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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72화 (72/100)
  • 72화

    토끼와 여우

    “어서 와요, 대공녀. 먼 길 오느라 수고했어요. 어서 이리 와 앉아요.”

    황제가 그의 건너편 빈 의자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터넛 황제는 미로 정원의 한 가운데 위치한 원형 파고라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팔꿈치를 디딘 테이블 위엔 알록달록한 다과와 여러 종류의 차가 가득했다.

    하지만 주변은 온통 초록색인 게 참 어색했다.

    꽃은 없고 보이는 건 상록수뿐인 미로 정원.

    “제가 초록색을 좋아하거든요.”

    경계하며 둘러보는 날 눈치챈 터넛이 인자한 표정을 얼굴에 걸고 말했다.

    내가 앉자 시종장이 내 빈 찻잔에 차를 따라주려 했다.

    불쾌하다 생각하는데, 터넛 황제가 갑자기 시종장을 향해 말했다.

    “나이크, 나가 있어.”

    “…폐하?”

    “되묻는군. 날 무시하는 건가?”

    황제가 웃었다.

    서늘했다.

    난 르나르가 가끔 짓는 한기 들게 하는 웃음이 누굴 닮은 건질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그, 그럴 리가요, 폐하. 저는 그럼…. 물러나 보겠습니다….”

    시종장이 고개를 조아리며 사라졌다.

    황제는 친히 티팟을 들어 내 잔에 차를 따르기 시작했다.

    색이 고운 연한 노란색 액체가 흰색 사기 찻잔에 담겼다.

    담긴 잔에서 꽃향기가 났다.

    수면 위에 마른 장미 꽃봉오리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로즈버드 티예요. 대공가의 장미인 대공녀를 위해 내가 특별히 준비시킨 거죠. 나이크, 내 시종장. 대공녀한테 거슬리나요?”

    “…폐하, 그건 갑자기 왜….”

    “나이크를 보는 대공녀 표정이 꼭 나를 보는 대공녀 표정 같아서.”

    터넛이 그렇게 말하곤 다정하게 웃었다.

    나는 오싹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나이크는 내 일을 잘 돕는 내 귀중한 심복이에요. 하지만 대공녀한테 거슬린다면, 없애줄 수 있어요.”

    “……!”

    “어때요, 없애줄까요?”

    “…폐하, 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방금 폐하께서 직접…, 폐하의 귀중한 심복이라고….”

    “난 대공녀가 싫어하는 게 나밖에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것도 하나의 특별함이니까?”

    그렇게 말하는 터넛은 여전히 다정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난 찻잔을 손에 쥔 채 굳어버렸다.

    그때, 터넛이 곁에 있던 기사 중 한 명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파고라 밖으로 나간 기사가 네모난 케이지 두 개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나타났다.

    각각의 케이지엔 토끼 한 마리, 여우 한 마리가 들어있었다.

    연한 분홍색 새끼 토끼와 적갈색 털을 가진 어린 여우였다.

    ‘…뭐지…?’

    내가 의아하게 생각하는데, 케이지를 들고 온 기사가 파고라 근처 미로로 통하는 입구에 들고 온 토끼 케이지를 놨다.

    그리고 여우 케이지는 터넛에게 넘겼다.

    내가 터넛이 티 테이블 위로 올린 케이지 안 여우를 봤다.

    그런데 여우의 상태가 이상했다.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삐쩍 말랐던 것이었다.

    “외국 왕실에서 내게 선물한 애완 여우예요. 대공녀도 알겠지만, 귀족들이 키우는 애완 여우는 동물을 잡아먹지 않아요. 태어날 때부터 사료나 밀웜만 먹도록 교육받았으니까. 그런데 이 여우는 다를 거예요. 왠지 알아요? 내가 이 여우를 스스로의 꼬리를 먹고 싶을 지경까지 굶겼거든요.”

    “……!”

    놀란 내가 여우의 꼬리를 봤다.

    여우의 꼬리가 상처투성이였다.

    내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오늘 토끼와 여우, 둘 중 한쪽만 살릴 거예요. 그리고 어느 쪽이 살게 될지는 대공녀에게 달렸고요. 자, 이제 내게 알려줄래요? 대공녀가 어떤 선택을 내릴지?”

    “제게…, 이런 선택을 강요하시는 이유가 뭔가요…?”

    “둘 다 살릴 수는 없을 것 같고, 어느 쪽을 살릴지 나 혼자 결정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대공녀가 함께 살아야 할 짐승이니까.”

    “…….”

    “제가 여우를 선택하면 어떻게 되는 거죠?”

    “토끼를 미로 속에 놓아주고 여우더러 쫓게 할 거예요.”

    “…제가 토끼를 선택하면요?”

    터넛이 그 순간 옆에 선 호위 기사의 검을 검집에서 꺼냈다.

    그러곤 케이지 안으로 그 검을 쑤셔 넣었다.

    검의 한기를 느낀 여우가 몸을 움츠렸다.

    “폐하! 지금 뭘 하시는 겁니까…!”

    “대공녀가 내게 물었잖아요. 대공녀가 토끼를 선택하면 내가 여우를 어떻게 할지.”

    “무슨 뜻이신지…. 무슨 뜻이신지 알 것 같아요. 그러니 검을 꺼내주세요.”

    “검을 꺼낼까요? 대공녀는 여우를 살리는 건가요?”

    “…….”

    “난 이미 여우 쪽으로 마음이 기울긴 했어요. 하지만 대공녀가 원한다면, 난 언제든 토끼도 살릴 수 있죠. 하지만 내가 분명 말했죠? 둘 중 하나만 살아야 한다고.”

    머릿속이 핑핑 돌기 시작했다.

    또라이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의 상또라이일 줄이야.

    “여우를…, 제게 주세요.”

    “여우를 살리는 건가요?”

    “토끼도요.”

    “이런, 규칙을 이해하지 못했나 보네요. 대공녀는 둘 중 한쪽만 선택할 수 있습니다. 대공녀의 선택을 받지 못한 다른 쪽은….”

    “아뇨, 전 둘 다 택하겠습니다.”

    “…….”

    “제가 원하는 건 다 해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폐하께선, 폐하의 귀중한 심복을 바로 버릴 수 있을 만큼 절 좋아하시잖아요.”

    “……? 하, 하하, 하하하…!”

    터넛이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소리에 소름이 돋았지만 난 서늘한 표정을 유지했다.

    터넛은 약한 걸 싫어하니까.

    “내가 대공녀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에요. 그런데 그건 엘로즈 코웰 그대 자체가 아니라 에드워드 코웰 때문인 건 알고 있죠?”

    “…알고 있습니다.”

    “그럼 대공의 약점이 대공녀란 사실도 알고 있나요? 내가 알고 있거든요. 대공녀가 무엇인지. 대공녀의 몸에 어떤 피가 흐르는지.”

    “……!”

    나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황제가 알고 있어 코웰 가문이 황제를 건드릴 수 없게 만든다는 바로 그 약점.

    ‘그 약점이 마녀인 나였구나….’

    “그대에겐 늘 고맙게 생각해요. 그대 덕에 대공을 지금껏 휘두를 수 있었으니. 하지만 그렇다고 그 고마움이 대공녀에게 날 휘두를 권한을 주는 건 아니에요. 그럼 이제 선택해줄래요? 난 여우와 토끼 둘 중 하나만 살려야 하니까.”

    “왜 둘 중 하나만 살려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거죠?”

    “그게 황실의 섭리입니다.”

    차기 황제가 될 황자를 결정하고 남은 황자를 죽이겠다.

    터넛 황제는 내게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터넛 그부터가 자신이 황제가 된 후 남은 계승권을 가진 형제들을 모두 죽인 경우에 해당했으니까.

    추후 황좌에 위협이 될 것을 막기 위해.

    물론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약혼하고 싶은 사람도 르나르였다.

    하지만 이 세계를 비틀지 않기 위해 차마 죽이지 못하던 올렌도를 나보고 죽게 하라면, 글쎄.

    게다가 올렌도는 변하고 있었다.

    「내가 협박하지 않았는데도 내 곁에서 내 얘기를 들어줘서 고마워. 내게 기회를 줘서 고마워.」

    「이만 나갈까? 이런 곳에 오래 있으면 네가 내게 겁먹을 수도 있으니.」

    원작의 그가 캐스티나를 사랑하게 된 이후 변했던 것처럼.

    “…둘 다 살리겠습니다.”

    “대공녀. 내가 지금껏 설명을….”

    “폐하께서 막으시면 힘으로라도 데려가겠습니다.”

    “힘으로요? 대공녀처럼 깡마른 영애가 어찌…. 아하, 그렇군요. 마력이 깨어난 거로군요.”

    터넛이 눈을 빛내며 웃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 경계심이 실렸다는 걸 난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원작을 읽은 난 알고 있었다.

    터넛이 마녀와 마법사들을 선망했지만 두려워하기도 했다는 걸.

    “맞습니다. 그러니 여우와 토끼는 둘 다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그대가 여기서 마법을 쓰면, 나는 그대가 마녀란 사실을 제국에 공표하고 그대를 죽게 할 겁니다.”

    “그렇다면 저희 아버지와 폐하의 사이는 끝나게 되겠죠. 아버지께선 지금껏 제 죽음을 막기 위해 폐하와의 관계를 유지하셨을 테니까요.”

    “대공녀, 지금 날 협박하는 겁니까?”

    “여우와 토끼를 둘 다 살리세요. 그럼 간단하게 해결될 문젭니다.”

    “하지만 그것은 섭리에….”

    “누가 만든 섭리입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섭리를 유지하고 지켜나가야 할 만큼 폐하께선 무능하십니까?”

    “…….”

    “선택하세요. 그 한심한 섭리입니까, 저희 아버지입니까?”

    깍지 낀 손에 입술을 대고 한동안 황제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이후, 나는 여우와 토끼를 둘 다 품에 안을 수 있게 됐다.

    ‘아… 기 빨린다….’

    터넛과의 미로 정원 티타임이 끝났을 때 나는 정신적으로 매우 지쳐있었다.

    안나와 내가 황궁 회랑을 걸었다.

    대공저로 돌아가는 마차를 타기 위해서였다.

    회랑의 돌기둥 사이를 통과한 햇살이 케이지 안 토끼에게 닿았다.

    하지만 토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 덕에 겨우 살게 된 걸 알 리 없을 텐데도 눈치를 살피는 듯 얌전한 모습이었다.

    그때, 여우 케이지를 들고 내 뒤를 따르던 안나가 말했다.

    “아가씨, 여우가 배가 많이 고픈가 봐요. 몸이 점점 늘어지는데요……?”

    안나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여우의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한여름 아스팔트에 붙은 껌딱지처럼 케이지 바닥에 눌어붙고 있던 것이었다.

    곧 죽을 것 같은 모양새였다.

    “안나, 마차에 먹을 게 있었나?”

    “아가씨 드리려고 챙겨온 샌드위치랑 우유 같은 게 좀 있어요.”

    “일단 우유를 좀 먹여볼래? 샌드위치 사이에 햄도 있을 테니 그것도 한 번 먹여보고.”

    “네, 아가씨!”

    여우 케이지를 든 안나가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그런 안나를 쫓기 위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때, 등 뒤에서 날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엘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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