도의 저택에서 지내던 시절 코웰 저택에서 저녁만 먹고 돌아가도 발코니에서 내내 나를 기다리던 르나르가 떠올랐다.

    그런 르나르를 나는 혼자 남길 자신이 없었다.

    혹시 모를 상황을 아예 고려하지 않은 건 너무 무책임한 일 같아 보였다.

    그때, 내 방문을 두드리는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 똑- 똑-

    “…누구세요?”

    “아가씨, 저예요. 안나요.”

    “들어와.”

    내 대답에 방문을 연 안나가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안나의 표정이 떨떠름했다.

    “저, 아가씨. 손님이 오셨는데요.”

    * * *

    “차 맛이 정말 좋네요.”

    소서 위에 찻잔을 다소곳이 내려놓은 캐스티나가 싱긋 웃었다.

    내가 마주 웃었다.

    캐스티나가 다시 웃었다.

    그녀의 입꼬리에 작은 경련이 일어났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에요?”

    어제도 얼굴을 봐놓고 오늘 코웰 저택까지 나를 찾아온 캐스티나에게 내가 물었다.

    잠시 망설이던 캐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저, 엘로즈 님. 어제 제게 사정이 있으면 말하라고 하신 거 기억하세요? 도울 수 있는 만큼은 최대한 도와주신다고요.”

    “그럼요. 제가 도울 일이 생겼나요?”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요. 저 올렌도 황자님과 약혼하게 되었거든요.”

    * * *

    내 시선이 맨틀피스 위에 놓인 탁상시계로 향했다.

    아직 오전 10시.

    보던트 귀족 상점 거리에서 가장 인기 있는 드레스 샵이자 가장 빨리 문을 여는 드레스 샵인 롤랑의 드레스 샵이 문을 연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은 이른 시간이었다.

    커튼 안에서 드레스를 갈아입는 캐스티나와 그녀를 돕는 점원들의 부산스러운 소음이 들렸다.

    올렌도와의 약혼식 때 입을 드레스를 직접 골라 선물해달라고 내게 부탁한 캐스티나였다.

    나와 올렌도가 공식적으론 여전히 약혼할 사이였기에 그들은 비밀 약혼식을 계획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드레스를 골라줄 사람이 나밖에 없다면서.

    그녀의 눈빛이 하도 간절해 나는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의 모국인 플루토나 제국을 우리 가문에서 점령할 예정이었기에 캐스티나에게 미안한 마음도 조금은 있었고.

    그레이시아나 제국 군대가 점거 중인 플루토나 황성에 대한 공격.

    그 거사가 바로 코밑까지 다가온 게 오늘이었다.

    오늘 저녁이면 북부에서 출발한 레오와 메이슨 대공의 군대, 영지에서 출발한 코웰 가문의 군대가 포털 근처에 모두 모일 것이었다.

    나와 겔리온, 에반, 미르엣 그리고 르나르도 그들이 도착할 시간에 맞춰 코웰 저택 기사단을 이끌고 포털로 향할 예정이었다.

    아직 시간은 있었다.

    그래도 점심시간이 되기 전엔 코웰 저택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미리 가서 할 일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마음의 준비는 필요할 것 같으니.

    그때, 커튼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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