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이놈이고 저놈이고
쏴아아아-
빗소리에 눈을 떴다.
한참 잔 것 같은데 사위가 어둑했다.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
주변이 어두운 것은 날씨 때문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에 먹구름이 짙었다.
몸이 개운치 않았다.
르나르와 밤새 같이 잔 것 같지가 않을 만큼.
의아해 몸을 일으키고 보니 옆자리에 르나르가 없었다.
‘뭐야…. 어디로 간 거지…?’
잠시 그렇게 멍하니 있다가 시선을 돌리니 침대 협탁 위에 놓인 작은 쪽지가 보였다.
[돌아갑니다.]
길지 않은 내용.
정갈한 글씨체.
르나르였다.
나는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왜 벌써 돌아간 거지? 내 옆에서 자는 걸 좋아하는 르나르인데?’
「오늘… 같이 자면 안 될까요…?」
「저 오늘… 여기서 자고 가면 안 됩니까?」
과거 르나르가 내게 한 적 있는 말들이 차례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지난밤의 일도 떠올랐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대공녀님.」
「당신이 날 좋아하면, 난 당신을 사랑해.」
그렇게 고백하곤 지독하게 입술을 삼켜댔더랬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열정적으로 혀를 섞는 중간중간 귓가엔 그런 달콤한 말들을 흘려 넣으면서.
애틋한 사랑 고백과 부딪혀오는 뜨거운 몸체에 백 텀블링이라도 할 기세로 황홀해 날뛰던 내 마력이 날 기절시켜버리기 전까지.
갑자기 기절해버려 싫었던 걸까?
그래도 어제 그렇게 고백해놓고….
이렇게 먼저 갈 줄은.
「사랑해.」
그래도 그 한마디가 날 용기 내게 했다.
난 르나르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아가씨, 잠깐! 잠시만요!”
안나가 마차에 오르려던 날 불렀다.
내가 뒤도니, 안나가 조그만 유리병에 담긴 영롱한 분홍색 액체를 내게 뿌리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안나?”
“카르웨인 후작가 하녀한테 들었는데 이 향수가 요즘 귀족 아가씨들 사이에서 그렇게 인기래요. 그런데 황제가 나서도 못 구할 만큼 물량 부족이라 이 향수를 원하는 아가씨들 몸이 그렇게 달아 계시다고……!”
“근데 안나, 넌 그 정도로 인기 좋은 향수를 대체 어떻게 구한 거야?”
“아가씨께 뿌려드리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미르엣 도련님께서 구해다 주셨어요. 도련님께서도 참 대단하시죠?”
안나가 오랜만에 푼 내 웨이브 진 긴 머리 사이사이에까지 그 향수를 뿌렸다.
그랬는데도 과하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마음에 들 정도로 그 향수는 향이 좋았다.
“어때요, 아가씨? 괜찮은 것 같아요?”
“응. 마음에 드네. 맡아본 향 중에 제일 좋은 것 같아.”
“이 향이요, 여자들도 좋아하지만 남자들은 더 좋아한대요.”
안나가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어쩐지 굉장히 수상쩍었다.
“안나…. 왜 그렇게 웃는 거야…?”
“네? 제가 웃었나요? 아니,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이참, 빨래를 걷어야 하는데…!”
횡설수설한 안나가 빠른 속도로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이제 들어가 볼 테니 한 시간 후쯤 데리러 오도록 해.”
내가 나를 르나르의 집까지 데려다준 마부와 호위 기사들에게 말했다.
그런데 기사들이 조금 이상했다.
내가 축객령을 내려도 바로 흩어지지 않고 쭈뼛대는 것이.
‘…뭐지?’
“왜?”
“저, 아가씨…. 외람된 말씀이지만 뭔가 뿌리신 겁니까?”
“왜? 별로야?”
“아뇨, 좋은 것 같아서요.”
“아. 고마워.”
기사들은 내게 몇 마디 더 향수에 대한 칭찬을 건네고 사라졌다.
내가 르나르 집 현관문을 두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와 함께 달칵, 문이 열렸다.
그런데 르나르가 문을 열다 말고 멈췄다.
‘응?’
“르나르?”
작게 열린 문틈으로 다가서며 내가 그를 불렀다.
그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왜 문을….”
다음 순간.
문이 활짝 열렸고 난 날 당긴 르나르에 의해 순식간에 집 안으로 들어가게 됐다.
르나르가 날 밀었다.
당겨진 내가 균형을 잡기도 전의 일이었다.
내 등에 밀린 현관문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리고 르나르가 거칠게 입술을 부딪쳐 왔다.
“……!”
뜨거운 혀가 입안을 휘저었다.
르나르와 현관문 사이에 끼어있던 나는 발끝이 땅에 닿지 않아 내 허리를 감은 르나르의 팔만 야무지게 때렸다.
하지만 르나르는 때리면 때리는 대로 할퀴면 대로 그대로 받아내며 입술을 떼어주지 않았다.
결국 내가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이 되어서야 그는 내게서 떨어졌다.
“뭐, 뭐 하는 거예요! 놀랐잖아요…!”
바닥으로만 내려줬지 여전히 날 안은 르나르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뭐 뿌린 거예요?”
“네?”
“어디서 이상한 향 묻히고 왔는데.”
르나르가 내게 가까이 몸을 붙이며 내 목과 어깨 사이에 얼굴 묻었다.
그러곤 숨을 들이마셨다.
“비켜줘요. 아직 밖에 호위 기사들이….”
내가 이미 사라졌을 호위 기사들을 두고 거짓말을 했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인데도.
짐승 같은 르나르가 왠지 정말 무섭게 느껴졌기에.
“아. 그 기사들. 안 그래도 정말 짜증 났는데.”
눈빛이 선득해진 르나르가 씹어뱉듯 말했다.
나는 당황했다.
“왜요, 왜. 제 호위 기사들이 왜요.”
“내 것 보고 침 흘리는 거 나는 못 참거든요.”
서늘하게 웃은 르나르가 다시 내 목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귀밑에서부터 목선을 따라 입술을 지분대기 시작한 그는 내 쇄골과 쇄골 아랫부분을 빨기 시작했다.
“하, 하지 마요, 그거. 이상해.”
“이상해? 뭐가?”
“기분이…, 아앗…!”
내가 작은 비명을 지르다 입을 틀어막았다.
비명을 지른 이유는 르나르가 내 어깨를 물었기 때문이었다.
“아팠어요? 힘 뺀 건데.”
“뺀 게 그거예요? 아파요. 엄청 아파요. 그리고 갑자기 어깨는 왜 무는 건데요. 이갈이라도 해요?”
“입 맞춰도 괜찮아요?”
“네?”
“입.”
르나르는 내 말을 듣는 것 같으면서도 듣지 않는 것 같기도 같았다.
황당해진 내가 울상이 되어 그를 보자 그가 사악하게 웃었다.
“대공녀님. 울어 봐요.”
“……네?”
“울어 봐요. 지금.”
“……미쳤나 봐.”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 된 나를 작게 웃은 르나르가 안았다.
아기처럼 안아 달래는 그의 품이 따뜻했다.
* * *
향수 소동이 있고 2주 후.
터넛 황제의 생일연 당일.
‘하. 살아는 있었네?’
캐스티나가 연회장을 가로지르는 르나르를 보며 생각했다.
시선을 느낀 르나르가 캐스티나 쪽을 봤다.
하지만 그를 보던 사람이 캐스티나란 걸 확인하곤 조금의 지체도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캐스티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 실소가 흐를 지경이었다.
‘문도 안 열어주더니….’
캐스티나는 르나르의 집에 막무가내로 들어가 버텼던 그 날 이후 상당히 자주 르나르의 집 현관문을 두드렸다.
그가 필요한 다양한 핑곗거리를 만들어놓고.
하지만 그 문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열린 적이 없었다.
처음엔 집에 없는 건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 문은, 엘로즈가 찾아오면 너무도 쉽게 열렸다.
르나르는 엘로즈에게만 다정했다.
캐스티나는 그게 참 싫었다.
‘내겐 칭찬 한마디 제대로 건네지 않으면서….’
캐스티나가 엘로즈, 르나르와 저녁을 먹었던 2주 전 그날을 떠올렸다.
「저한테 뭔가 하실 말씀 없으세요?」
「?」
「제가 준비한 저녁상 좀 봐주세요.」
「이미 봤어.」
「그런데도 하실 말씀이 없으세요?」
「없는데.」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던데….」
「난 고래든 당신이든 춤추는 걸 보고 싶지 않아.」
「호호호, 르나르 님은 정말! 예상을 빗나가지 않으시네요!」
그런데 그날 밤 캐스티나는 엘로즈가 르나르가 싸우는 걸 우연히 목격하게 됐다.
그래서 그것을 이용하기로 했다.
엘로즈가 그 밤이 지나기 전에 르나르를 다시 찾아올 것 같았기에.
캐스티나가 느끼는 르나르는 여자를 결국 지게 만드는 남자였으니까.
캐스티나는 엘로즈가 그녀를 확실히 볼 수 있을 아주 적절한 타이밍에 르나르의 집에서 나왔다.
엘로즈의 눈에 띈 다음엔 기다리기로 했다.
캐스티나는 그런 여자였으니까.
다른 여자들로 하여금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여자.
그 이상 나서지 않아도 오해와 의심이 쌓여 두 사람은 알아서 멀어질 예정이었다.
캐스티나의 계획대로였다면.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그 뒤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르나르는 여전히 캐스티나에게 불친절했고, 아니, 아예 그녀를 피하기 시작했고, 르나르와 엘로즈 사이는 오히려 더 견고해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대체 왜.’
캐스티나가 억울하게 생각하는데 연회장에 엘로즈가 나타났다.
차분했던 연회장이 크게 한 번 술렁였다.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코웰 가문에서 대공녀를 사교계에 내보내지 않는 건 제국 영식들의 불필요한 결투를 막기 위해서란 우스갯소리가 농담만은 아닌 것 같아요.”
그날 엘로즈를 처음 보는 궁중 악사들이 열에 들떠 귓속말을 했다.
엘로즈는 은은한 은빛이 도는 연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동그랗게 말아진 반 묶음이었다.
안나가 오후 내내 공들인 작품이었다.
르나르가 멀찍이서 엘로즈를 봤다.
그의 여왕은 오늘도 아름다웠다.
다가갈 수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반역 준비가 끝날 때까진 올렌도 앞에선 서로 거리를 유지해 올렌도와 르나르 사이에 불필요한 신경전을 만들지 않기로 미리 합의했기에.
그런데 멀리서 보니 더욱 잘 보였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그의 것에서 눈을 못 떼는 게.
‘설마 오늘도 그 향수를 뿌리고 온 건 아니겠지?’
그 생각을 하니 겁이 덜컥 났다.
참으로 묘한 향수였다.
이성을 마비시키는, 욕정을 불타오르게 하는.
안 그래도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아 그 전날 쪽지만 남긴 채 엘로즈 곁을 떠난 르나르였다.
아무리 그의 도덕적 관념이 엉망이라도 기절한 엘로즈를 코웰 저택에서 범하는 건 안 되는 일 같았기에.
게다가 아직 사과 맛을 모르는 여자가 틀림없었다.
기왕 인내하기로 한 거 르나르는 엘로즈와의 결혼 전까지 그 인내심을 유지해보기로 했다.
그럼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았기에.
대공과 코웰 형제들에게.
엘로즈의 좋은 반려가 될 것이라고.
이미 상상 속에서는 엘로즈와 결혼을 한 뒤 애까지 둘이나 낳은 르나르였다.
그런데 그 향수는 그런 르나르의 희망찬 미래를 자칫 물거품으로 만들 뻔했다.
가히 요망한 향수였다.
그때, 올렌도가 엘로즈에게 다가섰다.
두 사람을 지켜보는 르나르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