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노을이 예쁠 것 같아
한참을 물고 빨아 엘로즈의 한쪽 귀가 너덜너덜해질 지경이 되어서야 르나르는 엘로즈를 놓아 줬다.
한껏 상기된 채 훌쩍이는 그녀를 어르고 달래다 보니 어느새 점심 먹을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하지만 르나르는 좀 더 누워 있을 생각이었다.
아직 비누 냄새가 남은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엘로즈가 잠들어 있었기에.
르나르는 그 비누 냄새가 엘로즈를 그의 품에 묶어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오기 직전에 몸을 씻고 싶었는데, 이 여자가 순 제멋대로라 그걸 해내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흘 전엔 오후 늦게 방문하더니 어제는 아예 오질 않았고 오늘은 이른 아침부터 들이닥친 것이었다.
그래도 그에게 귓불을 물린 채 몸을 비틀던 엘로즈를 떠올리면 르나르는 그녀에 관한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르나르는 엘로즈에게 사과를 맛있게 먹는 법을 천천히 알려줄 생각이었다.
엘로즈는 아직 그녀가 먹는 게 사과인지 배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지만.
그때, 엘로즈가 작게 앓는 소리를 내더니 눈을 떴다.
그들이 누운 소파까지 뻗쳐오기 시작한 늦가을 오후의 햇살이 그녀를 깨운 듯했다.
봄날의 라벤더 같은 연보라색 눈동자가 금빛 햇살을 가만히 응시했다.
“일어나셨습니까, 여왕님?”
르나르가 그의 여왕에게 문안 인사를 건넸다.
라벤다를 닮은 연보라색 눈동자가 르나르를 향했다.
그 눈동자를 홀린 듯 바라보던 르나르가 앞머리 사이로 드러난 여왕의 하얀 이마에 경배하듯 입을 맞췄다.
그사이 여왕의 시선은 다시 황금빛 햇살을 향하고 있었다.
“지난 며칠 중 제일 날이 맑아요.”
“…….”
“오늘은 정말 밖에 나가야겠어요.”
르나르의 여왕은 햇빛에 무척 집착하는 중이었다.
르나르가 그의 여왕에게 집착하는 것처럼.
사실, 식물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된 터넛을 보고 우울해졌던 감정을 르나르는 그것을 보게 된 당일 털어버렸다.
엘로즈가 만들어준 스튜를 먹고, 그녀를 허벅지 위에 앉힌 뒤 욕심껏 입을 맞추며.
여전히 우울해한다는 것도 햇빛을 보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도 거짓말이었다.
르나르 대신 더글라스가 엘로즈에게 한 거짓말.
플루토나 제국에서의 축제의 밤 이후 엘로즈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기로 다짐한 르나르였다.
‘하지만 이건 더글라스가 한 거짓말이니까.’
비록 르나르가 시킨 것이었지만, 르나르는 거기까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위로해주는 엘로즈가 무척 좋았고 그녀가 만들어주는 스튜도 좋았으니까.
조금 더 그 특혜를 누리고 싶었다.
하지만 분명한 목표가 생긴 그의 여왕은 전투적이었다.
“빨리요, 빨리. 어서 일어나요.”
르나르의 전완근을 찰싹찰싹 때린 엘로즈가 그의 품을 벗어나 바닥에 발을 디뎠다.
그러곤 르나르를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조금 과장해 르나르의 팔뚝만 한 허리를 가진 엘로즈를 제압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지만 르나르는 굳이 그러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는 몸을 일으켰다.
해냈다는 표정을 짓는 엘로즈가 보기 좋았기 때문이었다.
르나르는 언제고 그렇게 무력할 것이었다.
그의 여왕에게라면.
* * *
계략에 실패하고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 후 한동안 멍했던 캐스티나는 정오 즈음 정신을 차리고 집을 나섰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올렌도가 있는 황궁이었다.
“오랜만이네? 나한테 화가 난 거 아니었나?”
캐스티나를 마주한 올렌도가 빙글거리며 물었다.
“그대와 나의 가짜 사랑놀음은 이제 끝난 건 줄 알았는데.”
올렌도의 말에서 뼈를 느낀 캐스티나가 잠시 침묵했다.
왜 왔느냐 그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캐스티나는 올렌도를 찾아왔어야 했다.
마음을 단단히 먹은 캐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놀라지 말고 들으세요.”
캐스티나가 엘로즈가 마녀란 사실을 올렌도에게 말했다.
르나르가 마법사란 사실은 제외하고.
그런데 캐스티나의 이야길 들은 올렌도가 조용했다.
그는 품 안의 토끼만 조용히 쓰다듬을 따름이었다.
“…왜 아무 말씀이 없으세요?”
“…….”
“설마… 알고 계셨어요…?”
올렌도가 캐스티나의 시선을 피해 창밖을 내다봤다.
캐스티나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캐스티나는 당황했지만, 이내 진정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아셨어도 어떻게 활용해야 모르셨을 수도 있죠. 제가 방법을 알려 드릴게요. 올렌도 황자님께선 엘로즈 님을 르나르 황자님으로부터 빼앗고 싶잖아요? 이제 마녀란 사실을 가지고 엘로즈 님을 협박하면 돼요.”
“…….”
“르나르 황자님과 헤어지지 않으면 마녀란 사실을 공개적으로 알리겠다고. 그럼 제국민들이 가만있지 않을 테니….”
주절주절 이야기하던 캐스티나가 말을 멈췄다.
올렌도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하는 것을 보게 됐기 때문이었다.
올렌도는 허탈하게 웃더니 다시 토끼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재밌네. 서로의 허물을 알지 못했으면 그대와 난 좋은 짝이 되었을 수도 있겠어. 생각하는 방식이 이리도 비슷하니.”
“비슷…하다고요…?”
“내가 예전에 썼던 방법이야. 마녀란 사실을 가지고 대공녀를 협박하는 거. 그렇게 했더니 대공녀가 그대를 데려오더군. 내가 그대와 사랑에 빠져 자신을 놔주길 바라면서.”
“…….”
“대공녀는 그 정도로 나를 원하지 않아. 그런데 대공녀를 협박해 옆에 붙들어놓으면. 과연 내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녀는 날 절대 사랑하게 되지 못할 텐데?”
“…그래서 다 알면서도……, 엘로즈 님과 르나르 황자님이 저대로 이어지는 걸 보고만 있으시겠다고요?”
“뭔가 착각하나 본데 엘로즈는 여전히 내 약혼녀야. 파혼시켜 줄 폐하께서 저 지경이시니.”
“마비가 언제 풀릴지 모르잖아요, 황자님께서 찻잔을 쳐내시는 바람에 충분히 독을 마시지 못하셨으니!”
“입 닥쳐! 내 심기가 뒤틀리면 황족 시해 죄로 너 또한 잡아들일 수 있으니까! 지금은 내가 그대를 벌할 생각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그대는 다행으로 여겨. 대공녀는 그냥 두도록 하고. 그녀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말라는 소리야.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널 그냥 두지 않을 테니.”
올렌도의 마지막 말에 캐스티나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캐스티나의 마지막 희망인 올렌도였다.
그런데 올렌도는 오히려, 엘로즈를 건드리면 캐스티나를 가만두지 않겠노라 협박하고 있었다.
빛을 잃은 캐스티나의 금안이 잘게 흔들렸다.
황궁에서 쫓겨나듯 나온 후.
절망에 빠진 캐스티나는 정처 없이 걸었다.
걷던 곳이 황궁 근처 시장이란 것을 알게 된 건 지나던 행인과 몸을 부딪친 다음이었다.
“어이, 아가씨. 앞 좀 제대로 보고 다녀!”
하마터면 들고 있던 물건을 떨어뜨릴 뻔한 행인이 캐스티나에게 날을 세웠다.
캐스티나가 대충 머리를 숙였다.
지금은 누군가와 다툴 에너지가 남지 않은 캐스티나였다.
캐스티나가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 한적한 뒷골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캐스티나의 머릿속에서 한껏 억울해진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녀인데…, 마녀인데…! 그런데 그냥 둘 수밖에 없다니…!’
안 그래도 그녀가 좋아하지 않는 엘로즈였다.
그런데 마녀였다.
캐스티나가 증오하는 마녀.
그런 엘로즈를 지켜만 봐야 한단 사실에 캐스티나는 창자가 끊어질 것만 같은 고통을 느꼈다.
사실 르나르가 마법사인 것도 싫었다.
캐스티나는 마녀뿐 아니라 마법사도 싫어했으니.
하지만 르나르는 캐스티나가 원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어쩔 수 없다고, 그냥 두자고 캐스티나는 생각했다.
참 이중적인 잣대였다.
그리고 캐스티나가 엘로즈와 르나르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던 바로 그때, 르나르의 이름이 운명처럼 그녀 귀에 걸려 들어왔다.
“르나르 황자가 확실해? 확실하냐고.”
술집 앞 노상 테이블에 앉은 험악하게 생긴 남자가 뱉은 말이었다.
움찔한 캐스티나가 근처 작은 골목 안으로 몸을 숨겼다.
다행히 테이블과 골목 사이 거리가 멀지 않아 술을 마신 남자 셋의 대화는 곧 캐스티나 귀에 정확히 꽂혀 들기 시작했다.
“확실하다니까. 데려온 게 황궁 기사들이었는데 기사들은 그의 말에 꼼짝 못 하는 듯했고 오늘 얻은 정보가 그 황자가 흑발에 적안이란 정보니.”
“어차피 혼자 다 죽였으면서 황궁 기사들은 대체 왜 끌고 온 거지?”
“황제에게 본 것을 전하게 하기 위해서였겠지. 어차피 황제가 시킨 일이었을 테니.”
“누가 시켰든 상관없어. 어차피 그 황자에게 두목 복수는 하고 말 거니까.”
“하지만 어떻게? 발터, 너도 봤잖아. 그 황자, 보통 인간의 범주가 아니었어. 그 정도면 소드 마스터 급이라고. 남은 우리가 다 덤벼도 결코 이길 수 없을 거야.”
대화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캐스티나의 금안이 가늘어졌다.
그때, 캐스티나를 부르는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캐…, 캐스티나 황녀님…?”
* * *
코끝에 따뜻하고 축축한 감각이 와 닿았다.
흠칫 놀라 눈을 뜨니 날 핥은 사슴이 잔디밭으로 풀쩍 뛰어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뒤이어 르나르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잠꾸러기 여왕님, 결국 일어나셨네요?”
햇볕을 쬐게 하려고 르나르를 끌고 뒤뜰에 나온 나였다.
벤치에 그를 눕힌 뒤 나는 흔들의자에 앉아 그를 감시하고 있었는데 그러다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시간도 꽤 많이 지난 것 같았다.
하늘은 여전히 새파랬지만 구름이 붉은빛을 머금기 시작한 것을 보면.
곧 노을이 질 것 같았다.
“왜 안 깨웠어요.”
“많이 피곤해 보이셔서요.”
“…….”
요즘 잠이 부족하긴 했다.
플루토나 황성을 점령한 후 어떤 정책을 펼쳐야 할지 한창 고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실 세계에서부터 가져온 지식은 겔리온의 정책 구상을 돕는데 확실히 도움이 됐다.
그래서 몇 가지 조언을 건네다 나까지 정책 구상에 참여하게 됐고.
“저택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르나르가 선뜻 내게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이상했다.
‘왜 자고 가라고 제안하지 않고.’
사흘 전에도 나흘 전에도 내가 떠나려 하면 그가 예외 없이 그랬듯.
르나르가 그런 내 의문을 이해한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그러곤 뜻 모를 소리를 했다.
“오늘은 노을이 예쁠 것 같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