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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67화 (67/100)
  • 67화

    키스해줄래요?

    어쩐지 대화가 끊어진 산책길.

    “제게 말은 언제 놓을 거죠?”

    조금 어색했던 내가 르나르에게 불쑥 물었다.

    「그걸 왜 나한테 묻지?」

    캐스티나에겐 자연스럽게 편하게 말하던 그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르나르가 씩 웃었다.

    “사실 놓으려면 언제든 놓을 수야 있습니다. 근데 전 지금도 좋아서요. 황자인데 대공녀님께 존대할 수 있다니, 특별하잖아요?”

    르나르는 내게 말을 놓지 않았다.

    아까 잡은 내 손도 여전히 놓지 않고 있었다.

    그 손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저는 이제 르나르를 ‘황자님’이라고 불러 드릴까 하는데. 르나르가 날 존대하고 나도 르나르를 존대하는 건 이상하지 않을까요?”

    “그럼 대공녀님께서도 바꾸지 않으시면 되겠네요.”

    “그래도 그건….”

    “어렸을 때처럼 막 대하세요. 그때 기억 안 나십니까?”

    르나르가 옛날 이야기를 꺼냈다.

    “그땐 어렸으니까요.”

    “다시 생각해보니 그렇게 어리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렸어요. 지금과 비교해 생각해보면. 그때 르나르가 얼마나 작았는데….”

    “그때 제가 아무리 작았어도 대공녀님보단 컸던 것 같습니다.”

    “…아닌 것 같은데?”

    “근데 대공녀님께선 왜 지금도 작으신 거죠? 그때랑 비슷한 것 같은데?”

    “……! 치사하게 혼자만 커 놓고!”

    “대공녀님 덕분입니다. 그때 대공녀님께서 더글라스 밥 사주라고 주고 가신 돈으로 더글라스와 밥 잘 챙겨 먹어서.”

    한참 그렇게 이야기 나누다 보니 좋지 않았던 기분이 조금씩 풀려갔다.

    이내 은은한 보름달도, 길가에 핀 아기자기한 꽃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르나르가 물었다.

    “이제 좀 기분이 괜찮아지신 겁니까?”

    “…알았어요? 나 기분 안 좋은 거?”

    “그럼요. 제 관심은 항상 대공녀님께 향해 있으니까요.”

    “…….”

    “이제 말해보세요. 왜 저녁 식사 시간 내내 기분이 안 좋으셨는지.”

    내가 대답을 망설였다.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 걸까?

    캐스티나가 의도적으로 날 소외시키는 것 같아서?

    그럼에도 이전보다 내게 친절한 그녀에게 뭐라 할 수 없는 것이 답답해?

    르나르와 캐스티나가 머무는 곳이 가까워서?

    르나르가 원작과 같은 생각을 해낸 게 싫어서?

    그가 원작처럼 캐스티나를 좋아하게 될까 봐?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하지만 그중 밖으로 뱉을 수 있는 생각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대신 이렇게 물었다.

    “혹시 캐스티나를…, 어떻게 생각해요…?”

    그리고 바랐다.

    르나르가 아무 감정 없다고 답해주기를.

    그런데 순간, 르나르의 입꼬리가 꿈틀하는 것이 내 눈에 들어왔다.

    “…혹시 질투하시는 겁니까? 캐스티나 황녀를?”

    이내 그의 입매가 만족스럽게 휘어졌다.

    그리고 그걸 본 나는, 화가 났다.

    “……즐거워요?”

    “……네?”

    화가 났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가 웃는 것을 보고 화가 나다니.

    그런 감정은 살아생전 처음이었다.

    “제 질투가 르나르한텐 유희거리군요.”

    “유희거리라뇨. 무슨 말씀을 그렇게….”

    “제 마음이 아픈 게 그렇게 좋은가요?”

    “…대공녀님? 마음이 아프세요?”

    “따라오지 말아요.”

    내가 뒤돌았다.

    그리고 걸었다.

    그런데 발걸음이 무거웠다.

    꼭 그가 날 붙잡아주길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그런데 한참을 걸어도 따라오는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내가 따라오지 말라고 해놓고.

    나는 뭘 기대했던 걸까?

    혼란스러운 감정의 중심에서 내가 대기 중이던 마차로 향했다.

    코웰 저택으로 돌아온 한밤중.

    뒤척-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르나르를 좋아한다.

    르나르는 날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나를 필요로 하는 것은 오로지 내가 그의 마력에, 흉터에,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근데 난 뭘 기대했던 거지…?’

    깜빡이는 시야 사이로 침대 천장이 아른거렸다.

    격자무늬 창살을 통과한 달빛이 그 위에서 춤을 췄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내 머릿속에, 어떤 생각 하나가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데 원작의 르나르가 캐스티나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된 건 그녀가 그의 악몽을 없애주었기 때문에….’

    “…….”

    내가 벌떡,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혹시 내가 캐스티나의 마법약이 아니라.

    마법약을 만들어준 캐스티나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었다면, 르나르한테?

    ‘르나르를 만나봐야겠어.’

    기다릴 수가 없었다.

    해가 뜰 때까지.

    마음이 급해져 나는 몰래 코웰 저택을 빠져나가 르나르가 머무는 갈색 지붕의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나는 기껏 찾아간 그 집 현관문도 두드릴 수가 없었다.

    한밤중인 지금, 그 집에서 나오는 캐스티나를 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체온을 앗아갔다.

    그러고 보니 얇은 잠옷 드레스 위로 숄만 걸친 채였다.

    절정을 맞은 가을 밤바람은 꽤 차가웠는데.

    하지만 속도를 낼 엄두가 차마 나지 않아, 내가 올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느린 속도로 다시 코웰 저택을 향해 말을 몰았다.

    그리고 지친 마음으로 내 방에 들어섰을 때.

    “대공녀님?!”

    잔뜩 놀란 얼굴이 내 앞에 나타났다.

    르나르였다.

    “…르나르? 르나르가 어떻게 여기….”

    “사과하러 왔어요.”

    “사과요?”

    “대공녀님께서 질투해주셨다고 제가 웃은 거, 절대 즐거워 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냥 좋았습니다. 대공녀님께서 저 때문에 질투해 주셔서.”

    “…….”

    “근데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대공녀님께서 올렌도를 좋아하게 된 줄 알았을 때 제가 얼마나 힘들어했었는데…. 그걸 기억 못 하고….”

    …힘들었었어?

    마법사의 맹세와 상관없이?

    그저 내가 올렌도를 좋아하게 된 것일까 봐?

    “그런데 사과하러 왔더니 침대가 비어 있어 정말 놀랐습니다. 대체 어딜 다녀오신 겁니까?!”

    르나르가 내 어깨를 잡고 날 흔들었다.

    안 그래도 하얀 그의 얼굴이 더욱 희게 질려 있었다.

    내가 그런 르나르를 진정시켰다.

    “걱정하지 말아요. 잠시 산책하고 왔을 뿐이에요.”

    “이 밤에 산책하러 나가셨다고요? 위험하게? 대체 무슨 생각으로….”

    “…르나르가 무슨 상관이죠?”

    내 입에서 칼을 문 말이 나갔다.

    내가 르나르를 좋아하는 것처럼 르나르도 날 좋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됐지만, 그렇다고 이 밤에 르나르와 캐스티나가 한집에 있던 일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때, 르나르의 입에서 캐스티나의 이름이 먼저 나왔다.

    “혹시 제가 늦어서 화나신 겁니까? 그렇다면 제가 죄송합니다. 변명인 줄 알지만 캐스티나 황녀만 아니어도 좀 더 빨리 왔을 텐데….”

    “…캐스티나 황녀요?”

    “네. 대공녀님께서 떠나시고 한동안 그 자리에 머물렀습니다. 움직일 수가 없더라고요, 대공녀님께서 따라오지 말라고 하시니까.”

    “…….”

    “그나마 정신을 차리게 되었을 때 황녀가 나타났습니다. 할 말이 있다고. 그래놓고 제 집에 불쑥 들어간 뒤에 나올 생각을 안 해서….”

    “…….”

    “할 말이 있다고 해놓고 별 시답지 않은 소리만 해대며 나가질 않길래 들어서라도 쫓아내려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가더군요. 그래서 저는 바로 이리로 왔습니다. 물론 왜 진즉 쫓아내지 않았느냐고 탓하실 수도 있겠지만…. 대공녀님께선 믿을 수 없으시겠지만 저는 사실 여자와 닿는 걸 싫어합니다. 대공녀님이 아니면 그래서 굳이 닿고 싶지가 않아서….”

    “혹시 캐스티나 황녀가.”

    “…….”

    “집에서 어디 앉았었죠?”

    “어디요? 거실에 있는 소파에….”

    “그 집 거실엔 큰 창이 있는 걸로 기억해요. 소파는 그 창을 마주 보고 있고요. 맞아요?”

    “네, 그렇습니다.”

    “르나르는 캐스티나를 마주 보고 있었나요?”

    “네.”

    “그럼 르나르에게는 창밖이 보이지 않았겠네요? 캐스티나에게는 보이고?”

    “맞습니다. 근데 그건 갑자기 왜.”

    고개를 기울이는 르나르의 미간이 좁아졌다.

    난 르나르를 안아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알겠어요. 사과는 받아줄게요.”

    “그게 정말이십니까? 이렇게 갑자기요?”

    “받지 말까요?”

    “아뇨, 받으세요. 한 번 받으시고 두 번도 받으세요. 조금 갑작스럽긴 하지만… 안는 것도 됩니까?”

    르나르가 내게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곧 그에게 안기게 됐고 그의 품은 따뜻했다.

    바람에 빼앗겼던 체온이 한순간 되돌아오는 듯했다.

    한동안 얌전히 안겨있던 내가 르나르에게 물었다.

    “르나르…. 나 좋아해요?”

    “그럼요.”

    그가 숨도 안 쉬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그 좋아하는 게…, 좋아한다는 게…. 악몽이나 흉터 때문이 아니라….”

    “그럼요. 제가 겨우 그런 것 때문에 대공녀님께 제 목숨까지 걸었겠습니까?”

    그러게.

    난 왜 그 생각을 미처 못 했던 걸까?

    악몽을 꾸지 않고 싶은 것도 흉터를 없애고 싶은 것도 전보다 잘 살기 위해서였을 텐데.

    목숨보다 중요하진 않았을 텐데.

    “그럼…, 아까 그 말은 무슨 말이에요? 내가 아니면 닿고 싶지 않다는 말.”

    “말 그대로입니다.”

    “그 말은 나와 닿는 건 싫지 않다는 뜻이에요?”

    “싫으면 이렇게 안고 있겠습니까?”

    “정말 싫지 않아요? 싫어도 악몽 때문에 참고 있는 게 아니라?”

    “……네? 싫지 않습니다. 참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대공녀님과 닿는 게 좋았던 건 꽃집에서 다시 만난 그 순간부터. 아니…, 그보다 더 어렸을 적부터. 어쨌든 대공녀님과 닿는 게 싫었던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그럼 르나르… 나한테 키스해줄래요…?”

    내가 물었다.

    르나르가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흔들리는 르나르의 적갈색 눈동자 위로 하얀 달빛이 맺혀 반짝였다.

    “이렇게 물어도 싫지 않아요? 내가 먼저 요구해도? 내가 당신한테 먼저 나에게 닿을 것을….”

    르나르가 대답 대신 내 입술을 삼켰다.

    대답을 채근하려던 내 질문은 그의 입술 새로 별빛이 되어 산산이 부서졌다.

    르나르가 나를 들어 올렸다.

    내가 걸치고 있던 숄이 바닥에 떨어졌다.

    날 한 손으로 받친 그가 다른 손으로 내 뒷목을 잡았다.

    그가 욕심껏 날 만지고 주무르는 키스는 오랜 시간 이어졌다.

    그가 나에게서 떨어졌을 때 시야가 뒤집혔다.

    격자무늬 창살을 통과한 달빛이 춤추는 침대 천장이 보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르나르가 그 위로 나타났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대공녀님.”

    그의 고백이 달콤하고 시원한 향에 담겨 내게 전해졌다.

    “당신이 날 좋아하면, 난 당신을 사랑해.”

    르나르가 나에게로 몸을 숙였다.

    닫힌 입술을 파고드는 혀의 움직임이 거칠었다.

    버둥대는 팔을 잡아 누르는 손길은 자비 없었다.

    다정했던 조금 전과의 고백과는 전혀 딴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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