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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75화 (75/100)
  • 75화

    단발

    나흘 후.

    냉기를 품은 가을바람이 아침을 맞은 갈색 지붕의 집 창문을 두드렸다.

    캐스티나가 창가로 다가섰다.

    조금 전 마차에서 내린 엘로즈가 맞은편 갈색 지붕의 집 현관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내 문이 열렸고, 르나르가 나왔다.

    엘로즈를 보는 르나르의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어났다.

    캐스티나의 금안이 가늘어졌다.

    곧 르나르는 엘로즈를 에스코트 해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두 사람이 캐스티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캐스티나가 창을 등지고 돌아섰다.

    그런데 그녀의 입가에 헤벌쭉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저 속을 뒤틀리게 하는 꼴을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 * *

    똑- 똑똑-

    “누구세요?”

    안에서 엘로즈의 목소리가 들렸고 캐스티나는 답하지 않았다.

    창가 쪽에서 흰 형체가 어른거리듯 하더니 곧 문이 열렸다.

    “케이시! 오랜만이네요! 무슨 일이에요?”

    엘로즈는 반가운 목소리로 캐스티나의 이름을 부른 뒤 용건을 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연보라색 눈동자에 반쯤 경계심이 담겨있는 것을 캐스티나는 눈치챌 수 있었다.

    이에 캐스티나가 두 눈을 휘어 더욱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에요, 엘로즈 님!”

    그녀가 머리를 기울이자 새빨간 양귀비 꽃잎을 닮은 그녀의 머리카락이 턱 아래서 찰랑댔다.

    그제야 캐스티나의 변화를 눈치챈 엘로즈의 눈이 커졌다.

    “케이시, 머, 머리가….”

    “어때요? 잘 어울려요?”

    단발이 된 머리를 살짝 들어 보이며 캐스티나가 엘로즈에게 물었다.

    엘로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표정은 여전히 당황한 표정이었다.

    “엄청…, 짧아졌네요…. 예쁘긴 한데….”

    “올렌도 황자님께 챙겨드리고 싶은 선물들이 있었거든요. 황제 폐하께서 그렇게 되시고 요즘 부쩍 우울해 하셔서…. 그런데 다 사려니 선물값이 꽤 돼서 값을 치르려면 머리를 잘라 팔아야 했어요.”

    “저런. 그런 사정이 있었으면 내게 말을 하죠. 내가 도울 수 있는 만큼은 최대한 도왔을 텐데.”

    “다음부턴 그럴게요.”

    방긋 웃은 캐스티나가 집안으로 들어섰다.

    엘로즈가 채 깨닫게 되기도 전이었다.

    집안에 발을 들이는 것에 성공한 캐스티나는 거실 테이블 위에 빠르게 그녀가 가지고 온 것들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잘 구워진 쿠키, 갓 끓인 차가 담긴 티팟 등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엘로즈가 그녀를 만류하기 전 캐스티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차가 올렌도 황자님을 위해 준비한 선물 중 하나예요.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 효과가 있어 우울한 마음을 다스리는데 좋다고 하더라고요. 아버지가 그렇게 된 건 르나르 황자님도 마찬가지시니 차를 좀 드셔보시라고 가져왔어요.”

    예상대로 그 말을 들은 엘로즈가 멈칫하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캐스티나는 바구니에서 빈 찻잔을 꺼내 티팟에서 차를 따라 마셨다.

    “음- 향이 좋아요. 다행히 아직 따뜻하기도 하네요.”

    그러자 엘로즈의 눈빛에서 경계심이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캐스티나가 미소 지었다.

    ‘선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뒤로는 의심이나 하고 있었다니. 가증스러워라.’

    속으로 뇌까린 캐스티나가 엘로즈를 보며 더욱 밝게 웃었다.

    마침 욕실로 추정되는 쪽에서 머리칼이 젖은 르나르가 나왔다.

    어쩐지 문이 너무 쉽게 열리는가 싶더니.

    캐스티나에겐 문을 열 줄 모르는 그 남자가 자리를 비운 것이었다.

    엘로즈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고 목욕을 한 걸까?

    왜?

    ‘울 수 없다면 웃어야지.’

    최대한으로 입을 찢어 웃는 캐스티나의 입꼬리에 작은 경련이 일어났다.

    그런 캐스티나를 잠시 보던 르나르가 테이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단발머리는 아예 눈치채지 못한 모양새였다.

    “이것들은 다 뭐지?”

    테이블을 훑는 르나르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캐스티나가 얼른, 빈 찻잔에 차를 따라 르나르에게 내밀었다.

    “드셔보세요, 황자님. 우울한 감정을 다스리는데 좋은 차예요.”

    르나르가 잔을 받지 않았다.

    울상이 된 캐스티나가 잔을 엘로즈 쪽으로 돌려 내미니, 엘로즈가 그녀의 잔을 받아들며 한 마디를 더 보탰다.

    “먹어봐요, 르나르. 요즘 부쩍 우울해했잖아요.”

    “그건….”

    그러자 르나르가 무언가 반박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다 다물었다.

    털어놓기 곤란하다는 듯.

    그 사이 캐스티나는 엘로즈가 대신 든 찻잔을 엘로즈의 입가로 밀어 넣는 중이었다.

    “드셔보세요, 엘로즈 님. 향이 좋아요.”

    찻잔이 엘로즈의 입술에 닿았다.

    그러자 엘로즈의 손에서 찻잔이 사라졌다.

    르나르가 빼앗아 든 것이었다.

    아직 마시진 않았지만 결국 찻잔을 들게 된 르나르를 보며 만족한 캐스티나가 테이블 너머로 돌아간 뒤, 빈 찻잔에 차 한 잔을 더 따랐다.

    그 찻잔은 엘로즈 쪽을 향해 놓였다.

    그리고 캐스티나는 그녀가 그녀 몫으로 미리 따라놓은 차를 맛있게 마시기 시작했다.

    같은 티팟에서 나온 차를 캐스티나가 함께 마시고 있었으니 르나르도 엘로즈도 캐스티나가 가져온 음식들을 더 의심할 수는 없었다.

    “이 쿠키도 좀 드셔보세요, 보던트 귀족 상점 거리 빵 가게에서 산 것인데 정말 맛있네요!”

    캐스티나가 일부러 하나의 쿠키를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그중 하나를 입에 넣으며 말했다.

    이내 엘로즈가 쿠키와 차를 조금씩 입에 대기 시작했다.

    르나르도 무의식중에 들고 있던 차를 마셨다.

    캐스티나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캐스티나의 얼굴은 사색이 되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이쯤 되면 반응이 나타나야 하는데…?’

    상대로 하여금 캐스티나에게 깊은 호감을 느끼게 하는 마법약이 섞인 차였다.

    약을 끓이는 불 속에 던져진 머리카락의 주인인 캐스티나에게는 별다른 영향이 없는 약이었다.

    어차피 캐스티나만큼 캐스티나를 사랑할 수 있을 사람도 없기도 했고.

    이 약을 만들기 위해 캐스티나는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는 긴 머리를 잃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 희생이 너무도 우습게, 르나르도 엘로즈도 차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이미 캐스티나를 보는 눈빛 자체가 달라졌어야 했는데.

    제조법에 문제가 있던 걸까?

    ‘아니, 아버지께 사용했던 약도 같은 배합이었어. 게다가 내가 만든 약이 잘못되었을 리가 없어.’

    캐스티나는 마법약을 만드는 것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차를 마신 르나르의 캐스티나를 보는 눈빛은 여전히 싸늘했고, 반대로 엘로즈를 보는 눈빛은 더없이 따스했다.

    엘로즈 또한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이유는 하나였다.

    ‘두 사람 다…… 일반 사람이 아니구나.’

    일반 사람들에게 통하는 마법약과 마녀와 마법사에게 통하는 마법약은 같은 목적을 가진 약이라도 필요한 재료 자체가 달랐다.

    게다가 마녀와 마법사에게 통하는 호감을 일으키는 마법약은 밝혀진 제조법이 없었다.

    허탈한 캐스티나는 웃을 수조차 없었다.

    ‘마녀와… 마법사였어…….’

    캐스티나의 머릿속에선 마녀와 마법사들의 반란으로 황실이 뒤집어지던 그날의 기억이 재생되고 있었다.

    * * *

    “…쿠키가 정말 맛있어요!”

    내가 어쩐지 표정이 좋지 않은 캐스티나를 향해 말했다.

    빈말은 아니었다.

    어떻게 구운 건진 몰라도 정말 잘 구웠단 생각이 들었으니까.

    조만간 보던트 귀족 상점 거리에 한 번 들러야겠다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될 지경이었다.

    신의 손을 가진 마카롱 장인은 비록 황실에 빼앗겼지만, 이 완벽한 쿠키를 구울 줄 아는 쿠키 장인만큼은 빼앗기지 않기 위해.

    그런데 그때, 얼굴이 새하얘진 캐스티나가 중얼거렸다.

    “어머나, 세상에. 빨래를…, 빨래를 물에 넣어놓고 그냥 왔네요. 내 정신 좀 봐….”

    그러곤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 집 밖으로 나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케이시?”

    내 부름에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바구니 역시 챙기지 않은 채.

    내가 바구니와 티팟 등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그러자 르나르가 날 잡았다.

    “그냥 두시죠? 나중에 더글라스 보고 가져다주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내 허리를 감싸 안은 채 테이블 옆 소파로 몸을 뉘었다.

    나는 눈 깜짝할 새 그의 품에 곰 인형처럼 안긴 꼴이 됐다.

    내 머리칼에 르나르가 볼을 문질렀다.

    마치 곰 인형에 얼굴을 비비는 어린아이처럼.

    “저 위로해주시러 오신 거 아니었습니까? 그럼 저한테 집중해주셔야죠.”

    르나르의 말은 사실이었다.

    오늘을 포함해 나흘 중 사흘을 나는 르나르를 챙기러 이 집에 방문하고 있었다.

    더글라스로부터 여전히 르나르가 터넛 일로 우울해한단 이야기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햇빛 아래 나가지 않으려 한다며.

    “내가 오늘은 기필코 르나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갈 거예요.”

    나를 안고 나른한 표정을 짓는 르나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내가 전의를 다졌다.

    그런 나를 내려다보며 르나르가 피식 웃었다.

    “전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요?”

    “그래도….”

    “조금만 더 이렇게 있으면 안 되겠습니까?”

    르나르가 내 머리 아래 팔을 넣어 팔베개를 해주며 물었다.

    다른 손으론 내 머리를 빙빙 꼬는 중이었다.

    가까운 그에게서 향긋한 비누 냄새가 났다.

    나는 전의를 조금 상실하게 됐다.

    “그럼 아주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이러고 있는 거예요…?”

    “네, 대공녀님.”

    “근데 잠깐. 생각해보니 지난 며칠도 이러다 밤까지 누워만 있었던 것 같아요.”

    “어제는 대공녀님께서 안 오셨으니 이틀 전과 사흘 전만요. 근데 어제는 왜 안 오셨습니까?”

    르나르가 내 머리를 손가락에 감던 것을 멈추고 몸을 조금 일으키더니 볼멘소리로 물었다.

    미안한 마음에 기가 조금 죽은 내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어제는…, 제가 조금 바빴어요. 오빠들 반역 준비를 돕느라….”

    르나르가 가만히 날 노려봤다.

    그러더니 내 위로 몸을 덮었다.

    “벌입니다.”

    낮게 속삭인 그가 내 귓불을 씹었다.

    “아……!”

    날카로운 내 비명이 황금빛 가을 공기를 찢자 르나르의 숨결이 조금 거칠어졌다.

    그는 이내 내 귓바퀴를 핥고 물기 시작했다.

    나는 문득 억울해졌다.

    ‘나흘 전에도 오고, 사흘 전에도 오고, 오늘도 왔는데.’

    그런데 왜 벌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내 자의로 그를 위해 오는 것일 뿐이었는데.

    이해 못 해 반항하는 나의 발등이 점점 곱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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