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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71화 (71/100)

71화

엉망이네요

더글라스가 가슴을 치든 머리를 치든 상관없을 것 같은 르나르가 사슴의 이마에 촉촉촉 연이어 입을 맞췄다.

더글라스가 깊은 한숨과 함께 르나르와 사슴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더글라스가 집을 돌아봤다.

비교적 깔끔해 보이기도 했지만 구석구석 정돈되지 않은 곳이 눈에 들어왔다.

만족스럽게 웃은 더글라스가 르나르에게 말했다.

“엉망이네요, 역시. 제가 없으니.”

한동안 코웰 가문 형제들과 함께 지낸 더글라스였다.

플루토나 제국 출신으로서 그레이시아나 제국 토박이인 코웰 형제들에게 지리적 조언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지리적 조언은 그레이시아나 제국 군대가 불법 점거 중인 플루토나 황성을 불시에 공격하기 위한 것.

더글라스가 돌아왔다는 것은 반역 준비가 이제 막바지에 달했단 뜻이었다.

그래서 르나르는 더글라스가 돌아온 것이 반가웠지만, 그렇다고 더글라스의 잔소리까지 반가운 것은 아니었다.

“이 정도면 꽤 잘 정리된 거 아니야?”

사슴 엘로즈를 바닥에 내려주며 르나르가 더글라스에게 물었다.

바닥에 선 사슴 엘로즈가 르나르의 다리에 머리를 비볐다.

그런 사슴을 보는 르나르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더글라스가 혀를 끌끌 찼다.

“아주 사슴한테 청혼하실 기세네요.”

“청혼은 사람한테 해야지. 사슴이 아니라.”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르나르의 표정이 진지했다.

기분이 이상해진 더글라스는 저도 모르게 대화 주제를 바꿨다.

“도련님께서 씻으러 들어가신 사이에 터넛 황제에게서 하사품이 왔습니다.”

“하사품?”

“지난 사냥에서 잡은 동물 가죽들 같던데요.”

르나르가 미간을 찌푸리며 바닥으로 몸을 내려 사슴 엘로즈의 귀를 손으로 막았다.

더글라스가 실소했다.

“흰 사슴 가죽이 왔다는 얘기는 안 했거든요?”

“그 입, 안 다물어?”

르나르가 거실 한쪽 구석에 쌓인 황제의 하사품 더미를 향해 다가갔다.

다행히 더글라스 말처럼 흰색 털을 가진 짐승의 가죽은 보이지 않았다.

더글라스가 테이블 위에 따로 챙겨 둔 황제의 편지를 집어 르나르에게 건넸다.

르나르가 빠르게 봉투를 찢어 편지를 읽었다.

내용을 파악한 르나르의 입매가 만족감과 경멸감이 뒤섞인 감정으로 묘하게 비틀어졌다.

“무슨 내용인데 그러십니까?”

르나르의 표정을 기이하게 여긴 더글라스가 르나르에게 물었다.

“원하는 대로 해주겠대. 곧 올렌도와 엘로즈를 파혼시켜 주겠다고.”

“그럼 잘된 거 아닙니까? 근데 도련님, 아니, 황자님 표정이 왜….”

“편지 내용대로면 올렌도는 자기 파혼 소식을 제국에서 제일 늦게 알게 되겠더군. 터넛 황제 머릿속에 올렌도에 대한 생각이 아예 없으니.”

“에이, 설마요. 그래도 올렌도 황자도 터넛 황제 아들인데. 억지로 약혼시켰다가 마음대로 파혼시키는 거면서 그렇게까지…”

“암살자에게 잃게 되진 않을까 전전긍긍 얼굴까지 숨겨 키운 아들에 대한 애정이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게 상상이 가?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어, 터넛은.”

“예?”

“엘리 루즈벨트에게 아들이 있단 걸 알고, 후에 언제라도 올렌도 자리를 내게 넘기려 한 거야. 어차피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황자이니 대체하긴 쉬울 거로 생각하면서.”

“…세, 세상에….”

“그래서 산적 떼의 행렬 습격 때 날 알아봤으면서도 올렌도 곁에 둔 거겠지. 내가 올렌도를 해쳐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 그럼 산적 떼 습격 자체를 황자님께서 계획하신 것도 황제가 알고 있는 겁니까?”

“아마 처음부터 눈치챘던 것 같아.”

“그러면서 모른 척했다니 이, 이런… 여우 같은….”

“그런데 내가 이빨을 드러내지 않으니 실망하고 방치 중이다가 이제라도 내게 넘기려는 거야. 올렌도가 가진 걸 전부. 터넛에게 아들은 터넛 이후에도 그레이시아나 제국을 이끌고 키워나갈 차기 황제에 불과하니까.”

르나르가 비릿하게 웃었다.

“기분이 별로인데. 황제가 사실 원했던 걸 내가 이루어주게 될 줄이야.”

“그래도 전…. 황자님께서 황자가 되신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황자님께서 오르셨어야 하는 자리이니까요. 만약 터넛 황제가 황자님을 황제로까지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이라면, 아예 그 자리에까지 오르시는 건 어떠시겠습니까?”

더글라스가 르나르가 물었다.

르나르가 그런 더글라스를 보며 방긋 웃었다.

르나르 위로 겨울 빛깔이 미약하게 섞인 가을 햇살이 쏟아졌다.

“여왕을 모시는 사람이 황제가 될 수 있겠어?”

그 말의 뜻을 이해한 더글라스가 허탈하게 웃었다.

* * *

“뭐라고요?!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캐스티나가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렸다.

진홍색 찻물이 하얀 테이블보를 적시자 유리 온실 밖에서 올렌도와 캐스티나를 지켜보던 시녀들이 움찔했다.

올렌도가 손을 들어 그들이 온실 안으로 들어서려 하는 것을 만류했다.

올렌도가 다시 캐스티나를 봤다.

가을 햇살을 담은 금안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마음씨만 곱게 써도 조금은 예뻐 보였을 텐데.’

피식 웃은 올렌도가 그의 찻잔에 각설탕 하나를 더 넣었다.

차를 저어 설탕을 녹이는 손길이 다소 무기력했다.

바들바들 떨던 캐스티나가 애써 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황자님과 엘로즈 님의 파혼을 주관하실 거라니, 그게 무슨 소리세요. 그리고 엘로즈 님을 르나르 황자님과 약혼시키실 거라고요?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황자님께선 일이 그렇게 될 지경까지 대체 뭘 하신 거예요…!”

하지만 애써 추스른 감정은 말이 이어지는 동안 점점 격양되더니 그녀가 말을 마칠 즈음이 되어서는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그런 캐스티나를 보는 올렌도의 표정은 무감했다.

올렌도는, 터넛의 생일연 날 처음 만난 캐스티나를 떠올리는 중이었다.

「엘로즈 코웰 대공녀님께서 황자님을 유혹하라고 절 고용했어요.」

「그게… 정말인가…?」

「하지만 황자님께선 대공녀를 원하시죠? 그래서 말인데, 저와 손잡는 게 어떠세요? 저는 르나르 황자님을 원해요. 제게 사랑에 빠진 척 행동해주세요. 그럼 제가 르나르 황자님을 보다 효과적으로 유혹할 수 있을 테니.」

“…뭘 했냐니. 그러는 그동안 그대는 대체 뭘 했지? 내가 사랑에 빠진 척 행동해주면, 르나르를 수월하게 유혹할 수 있을 것처럼 허세 부려 놓고.”

“그, 그건….”

“그리고 난 폐하께서 내 파혼 소식을 귀족들에게 공표하려 하시는 것도 미리 알아냈지. 하마터면 이 제국에서 내 파혼 소식을 내가 제일 늦게 알 뻔했는데 말이야. 근데 그대는 한 게 뭐지? 르나르는. 대체 언제 유혹할 수 있는 건데.”

이에 캐스티나가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붉혔다.

그 모습이 새벽이슬을 머금은 한 떨기 양귀비 같았다.

그 색기 넘치는 모습에도 아래가 동하지 않는 이유는 오로지 그녀의 마음 심보 때문일 거라고 올렌도는 생각했다.

“유혹할 거예요. 황자님과 제가 춤추는 걸 르나르 황자님께서 봤으니, 이미 저에 대한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을 거라고요. 다만 지금은…, 그 파혼 문제를 해결하는 게 먼저인 것 같네요. 올렌도 황자님과 터넛 황제 폐하 사이는 어떤가요?”

캐스티나가 별안간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황제 폐하와 내 사이? 좋진 않지. 사실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남보다 못할 사이지. 이렇게 아들이 원치도 않는 약혼을 시키려다가 파혼까지 제멋대로 시키려는 아버지잖아.”

“그래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이번 일은 제게 맡겨 주세요.”

“맡겨? 맡기다니 그게 무슨….”

“맡겨 주세요. 대신 황자님께선 황자님 능력을 최대치로 활용해 믿을 수 있는 사람 한 명만 매수해 주세요. 그 뒤는 제가 맡을 테니.”

캐스티나는 자신 있어 보였다.

올렌도는 왠지 모르게 불안한 감정을 느꼈다.

* * *

불안해졌다.

터넛 황제로부터 황궁으로 입궁하란 편지가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폐하께서 갑자기 아가씨를 왜 찾으시는 걸까요? 게다가 주인어른과 도련님들껜 이야기하지 말고 혼자 오라니….”

내가 내려놓은 편지를 슬쩍 본 안나가 화들짝 놀란 뒤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내 머릿속 또한 복잡해졌다.

‘설마…. 반역 계획을 눈치챈 건 아니겠지…?’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준비 해줘, 안나. 무슨 일인지 전혀 알 수 없으니 일단은…, 일단은 궁에 가봐야겠어.”

“괜찮으시겠어요, 아가씨?”

만약 황제가 반역 계획을 눈치챈 것이라면 나를 불러 붙잡아 놓고 인질로 삼을 계획인 것일 수도 있었다.

그것이 최악의 경우였지만, 난 사실 인질로 잡히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한동안 르나르와 계속 붙어있었기 때문인지 마법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크게 향상된 상태였기 때문에.

“괜찮아. 괜찮을 거야.”

내가 불안해하는 안나를 안심시켰다.

나를 태운 마차는 곧 황궁을 향해 출발했다.

“어서 오세요, 대공녀님. 황제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당신은….”

나는 황궁에서 날 맞이한 이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드리엔 별장으로 날 찾아왔던 시종장?’

무례한 말로 레오를 도발한 뒤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시종장.

그가 버젓이 황궁에 있었다.

그것도 나를 터넛 황제에게 안내하겠다면서.

“표정이 좋지 않으시네요. 혹시 어디 불편하십니까?”

“제가 아는 분이군요.”

“미천한 제 얼굴을 다 기억해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시종장이 능구렁이처럼 말하며 웃었다.

미안한 기색 같은 건 전혀 없어 보였다.

“제 가문에서 그대를 찾았었습니다. 레오에게 저지른 그대의 무례에 대해 황제 폐하 앞에서 직접 고하게 하려고요.”

“이런, 미처 몰랐네요.”

“정말 모르셨다고요?”

“대공녀님, 실례지만 저와의 담소는 이만 하셔야겠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반역이 성공하면 저 시종장부터 제국 밖으로 쫓아버리겠노라 그 순간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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