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파혼의 조건
[올렌도는 약혼녀 엘로즈 코웰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분명 아름다웠다.
하지만 코웰.
올렌도가 경멸하는 바로 그 가문의 상징 같은 여자.
그런데 그때, 엘로즈의 어깨너머로 올렌도의 시선과 한 여자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쳤다.
‘…궁중 악사인가?’
피들을 연주하는 그녀를 보며 올렌도가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단순한 궁중 악사일까?
그녀의 시선은 분명 지휘자가 아닌 올렌도를 향해 있는데?
‘건방지군.’
올렌도가 인상을 쓰며 피식 웃었다.
하지만 피들 연주자는 그럼에도 시선을 거두지 않고 계속 올렌도를 응시했다.
스스로를 위험하게 만들 만큼 당돌한 여자다.
재미난 여자.
올렌도는 흥미가 생겼다.
그녀에 관해 더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와 달만 아는 비밀> 14화]
“자꾸 어딜 그렇게 힐끔힐끔 보는 거지? 쥐새끼 마냥.”
캐스티나 쪽을 곁눈질하던 내게 올렌도가 물었다.
나는 흔들리려는 동공을 애써 진정시키며 다시 올렌도를 봤다.
나는 연주를 시작한 캐스티나를 등진 상태였다.
올렌도와 캐스티나에게 원작 같은 만남을 만들어주기 위해.
그를 위해 내게 다가온 올렌도와도 거리낌 없이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나와 대화하던 올렌도가 내 어깨너머로 캐스티나를 볼 수 있도록.
그런데 어쩐지 올렌도의 시선은 대화 내내 나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내가 그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기며.
“…오늘, 궁중 악사들 선곡이 좋은 것 같네요.”
올렌도가 캐스티나 쪽을 보길 바랐던 내가 일부러 대화 주제를 바꿨다.
올렌도가 인상을 쓰며 피식 웃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난 귀가 따갑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얘기 나온 김에, 잠시 조용한 곳에 나가서 얘기해. 내기에 관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갑작스레 말한 올렌도가 발코니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따라가지 말까?’
온실에서의 일을 떠올린 내 발이 바닥에 붙어 떨어질 줄은 몰랐다.
하지만 반역을 앞두고 제국 귀족 대부분이 모인 자리에서 소란을 피우고 싶진 않았다.
몸을 사려야 했다.
때가 되기 전까진.
나는 일정 간격 이상의 거리를 두고 앞서간 올렌도의 뒤를 따랐다.
* * *
올렌도가 움직였다.
엘로즈가 따라간다.
두 사람을 내내 지켜보던 르나르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르나르가 황자가 되어 엘로즈 앞에 다시 나타났던 그 날 밤, 저택 복도를 정신없이 달리던 엘로즈에게 무슨 일이 생겼던 건지 르나르는 모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의 턱에 남은 붉은 손자국은 그가 이전에 본 적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어깨와 쇄골 등지에 피어난 시퍼렇고 붉은 꽃들.
르나르는 눈이 뒤집혔었다.
「가지….」
「…….」
「말아요….」
「대공녀님.」
「옆에….」
「…….」
「있어 줘….」
엘로즈가 르나르를 붙잡지만 않았어도 르나르는 아마 그날 밤 그의 이복형제를 죽여 버렸을 것이었다.
그 뒤 엘로즈는 잠꼬대 같은 말로 올렌도를 죽이는 건 안 된다고 했다.
코웰 가문 가족들을 찾기도 했고.
그래서 르나르는 일단은 올렌도를 살려둔 채 엘로즈를 코웰 대공작저로 데리고 갔다.
올렌도를 언젠가는 죽여 버릴 거라 다짐하면서.
그 후 엘로즈의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았고, 캐스티나를 찾으러 가느라 정신이 없었던 데다, 올렌도의 상체 전체에 끔찍한 화상 흉터가 생겼단 소식을 듣고 즐거워하다 그 일이 차일피일 미뤄지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개새끼가 또다시 내 여자를 건드린다면?
르나르가 발걸음을 뗐다. 그때,
“잠깐.”
르나르를 불러 세우는 터넛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이야기 아직 안 끝났잖니?”
터넛과 르나르는 올렌도와 엘로즈를 파혼시키는 것에 관해 얘기하는 중이었다.
르나르가 지난 무도회에서 르나르의 키스를 거부하지 않는 엘로즈의 모습을 터넛에게 보여줬기에 생겨난 결과였다.
르나르가 터넛을 무시하며 다시 엘로즈 쪽을 보며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때, 엘로즈와 르나르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생긋 웃으며 르나르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말라는 것 같았다.
르나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 얘긴 끝난 거 아니었습니까? 엘로즈는 올렌도가 아닌 절 좋아하고, 그러니 당신께선 올렌도와 엘로즈를 파혼시켜주셔야죠.”
“플루토나 제국에서 상납한 공물이 오는 길에 산적들의 습격을 받았어. 그 산적들은 내가 아닌 달을 황제로 떠받드는 아주 불경한 녀석들인데, 요즘 내 굉장한 골칫거리지.”
“…….”
“그 산적 무리 두목의 머리와 빼앗긴 공물을 내게 다시 가져다주렴. 너한텐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 테니.”
“제가 왜 그래야 하죠?”
“그자들이 대공녀처럼 아름다운 여자들을 납치해 제물로 삼기도 한다는구나. 일국의 황자나 되어서 보호받아 마땅한 제국민의 눈물을 외면해서야 되겠니?”
“…….”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은 황궁에 와 나와 저녁 식사를 함께하도록 해. 2주에 한 번씩은 함께 사냥을 가고. 그게 내가 대공녀와 올렌도를 파혼시켜주는 조건이다.”
그 말을 들은 르나르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러다 입을 열어 터넛에게 물었다.
“정말 그게 조건이라고요?”
“그래.”
“왜죠?”
“왜냐니?”
“사냥도. 식사도.”
“나는 사랑하는 엘리의 아들을 사랑하니까.”
“…….”
무표정한 르나르가 터넛을 지나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터넛이 그런 르나르를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채 바라봤다.
그때, 다시 뒤 돈 르나르가 터넛에게 물었다.
“올렌도에겐 그런 제안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올렌도에게?”
“…….”
“없지. 내 애정은 그걸 받을 가치가 있는 아이만의 것이니까.”
터넛이 한 점 거리낌 없이 르나르를 보며 무구하게 웃었다.
르나르가 다시 뒤 돌았다.
르나르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 * *
발코니로 나온 올렌도는 커튼을 쳐 연회장과 발코니 사이를 가렸다.
내가 움찔했다.
그걸 눈치 챈 올렌도가 지체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오늘 내게 다정해 줘서 고마워.”
“……네?”
“그 얘기가 하고 싶었어. 고맙다고. 사실 나, 오늘도 너와 얘기하려면 네가 마녀인 걸 빌미로 협박해 널 내 옆에 붙여놓을 수밖에 없겠구나, 생각했었어. 그런 게 아니면 넌 나를 상대하지 않으니까.”
“…….”
“근데 내가 협박하지 않았는데도 내 곁에서 내 얘기를 들어줘서 고마워. 르나르에게 가버리지 않아 줘서 고마워. 내게 기회를 줘서 고마워.”
“…….”
“그게 전부야. 내가 여기 나와 하고 싶었던 말은. 이만 나갈까? 이런 곳에 오래 있으면 네가 내게 겁먹을 수도 있으니.”
올렌도가 내게 말했다.
내가 특별한 답 없이 커튼 밖으로 나가는 올렌도의 뒤를 따랐다.
* * *
연주를 마친 캐스티나는 미리 준비되어 있던 드레스로 갈아입고 연회장에 들어섰다.
올렌도가 엘로즈를 데리고 발코니로 향하고 있었다.
잠시 후 터넛 황제에게서 르나르가 멀어졌다.
그녀의 발걸음은 곧장 혼자가 된 르나르에게로 향했다.
“두 사람이 돌아오면 제게 춤 신청을 하시는 게 어때요? 돌아온 엘로즈 님께서 질투할 수 있게.”
캐스티나가 르나르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간결했고 빨랐다.
“싫어.”
캐스티나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도와줘요. 이건 올렌도 황자 전하를 유혹하기 위해서이기도 해요. 두 사람은 다음 황위를 놓고 싸우는 경쟁자 아닌가요?”
“만약 그렇다면?”
“올렌도 황자 전하께선 당연히 르나르 황자님께서 가진 걸 빼앗고 싶어 하실 테고, 르나르 황자님께서 제게 흥미를 보이신다면 당연히 올렌도 황자님께서도 제게….”
“이해할 수 없군. 왜 남의 걸 뺏고 싶어진다는 거지?”
“…….”
“원하는 것이 있으면 본인이 만들어내 가지면 되잖아.”
차가운 르나르의 말에 캐스티나가 뺨이라도 한 대 맞은 듯 얼얼한 표정을 지었다.
‘싫어하는 사람이 가진 걸 빼앗고 싶은 건 당연한 거 아닌가…?’
“그리고 그 정도도 혼자 못하나? 대가는 이미 충분했을 텐데? 넘치게 지급할 예정이기도 하고.”
“하지만….”
“자꾸 말 걸지 마.”
그때, 엘로즈와 올렌도가 발코니 에서 나왔다.
성큼성큼 걸어간 르나르가 엘로즈를 납치하듯 낚아챘다.
그러곤 그녀를 데리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발끈한 올렌도가 두 사람을 쫓아가려 했다.
그때, 캐스티나가 올렌도의 앞을 막아섰다.
“올렌도 황자님?”
“넌 뭐야. 비켜.”
“잠시 저와 얘기 좀 하실까요? 제가 황자님께 제안을 하나 드릴까 해요. 황자님께서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제안인데….”
간질이듯 올렌도의 손목을 쓸어 잡은 캐스티나가 올렌도를 데리고 올렌도와 엘로즈가 방금 나온 발코니 안으로 사라졌다.
캐스티나가 닫은 벨벳 커튼 천이 선선한 가을바람에 작게 요동쳤다.
* * *
“르나르? 르나르! 잠깐만요! 지금 대체 어딜 가는 건데요…!”
올렌도와 발코니에서 나온 나를 끌고 가는 르나르의 손길은 다소 친절치 못했고 거칠었다.
하지만 르나르는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빠른 속도로 연회장을 벗어난 그는 근처 빈 응접실로 들어간 뒤 문을 닫았다.
닫은 문을 걸어 잠그는 르나르에 내가 당황했다.
“르, 르나르. 문은 대체 왜….”
다음 순간, 르나르는 내 허리를 잡아 날 안아 올린 뒤 응접실 소파 위에 눕혔다.
갑작스럽게 내 무게를 견디게 된 응접실 소파 쿠션에서 황궁 하녀들이 뿌려뒀을 진한 향수 냄새가 피어올랐다.
이내, 내 보트 네크라인 드레스의 어깨를 감싼 천이 르나르에 의해 쇄골 아래까지 내려갔다.
놀란 내가 버둥거렸다.
하지만 르나르는 그런 내 어깨를 소파 위로 꾹 눌러 내 움직임을 멎게 했다.
그의 아래 내 모습이 꼭 핀에 꽂힌 나비 같았다.
나비 수집광의 그것.
천장까지 닿는 긴 창을 통해 하얀 달의 푸른 달무리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방안이 온통 그 푸른빛이었다.
그리고 그 빛에 물든 르나르는 오히려 하얬다.
그를 보는 내 시야가 뿌예졌다.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달빛 아래 드러난 흰 살갗이 수치심에 붉어졌다.
가빠진 숨결 덕에 드레스 앞섶이 빠르게 오르내리는 것이 내 눈에도 보였다.
정신을 놓아버릴 것만 같았다.
그때, 조금 차분해진 기세의 르나르가 말했다.
“없네요. 별다른 흔적. 다행히.”
그가 내렸던 내 드레스를 다시 위로 올렸다.
그러곤 노려보는 내 눈 위로 입을 맞췄다.
촉-
“그렇게 보지 마세요. 하나도 안 무섭고 오히려 꼴리니까.”
황자의 입에서 나온 저속한 표현에 내가 입을 벌리며 경악하자 르나르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내게서 몸을 일으켰다.
소파 등받이에 기대앉은 그의 위로 푸른 달무리 빛이 내려앉았다.
그 빛을 받아 빛나는 그는 하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