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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74화 (74/100)
  • 74화

    요리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다…다친 걸까…?’

    그때, 르나르 쪽에서 은은한 비누 냄새가 풍겼다.

    깊은 와인 향과 뒤섞인 비누 냄새.

    르나르는 다쳐 쓰러진 게 아니라 피범벅이 된 옷은 욕실 바닥에 버려두고 그의 몸만 깨끗이 씻은 채 술에 절어 잠들어 있던 것이었다.

    몸에 걸친 옷가지라곤 얇은 바지 한 장인 채.

    ‘도대체 술을 대체 얼마나 마신 건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르나르가 이렇게 무방비한 모습은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가 가까이 다가가도 잠에서 깰 줄을 몰랐다.

    나는 침대 끝에 버려져 있던 이불을 끌어당겨 르나르의 헐벗은 몸을 덮어줬다.

    그때 삐이 삐이 하는 이상한 소리가 르나르의 침실 구석에서 들려왔다.

    내 시선이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시선 끝에 작고 하얀 사슴이 걸려왔다.

    ‘뭐…, 뭐지…?’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곧 사슴을 키울 거라고 했던 르나르의 말을 떠올렸다.

    “안녕? 네가 그 사슴이구나? 넌 이름이 뭐니?”

    내가 묻자 사슴이 다시 삐이 삐이 소리를 냈다.

    낯선 나의 등장을 주인인 르나르에게 경고하고 싶은 듯했다.

    그때, 눈이 반쯤 감긴 르나르가 고개를 들어 사슴 쪽을 봤다.

    “엘로즈, 왜.”

    삐이- 삐이-

    “배고파?”

    삐이- 삐이-

    “이리 와.”

    르나르가 사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사슴이 방석에서 일어나 르나르 쪽으로 걸어갔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르나르가 나를 보고 놀랐다.

    “…대공녀님?! 언제 오셨습니까?”

    “비밀이라던 사슴의 이름이 엘로즈였어요?”

    “그… 그게….”

    삐이- 삐이-

    르나르 쪽으로 향하다 내 쪽으로 방향을 튼 사슴이 내 손끝을 혀로 핥으며 앙증맞은 소리를 냈다.

    * * *

    “찻잔을 직접 쳐내셨다고요?”

    캐스티나가 서늘한 금안으로 올렌도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래.”

    올렌도가 무심히 답했다.

    “찻잔의 색이 변했다고도 하셨다면서요.”

    “그랬지.”

    “아시잖아요. 찻잔에 전혀 영향을 끼칠 수 없는 독이었어요.”

    “난 알았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몰랐으니까. 멀쩡한 찻잔은 진즉 처리했어.”

    캐스티나의 계획을 망친 올렌도의 태도는 당당했다.

    억울해진 캐스티나가 이를 아득 물었다.

    “폐하께서 마비라도 되셨으니 다행이지 독이 전혀 영향이 없었으면 어쩌려고 그러셨어요?”

    “다행? 지금 내 아버지가 식물 같은 상태가 된 게 다행이라고 한 건가?”

    올렌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올렌도에게서 그런 반응이 나올 것을 전혀 예상치 못한 캐스티나가 몸을 움찔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살며시 떨리기 시작했다.

    “화…황자님께서도 동의하신 일이잖아요…!”

    “동의라기보단 방관이었어.”

    “어차피 사이도 안 좋으셨으면서 이제 와 왜 그러세요?”

    “내가 내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게, 그대가 내 아버지에게 해를 끼쳐도 될 이유가 되는 건 아니야. 어쨌든 나도 이 일에 책임이 있으니 그대를 벌하진 않겠지. 하지만 내 앞에선, 그 입을 조심하도록 해. 예쁜 입술이 얼기설기 꿰매지는 걸 원하는 게 아니라면.”

    뭐라고?

    놀란 캐스티나가 자그마한 손을 들어 제 입술을 가렸다.

    그런 캐스티나를 보는 올렌도가 피식 웃었다.

    하지만 올렌도의 눈빛에 담긴 건 분명 적의였다.

    그때, 티테이블 위에서 건초를 먹던 토끼가 올렌도 쪽으로 움직였다.

    올렌도가 그런 토끼의 뒷덜미를 들어 제 품에 안았다.

    올렌도에게 안긴 토끼는 편안해 보였다.

    토끼를 보는 올렌도의 눈빛은 다정했고.

    내가 저 토끼보다 못한 존재란 말인가?

    비참함을 느낀 캐스티나가 기가 막혀 실소를 흘렸다.

    * * *

    달그락- 달그락-

    고기를 담가 놓은 물이 끓기 시작하자 수증기에 밀린 냄비 뚜껑이 움직이며 소리를 냈다.

    뚜껑을 열자 하얀 수증기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주방 창문을 열었다.

    먹구름이 걷히고 맑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하늘이 새파랬다.

    비가 조금 내렸던 듯 공기는 촉촉했다.

    나는 창문 아래 간이 테이블 앞에 서서 당근을 썰기 시작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내 허리를 안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르나르의 목소리엔 진심 어린 의문이 담겨있었다.

    하기야.

    귀족 영애가 직접 요리하는 건 이 세계에선 흔한 일은 아니었다.

    “스튜를 끓이고 있어요.”

    “스튜요?”

    다음 순간 내 몸이 돌아갔고 내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눈앞에 혼란에 빠진 르나르의 적갈색 눈동자가 보였다.

    그가 나를 들어 간이 테이블 위에 앉힌 것이었다.

    “스튜를 끓이신다고요? 대공녀님께서?”

    르나르의 적갈색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믿지 못하겠나요?”

    “…….”

    “맛을 보고 나면 더 믿지 못할 거예요.”

    자신 있던 내가 입꼬리를 한쪽만 당겨 웃었다.

    “…대공녀님. 스튜에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왜요? 어떤데요?”

    “정말… 정말 맛있습니다.”

    스푼을 들자마자 내가 담아준 스튜의 절반을 먹어버린 르나르가 한 말이었다.

    스스로를 먹여 살리기 위해 요리해야 했던 현실 세계의 내 요리 실력이 아주 녹이 슨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최고네요.”

    르나르가 멈추지 않고 감탄했다.

    “술 많이 마신 것 같아서. 특별히 만들어준 거예요.”

    “그런 거였습니까? 매일 술 마셔야겠네요.”

    “그러라는 소리 아니었어요. 단지 해장이 필요할 것 같아서.”

    내가 눈을 가늘게 뜨자 르나르가 웃었다.

    내가 식탁 위에 팔꿈치를 올리며 르나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런데 술 말이에요. 갑자기 무슨 술을 그렇게 마신 거예요? 원래 술 좋아했어요?”

    원작의 르나르를 떠올리며 내가 물었다.

    원작의 르나르는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술로 인해 정신이 흐려지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내 앞의 르나르도 축제에서조차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았었고.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왜….”

    “오늘은 마시고 싶었습니다.”

    “…….”

    “정신을 흐리게 만들고 싶었거든요.”

    “…….”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서….”

    “이유를…,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르나르가 스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스푼으로 천천히 스튜를 젓던 그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터넛 황제가 독에 중독됐다는 말을 듣고 황성에 다녀왔습니다. 몰래 황제를 봤는데, 죽은 것보다 못한 상태더군요.”

    “…….”

    “대공녀님께서도 아예 모르셨지 않겠지만 전 언젠간 황제에게 복수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누워있으니…. 어찌해야 할 줄을 모르겠더군요.”

    그래서 괴로운 걸까?

    그가 복수하고 싶었는데 다른 사람에게 그 기회를 빼앗겨서?

    단지?

    ‘정말 그것 때문에…, 저렇게 슬픈 눈을 하고 있다고…?’

    “시체 같은 아버지를 보는데…. 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적 있었었나요? 병으로 죽은 어머니 시체를 제가 치웠다고…. 아버지 꼴을 보니 곧 그 시체도 치워져야 할 것 같던데, 하…. 분명 기뻐야 하는데…….”

    스튜를 젓던 르나르의 손이 멈췄다.

    그의 눈동자는 스튜를 향해 있었지만,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의자에서 일어난 내가 맞은편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그의 머리를 안아 내게 기대게 했다.

    “…방금 황제 폐하를 아버지라고 부른 거 알아요?”

    “…….”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르나르 마음 알 것 같으니까.”

    “이렇게 안겨있으니 아이가 된 것 같네요.”

    “아이가 되어도 괜찮아요. 르나르에게 위로만 될 수 있다면.”

    르나르가 내 허리를 들어 나를 그의 허벅지 위에 앉혔다.

    그리고 진하게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 * *

    황궁에서 갈색 지붕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

    캐스티나는 올렌도를 원망했다.

    ‘왜 막판에 일을 망쳐버린 걸까? 독을 조금밖에 마시지 않아 터넛 황제가 다시 움직이게 되면 어떡하지? 황제가 정상이 되면, 르나르와 엘로즈를 이어주려 할 텐데?!’

    캐스티나의 걱정은 그것이었다.

    황제를 독살하려 한 죄가 밝혀질까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마법약은 완벽했다.

    평범한 시약에는 결코 반응하지 않는 성질의 것이었다.

    게다가 그레이시아나 제국 일반 사람들은 플루토나 제국 일반 사람들만큼이나 마법에 대해서는 무지했으니, 황제에게 가해진 독의 정체는 더더욱 미궁에 빠지게 될 것이 분명했다.

    캐스티나는 마력 없이도 마법약 공부를 해둔 것을 새삼 다행으로 생각했다.

    물론 플루토나 제국 또한 그레이시아나 제국만큼이나 마법과 그에 관련된 것들에 대한 반감이 심했다.

    아니, 사실 그레이시아나 제국보다 심했다.

    따지고 보면 플루토나 제국이 먼저였다.

    마녀와 마법사들을 차별하고 탄압하기 시작한 것.

    마녀와 마법사들의 반란이 일어난 이유가 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캐스티나가 위험을 무릅쓰고 마법약을 공부한 것은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평민 후궁의 사생아로 태어난 그녀는 금지된 마법약을 공부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했다.

    쟁쟁한 가문을 뒷배경으로 둔 형제, 자매들이 언제 그녀를 죽일지 몰랐기 때문에.

    다행히 그녀는 마법약 제조에 재능이 있었고, 12살 즈음,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녀에게 깊은 호감을 갖게 하는 마법약을 만들어내는 것에 성공했다.

    그녀는 그것을 황제인 아버지에게 먹였다.

    황제의 사랑을 받게 되니 그 뒤론 모든 것이 쉬웠다.

    비록 그 후 얼마 안 가 마녀와 마법사들의 반란이 일어나 그 혜택을 길게 누리진 못했지만.

    그래도 그녀가 정한 사람의 사랑을 받는 세계에서 그녀는 완벽했다.

    지금 그녀가 정한 이는 르나르였다.

    그에게 사랑을 받는다면, 그녀는 다시 아버지 황제에게 사랑을 받던 시절처럼 완벽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만 했다.

    그녀는 캐스토나 플루토나니까.

    그녀를 둘러싼 세상의 주인공이 되어야 했다.

    캐스티나에게 세상은, 결국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캐스티나가 떠올렸다.

    황제에게 사랑받던 시절.

    심성 또한 곱다고 평가받던 그때 그 시절을.

    ‘나는 원래 착한 사람이야. 지금은 단지, 상황상 어쩔 수 없을 뿐이야.’

    캐스티나가 그렇게 그녀의 악행을 정당화했다.

    그런 자기중심적인 생각들이 가책 없이 이어지고 있었을 때, 캐스티나는 그녀가 머무는 갈색 지붕의 집에 도착했다.

    습관처럼 건너편 집 창문을 들여다봤다.

    ‘르나르는 뭐 하고 있을까?’

    의자에 앉은 르나르가 보였다.

    엘로즈가 그를 안고 있었다.

    캐스티나의 금안이 가늘어졌다.

    다음 순간 르나르가 엘로즈를 허리를 잡아 들어 올렸고, 그의 허벅지 위에 앉힌 뒤 입을 맞췄다.

    캐스티나가 쥐고 있던 열쇠를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꽉 쥐었다.

    ‘그 방법을…. 결국 그 방법을 쓸 수밖에 없겠어.’

    캐스티나가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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