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략남이 훅 들어왔어-70화 (70/100)
  • 70화

    그 달밤, 응접실

    르나르가 차분하게 흑발을 쓸어 넘겼다.

    드러난 그의 반듯한 이마에 달빛이 홀려 입을 맞췄다.

    똑-

    딱-

    똑-

    딱-

    고요가 내려앉은 잠긴 응접실엔 시계 초침 소리만이 그득했다.

    르나르가 엘로즈를 향해 시선을 내렸다.

    여전히 밭은 숨을 쌕쌕 내쉬는 그녀는 노려보는 것도 그냥 보는 것도 아닌 애매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엘로즈의 정돈되지 않은 숨결을 따라 그녀의 드레스 앞섶이 빠르게 오르내렸다.

    르나르가 마른 침을 삼켰다.

    아래가 묵직해졌다.

    “왜 안 일어나고 그러고 계세요.”

    “…….”

    “잡아 먹어드려요?”

    장난기 서린 그 말에 르나르를 보는 엘로즈 눈빛이 흉흉해졌다.

    낮게 웃은 르나르가 엘로즈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붙잡으세요. 일으켜드릴게요.”

    엘로즈와 가까워지자 짙은 향수 냄새 사이에서 깨끗한 아기 냄새가 났다.

    그 향의 출처를 찾아 르나르의 시선이 움직였다.

    르나르의 시선이 달빛을 반사하는 엘로즈의 하얀 목선에 고정됐다.

    그의 손이 어느새 다시 엘로즈의 드레스 어깨 천을 내리고 있었다.

    “……!”

    엘로즈가 눈을 크게 떴다.

    “쉬. 괜찮아요.”

    르나르가 아이 달래듯 토닥거리며 그녀를 달랬다.

    르나르는 엘로즈의 몸에 남기고 싶어졌다.

    그녀가 그의 소유라는 것을.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몸에 그의 이름이라도 새겨 넣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르나르는 달빛 아래 드러난 그녀의 어깨를 이로 물었다.

    “아……!”

    엘로즈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여기…였었나요? 올렌도 그 자식이 대공녀님께 입을 맞춘 곳이?”

    르나르가 붉은 꽃이 핀 적 있는 엘로즈의 쇄골께를 문지르며 물었다.

    다음 순간 르나르는 그 위로 입술을 지분댔다.

    새하얀 엘로즈의 몸에 달무리 빛을 닮은 푸른 꽃이 피어났다.

    “그리고 여기였죠? 그 새끼 손이 닿았던 곳?”

    르나르가 엘로즈의 턱선을 따라 촉촉촉 입을 맞췄다.

    버드 키스의 간지러움에 엘로즈가 몸을 움츠렸다.

    엘로즈의 가슴을 쥐려던 르나르가 마지막 남은 이성을 쥐어짜 엘로즈의 목을 감쌌다.

    그러곤 혀를 사용하는 깊고 깊은 입맞춤을 했다.

    엘로즈의 작은 몸이 그의 아래에서 바들거렸다.

    참지 못할 지경이 된 르나르가 그녀에게서 입술을 뗐다.

    “지…지금 뭐 하는 거예요…?”

    혼란스러워 보이는 엘로즈가 르나르에게 물었다.

    르나르가 간결하게 답했다.

    “정화(淨化)요.”

    깨달은 그녀의 표정에 피식 웃은 르나르가 다시 엘로즈에게로 허리를 숙였다.

    * * *

    르나르와 한참 입을 맞추다 연회장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올렌도와 캐스티나가 춤을 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영애는 누굴까요? 처음 보는 얼굴인데?”

    “가문도 작위도 모르겠지만 올렌도 황자님께선 이미 저 영애에게 푹 빠지신 것으로 보여. 그럼 코웰 대공녀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귀족들이 쑥덕대는 소리가 나에게까지 들려왔다.

    올렌도를 자세히 보던 나는 다시 놀라게 될 수밖에 없었다.

    올렌도의 얼굴은 사랑에 빠진 사람의 그것이었다.

    그는 애정이 듬뿍 담긴 눈빛으로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캐스티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난 그것이 의아해졌다.

    ‘이렇게 빨리 저런 태도가 나타나는 게 가능한 건가…?’

    원작에서 두 사람이 첫눈에 서로에게 반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분명, 처음엔 투닥대기만 하다가 점차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면서….’

    원작을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건지 내가 되짚어보는데, 곁에 있던 르나르가 의외라는 듯 말했다.

    “희한하네요. 진짜 성공할진 몰랐는데. 어떻게 대공녀님을 좋아하다가.”

    그러다 터넛 황제 쪽을 봤다.

    르나르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렴, 뭐. 상관없습니다. 타이밍이 좋네요.”

    “타이밍이 좋다뇨?”

    르나르가 대답 대신 나를 보며 씩 웃었다.

    “곧 알게 되실 겁니다.”

    내 머리칼 일부를 들어 손가락에 빙빙 감던 르나르가 그 머리칼에 입을 맞췄다.

    몇몇 귀족들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쏠렸다.

    귀족들이 올렌도와 르나르를 번갈아 보며 웅성대기 시작했다.

    * * *

    “황자님께서 제게 첫눈에 반하셨대요. 저도 올렌도 황자님이 마음에 들어요. 황자님께서 제게 청혼하시면 어쩌죠? 저는 아직 거기까진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연회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

    함께 탄 마차 안에서 신이 난 캐스티나가 조잘조잘 떠들었다.

    올렌도와 서로 마음에 든 것이 기분 좋은 모양이었다.

    ‘근데 왜….’

    이야기를 끊을 때마다 르나르 쪽을 살피는 걸까?

    꼭 자기 말에 대한 반응을 보는 것처럼.

    내가 골똘한 눈빛으로 캐스티나를 바라봤다.

    캐스티나가 그런 나와 눈이 마주치자 해사하게 웃었다.

    “올렌도 황자님께선 좋은 분이신 것 같아요. 그런 황자님을 만나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엘로즈 님.”

    내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렇게까지 말하는 캐스티나를 더 의심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별안간 캐스티나가 덥석 내 손을 잡았다.

    놀란 내가 캐스티나 쪽으로 몸을 기울였고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숙였던 고개를 들었을 때,

    캐스티나의 눈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사실…. 엘로즈 님께서 찾아주시기 전의 저…, 그동안 정말 힘들었어요. 자세한 걸 말씀드릴 순 없지만 끝난 것만 같았어요. 제 인생이요. 그런데 오늘 올렌도 황자님을 만나고 나니…. 알 것 같아요. 전 오늘을 위해 살아야만 했던 거예요. 이제야 제가 있어야 했던 곳을 다시 찾은 것만 같아요. 엘로즈 님. 고마워요. 덕분에 다시 제 자리를 찾았어요.”

    캐스티나가 웃으며 울었다.

    그 모습이 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역시 여자 주인공은 남자 주인공 옆에 있어야 하는 걸까?’

    묘하게 뿌듯한 마음도 들었다.

    망가질 뻔한 인생 하나를 구했다는 게.

    그리고 난, 이제 더는 캐스티나를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 * *

    터넛 황제의 생일연 이후 평화로운 일주일이 지나갔다.

    올렌도와 캐스티나의 사이가 각별하단 소식은 소문이 되어 내 귀에 들어왔다.

    황궁 안 궁중 악사 연습실에서 연습하는 캐스티나를 올렌도가 따로 불러, 두 사람이 함께 차를 마시거나 산책을 즐긴다는 것이었다.

    그사이 르나르는 좋아하는지도 몰랐던 사냥을 시작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르나르가 그 사냥을 터넛 황제와 함께 다녀왔단 것이었다.

    원작에 기반해 르나르가 터넛 황제를 싫어할 줄만 알았던 나는 그것이 참 의외였다.

    사냥 당일, 르나르는 사냥이 끝나자마자 코웰 저택으로 날 찾아왔었다.

    「대공녀님, 대공녀님의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지쳐 보이는 르나르가 내게 안겨들며 말했다.

    내가 보기에 르나르는 분명 억지로 끌려갔다 온 얼굴을 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르나르? 하나도 즐거웠던 것 같지가 않아 보여요.」

    「그렇게 보셨다면 잘 보신 겁니다.」

    「정말요? 그럼 이젠 가지 마요, 그 사냥.」

    「그건 안 될 것 같습니다.」

    「…왜요? 터넛 황제 폐하께 협박이라도 당한 거예요?」

    「얻고 싶은 게 있으면 싫은 걸 참을 줄도 알아야죠. 게다가 이 길이 얻고 싶은 걸 조금 더 빠르게 평화롭게 얻을 수 있는 길이라면….」

    내 머리칼 한 가닥을 귀 뒤로 넘겨주며 르나르가 말했다.

    내게 닿은 그는 어느새 평화를 되찾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사냥 중에 사슴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내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던 르나르가 별안간 내게 말했다.

    그런데 그 뒤에 덧붙인 말이 정말 의외였다.

    「잘 키워보려고요.」

    「키워요? 사슴을?」

    내가 고개를 기울이며 묻자 르나르가 날 따라 고개를 기울였다.

    나를 보는 그의 얼굴 위로 환한 미소가 점점 퍼져나갔다.

    「그렇게 하시니 정말 더 똑같네요.」

    「…네?」

    「터넛 황제에게 어미를 잃은 아기 사슴입니다. 그냥 두고 오면 죽을 것 같아 제게 데려왔습니다. 한땐 사냥감이었지만, 이젠 제 소유인 거죠.」

    ‘그냥 두고 오면 죽을 것 같아….’

    르나르가 한 말을 곱씹어 생각하는 내 마음 한편이 따스해졌다.

    ‘르나르가 이렇게 동정심이 넘치는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

    「잘했어요. 사슴에게 이름은 지어줬어요? 앞으로도 키울 거면 이름도 있어야죠.」

    「그럼요. 벌써 지어줬는걸요?」

    르나르가 빙글빙글 말하며 싱긋 웃었다.

    「정말요? 뭔데요?」

    「비밀입니다.」

    「아, 예쁜 이름이네요.」

    「아뇨, 대공녀님. 사슴의 이름이 대공녀님껜 비밀이라고요.」

    「네…? 에이, 치사해…. 별것이 다 비밀이네….」

    살짝 토라진 내가 아랫입술을 쭉 내밀자 르나르의 입술이 그런 내 입술에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내 눈이 커졌고 르나르가 웃었다.

    나는 공식적으로 사귀는 연인도 이렇게 자주 입을 맞추진 않겠다는 생각을 그 순간 했다.

    그것이 터넛 황제의 생일연 이후 일주일이 지난 오늘로부터 바로 이틀 전의 일이었다.

    * * *

    “엘로즈, 거기 서!! 엘로즈!!”

    더글라스가 작고 하얀 새끼 사슴의 뒤를 쫓으며 코웰 대공녀를 애타게 찾았다.

    그러든지 말든지 아기 사슴은 폴짝폴짝 르나르가 머무는 갈색 지붕의 집안을 종횡무진 누볐다.

    거실에서 주방으로, 주방에서 또다시 거실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사슴의 눈엔 모든 것이 신기했다.

    그러다 풀썩 바닥에 쓰러졌다.

    제대로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이었다.

    막 씻고 욕실에서 나온 르나르가 그런 사슴을 바닥에서 주워 안아 들었다.

    사슴은 저를 구해준 이가 누구인지 안다는 듯 르나르의 품에 머리를 비볐다.

    르나르의 입매가 만족스럽게 휘어졌다.

    이내 사슴 뒤를 쫓아온 더글라스가 르나르 앞에 나타났다.

    “하, 엘로즈. 넌 정말 말썽꾸러기구나?! 주방 접시들을 전부 다 뒤집어 놓고…!”

    “엘로즈라니. 대공녀님이라고 불러.”

    르나르가 더글라스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더글라스가 경악했다.

    “대공녀님이요?! 겨우 사슴한테요?!”

    “겨우 사슴이라니. 로즈를 닮았는데.”

    사슴이 제 이름이 들리는 듯하자 르나르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 사슴에게서 엘로즈를 겹쳐 본 르나르가 작게 웃으며 사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사슴이 기분이 좋은 듯 삐이이 삐이이 소리를 냈다.

    “엘로즈를 엘로즈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게 만들 거야. 아, 로즈의 가족들은 제외하고.”

    선언한 르나르가 사악하게 웃었다.

    그럴 거면 사슴 이름을 엘로즈라 붙이지나 말든지.

    더글라스가 답답해 가슴을 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