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곧 겨울
“…황자님?”
올렌도였다.
“…대공녀가 왜 여기 있지? 꿈인가? 보고 싶은 게 보이는 걸 보니….”
올렌도가 혼잣말인 듯 중얼거렸다.
“여기서 뭐 하셨어요?”
내가 물었다.
그의 손끝에서 작은 물방울들이 방울방울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올렌도가 걸어 나온 듯한 돌기둥 사이를 보니 멀지 않은 곳에 분수대가 보였다.
저기서 물이라도 젓고 있던 걸까?
“…고민이 있어서.”
“고민이요?”
캐스티나와 사랑에 빠지고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는 줄만 알았는데.
둘 사이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지….
“뭔데요, 그 고민이?”
“대공녀한텐 말해줄 수 없는 문제야.”
올렌도의 대답에 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뒤돌아 멀어지려 했다.
그때, 나를 붙잡는 올렌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있지, 후회할 것 같은 선택을 내려야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이상한 질문이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시죠? 후회할 것 같은 선택이면 그 선택을 안 하시면 되잖아요.”
“그걸 선택하지 않으면 내가 나약한 사람이 되어버려서.”
「너같이 나약하고 무능력한 아들을 낳은 황후였기 때문에…!!」
과거 터넛이 올렌도에게 한 말이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약함.
그것은 올렌도를 향한 터넛의 수많은 부정적 정의 중 하나였다.
“저는 솔직히…, 황자님께서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나약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후회해야 한다면 차라리 나약한 사람이 되는 게 낫지 않을까요?”
“하지만 나약한 건….”
“그리고 말이에요. 황자님께서 나약하시다고 하는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권리는 대체 누구에게 있는 거죠?”
“…….”
“이 토끼요, 황자님께 드릴게요. 보호가 필요한 토끼예요. 이 토끼를 잘 지켜줄 수 있고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전 그렇게 나약한 사람은 아닐 거라고 봐요.”
“……아….”
“사실 증명할 필요도 없어요. 황자님께서 나약하시지 않다는 걸 대체 어떻게, 뭘 위해 증명할 건가요? 그래도 황자님께서 나약하시지 않다는 작은 믿음이라도 필요한 거면 이 토끼를 잘 키워보세요. 이 토끼만 잘 커도, 적어도 저는 황자님께서 그렇게 나약하시지 않다고 생각하게 될 것 같으니까요.”
“…….”
올렌도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래도 내가 토끼 케이지를 넘기니 군말 없이 케이지를 받아들었다.
“이 토끼…. 날 닮았네…?”
묘하게 울렁거리는 목소리로 올렌도가 말했다.
터넛 황제가 괜히 연한 분홍색 토끼를 준비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올렌도 눈에도 그와 닮아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럼 내가 이 토끼의 아빠가 되는 건가?”
올렌도가 별안간 내게 물었다.
황당한 생각에, 내 입술 새로 막지 못한 작은 웃음이 흘렀다.
올렌도가 잠잠한 눈길로 날 응시했다.
“…대공녀. 그렇게 웃을 수도 있구나.”
“…….”
“르나르와 있으면 자주 웃겠지?”
“…….”
“나는 대공녀를 웃게 할 수 없고.”
“…….”
“새삼 그 녀석이 부러워지네.”
끝을 달리는 가을의 햇살이 회랑 돌기둥 사이를 지나 올렌도와 내 사이를 가로질렀다.
곧 겨울이 올 듯했다.
* * *
엘로즈가 황궁에 다녀간 다음 날.
올렌도는 그의 방 창가에 서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낙엽이 깔린 정원은 화려하면서도 황량했다.
올렌도의 품 안에서 토끼가 작게 움직였다.
“왜 그래, 배가 고프니?”
올렌도가 다정한 목소리로 토끼에게 물었다.
토끼가 그에게 닿아오는 올렌도의 손가락에 머리를 비볐다.
올렌도의 연하늘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곧 터넛 황제가 애프터눈 티를 마실 시간이었다.
「맹독이에요. 조금만 치사량을 넘겨도 황제는 즉사할 거예요.」
캐스티나의 목소리가 다시금 올렌도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요 며칠 그의 귓가에 끊임없이 울려 퍼진 그 목소리.
그 단어들.
「맹독이에요.」
「즉사할 거예요.」
「조금만 치사량을 넘겨도.」
「황제는 즉사할 거예요.」
올렌도는 숨이 턱 막혀왔다.
「대체 뭘 망설이시는 거예요? 황제 폐하와 사이가 안 좋으시다면서요.」
「폐하만 사라지면, 황자님께선 황자님 약혼을 지켜낼 수 있는 거예요.」
「정신 차리세요! 꼭 이곳이 아니더라도 온갖 대륙 황가에서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이 벌어지는지 아세요?」
「…나약하시네요.」
나약하단 그 말에 올렌도는 결국 무릎을 꿇었었다.
나약하지 않기 위해선 증명해야 했다.
평생 그를 깔보고 무시한 아버지의 죽음 따윈 그에겐 아무것도 아니란 사실.
그런데….
「이 토끼를 잘 지켜줄 수 있고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전 그렇게 나약한 사람은 아닐 거라고 봐요.」
대공녀는 말했다.
겨우 이 토끼를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이면 나약한 사람이 아니라고.
그리고.
「사실 증명할 필요도 없어요. 황자님께서 나약하시지 않다는 걸 대체 어떻게, 뭘 위해 증명할 건가요?」
「황자님께서 나약하시다고 하는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권리는 대체 누구에게 있는 거죠?」
증명할 필요도 없다고 했다.
그가 나약하지 않다는 걸 증명할 필요가 없다고.
그리고 그가 나약하다고 평가 내릴 수 있는 권리가, 대체 누구에게 있는 거냐고.
그 순간 토끼가 다시 올렌도의 손가락에 머리를 비볐다.
올렌도는 그를 무시하는 아버지에게 그 평가를 내릴 권리를 주고 싶지 않아졌다.
캐스티나에게도.
차라리 이 토끼나 엘로즈라면 모를까.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올렌도가 토끼를 부드러운 방석 위에 내려놨다.
“밥은 다녀와서 줄게.”
방을 나선 올렌도가 달리기 시작했다.
* * *
에드워드 코웰 대공의 집무실.
아직 해가 지기 전 시간이었지만 곳곳에 밝혀둔 램프등 불빛이 일렁였다.
짙은 먹구름이 해를 가려버려 어두운 날이었다.
대공은 집무실에 없었다.
하지만 대공을 닮은 세 남자의 순금 같은 금발이 맑은 날 가을 햇살보다 눈 부셨다.
코웰 형제들은 내게 막바지에 다다른 반역 계획을 설명해주는 중이었다.
“플루토나 제국 수도와 황성만 점령하면 사실상 플루토나 제국이 우리 손에 들어온 것으로 보면 돼. 터넛 황제의 통치에 불만이 많았던 기존 플루토나 제국 귀족들이, 저항 없이 우리를 따르겠단 뜻을 삼삼오오 전해오고 있으니까. 그리고 플루토나 제국을 안정시킨 다음 그레이시아나 제국을 공격할 거고.”
겔리온이 내게 설명했다.
그때, 코웰 가문 집사가 집무실에 들어섰다.
집사는 은색 트레이에 놓인 편지를 미르엣에게 건넸다.
편지를 뜯어 읽던 미르엣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뭔데 그래?”
미르엣의 표정을 살피며 에반이 미르엣에게 물었다.
심각한 표정의 미르엣이 답했다.
“황궁의 친한 기사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터넛 황제가 독에 중독되어 마비된 채 쓰러졌대.”
“!”
미르엣의 말을 들은 겔리온, 에반, 나, 모두가 놀랐다.
“정말 마비됐다고? 황제는 웬만한 독에 면역되어 독으론 치명상을 입을 수 없을 텐데?”
당황한 겔리온이 미르엣의 편지를 빼앗아 들었다.
나는 그 순간 캐스티나를 떠올렸다.
‘설마 캐스티나가… 설마….’
“마침 터넛 황제를 보러 갔던 올렌도 황자가 황제가 마시던 찻잔의 색이 변한 것을 발견했대. 그래서 찻잔을 쳐냈다고. 그 덕에 황제는 죽지 않았는데, 그래도 사지가 마비되고 혀는 굳어 말도 못 하는 상태라고…. 당분간은 올렌도 황자가 황제의 대리 집행자가 될 것 같다는데?”
미르엣이 편지 내용을 에반과 나에게 설명했다.
“이러다 황제가 급사해 올렌도 황자가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거 아니야?”
에반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상관없어. 터넛 황제를 무너뜨리는 것보단 올렌도 황자를 치워버리는 게 쉬울 수 있지.”
미르엣이 답했다.
그때, 르나르의 집에서 막 도착한 더글라스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저 왔습니다, 대공자님들. 아. 안녕하세요, 대공녀님. 지난번에 물어보셨던 내용. 추가로 알게 된 게 있어 설명해 드리러 잠시 들렀습니다.”
더글라스가 품에 안고 온 지도를 응접용 테이블 위에 펼쳐놓으며 말했다.
“더글라스, 터넛 황제 소식 들었어?”
에반이 더글라스에게 물었다.
“아, 네. 뭐, 들었습니다. 저희 황자님께서 황실에 심어놓은 사람이 있거든요.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더글라스가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러다 됐다는 듯 입을 다물며 뒷목을 문질렀다.
미르엣이 그런 더글라스 쪽으로 허리를 숙였다.
“왜 그러는 건데, 더글라스. 올렌도 황자가 황제의 자리에 오를까 봐 르나르 황자가 걱정이라도 하는 거야? 그거라면 어차피….”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차라리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 전 저희 황자님께서 왜 그러시는 건지 정말 모르겠으니까….”
더글라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곤 별안간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혹시 대공녀님께서 저희 황자님을 좀 살펴봐 주시겠습니까?”
* * *
똑똑똑-
갈색 지붕의 집에 도착한 내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르나르?”
하지만 안에서 들려오는 답이 없었다.
내가 더글라스에게서 받아온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데구르르-
내가 연 문에 밀려 빈 술병이 바닥을 굴렀다.
고개를 들고 보니 돌아다니며 술을 마신 건지 비울 때마다 술병을 굴린 건지 빈 술병이 바닥 여기저기에 흩어져있었다.
‘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공기 중에 짙은 와인향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와인 향 사이로 희미하게 느껴지는 이건.
‘…피 냄새……?’
희미한 피 냄새를 따라 내가 도착한 곳은 욕실이었다.
그곳 바닥에 붉은 피에 흠뻑 젖은 르나르의 옷이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다.
나는 다시 욕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빈 술병의 흔적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술병은 거실 바닥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 뒤 술병을 따라 오르고 걷다 보니 도착한 곳은 2층 침실이었다.
꽤 선선한 날씨인데도 침실 창문이 열려있었다.
방안은 먹구름이 가득한 날씨의 짙은 푸른빛으로 어두웠고, 열린 창문 틈으로 불어온 바람으로 하얀색 시폰 커튼이 나풀거렸다.
그리고 그 창문 앞 침대 위.
쓰러진 르나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