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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66화 (66/100)

66화

네 얼굴이 떠다녀서

“이야, 오랜만이네? 이게 얼마만이야?”

올렌도였다.

“마지막으로 뵌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잖아요. 여긴 웬일이세요?”

“그냥.”

“저희 내기는 아직 진행 중이잖아요.”

“내기 기간 내내 얼굴도 보러 오면 안 된단 얘기는 따로 안 했던 것 같은데.”

“내기 기간은 절 가만히 내버려두겠다고 하셨잖아요.”

“가만히 내버려두겠다고 한 건 그동안은 억지로 약혼하진 않겠단 뜻이었어. 나만 원한다면 언제라도 널 협박해 약혼할 수 있다는 걸 왜 모르는 것 같지?”

“…….”

내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올렌도가 고개까지 돌려버린 내 옆모습을 빤히 보는 게 곁눈질로 느껴졌다.

“…예쁘네.”

별안간 올렌도가 내게 말했다.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리니 그는 어느새 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느린 시선으로 훑고 있었다.

“왜 그동안은 머리를 그런 식으로 묶지 않았지?”

“글쎄요.”

“귀여워.”

“…….”

“앞으로 그렇게 자주 묶어도 괜찮을 것 같군.”

그렇게 말한 올렌도가 응접실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는 조금 당황하게 됐다.

“…가시려고요?”

“가지 말까?”

“아뇨, 가세요. 근데… 정말 그냥 오신 거예요? 아무런 용건도 없이?”

“응. 근처를 지나다 얼굴 보러 왔어. 자려고 누우면 침대 천장에 대공녀 얼굴이 떠다녀서.”

“…….”

“내가 가는 게 아쉬우면 같이 저녁이라도 먹을까?”

“선약이 있습니다.”

“르나르를 만나러 가는 건가?”

“…….”

“그게 아니면 나에게 소개시킬 여자라도 찾아다니고 있는 건가?”

“그건….”

“너무 노력하지 마. 헛수고가 될 테니까.”

올렌도가 비웃듯 장난치듯 가볍게 픽 웃었다.

이내 올렌도가 코웰 가문 응접실에서 사라졌다.

나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 * *

포장되지 않은 흙길에 들어서자 마차가 덜컹댔다.

난 여전히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자려고 누우면 침대 천장에 대공녀 얼굴이 떠다녀서.」

그 말은 원작의 올렌도가 캐스티나에게 한 적 있는 말과 거의 비슷했다.

[자려고 누우면 침대 천장에 네 얼굴이 떠다녀서.]

그 순간,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마차 밖에서 마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내 마차가 멈춰 섰고 마부가 내려준 발판을 딛고 내가 마차에서 내렸다.

내가 도착한 곳은 하얀 벽에 진한 갈색 지붕을 가진 집이었다.

내가 수도 외곽에 소유한 두 개의 작은 집 중 하나였다.

나는 곧바로 현관문으로 향해 문을 두드리려 했다.

그런데 안에서 캐스티나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호호호, 르나르 님은 정말! 예상을 빗나가지 않으시네요!”

르나르가 벌써 도착해 있는 모양이었다.

올렌도가 급작스럽게 방문하는 바람에 내가 늦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순간 우스운 생각 하나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 없이도 화기애애하네.’

나 없이는 두 사람이 냉전이라도 벌이길 바랐던 걸까?

내가 작은 실소를 흘리며 스스로를 비웃었다.

‘치졸해.’

더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아 내가 억지로 생각을 끊고 문을 두드렸다.

이윽고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 경쾌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어머! 엘로즈 님!”

캐스티나가 환한 얼굴로 날 맞았다.

르나르에게 안긴 날 보던 서늘한 그녀의 얼굴과 대비가 심해 내가 조금 당황하는데, 캐스티나가 내게 친근하게 팔짱을 껴왔다.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르나르 님과 제가 한참 기다리고 있었잖아요-!”

콧소리가 잔뜩 섞인 그녀의 목소리가 상당히 애교스러웠다.

며칠 못 본 사이 사람이 달라진 듯한 태도에 내가 눈만 깜빡이는데, 시선을 돌리니 팔짱을 끼고 눈썹 한쪽을 삐딱하게 올린 채 그런 캐스티나를 관찰하는 르나르가 보였다.

르나르의 시선이 캐스티나에게만 향해 있었다.

내가 그를 보는데도 그와 나의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나는 어쩐지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엘로즈 님, 제가 준비한 저녁상 보실래요? 두 분이 오신다고 해서 제가 정말 열심히 저녁상을 준비했어요!”

캐스티나가 내 팔에 매달리며 나를 식탁 쪽으로 이끌었다.

열심히 준비했단 그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리시안셔스가 꽂힌 화려한 센터피스를 중심으로 한 식탁 위는 보는 것만으로 군침이 도는 다양한 음식들로 한 상 가득 차려져 있었다.

“이렇게 신경 쓸 필요는 없었는데.”

“엘로즈 님과 르나르 님께서 제게 생활비로 건네주신 돈이 얼만데 당연히 이 정도는 준비해야죠.”

“고생했겠네요. 혼자 준비하기 만만치 않았을 것 같은데.”

“꺄아- 역시! 엘로즈 님께서는 제 노고를 알아주시는 군요?! 보셨죠, 르나르 님?! 칭찬은 이렇게 하는 거라고요!”

캐스티나가 르나르 쪽을 향해 입술을 삐쭉댔다.

내가 없는 사이 르나르가 캐스티나를 칭찬했던 걸까?

식사가 시작됐다.

나는 식사하는 동안 캐스티나에게 르나르와는 이미 논의를 끝낸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했다.

“나와 르나르는 케이시 양에게 올렌도 황자와 우연히 만날 기회를 만들어주기로 했어요.”

“우연히요?”

“자연스러운 만남일 때, 서로 마음을 주고받기가 더 수월할 것으로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나요?”

내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캐스티나에게 물었다.

캐스티나가 잠시 생각해보다 답했다.

“저, 피들을 다룰 줄 알아요.”

내가 안도했다.

“잘됐네요. 곧 터넛 황제의 생일연이 황궁에서 열리는데 그때 필요한 궁중 악사들을 지금 추가 모집 중이라고 하더라고요. 저희가 케이시가 궁중 악사가 될 수 있게 도와주면, 후에 황궁 연회에서 피들을 연주해줄 수 있겠어요?”

“가능할 거예요. 피들은 꽤 잘 다루는 편이거든요.”

캐스티나는 협조적이었다.

모든 일의 진행이 순조로웠다.

그런데도 나는 어쩐지 상한 고기 먹듯 마음이 불편한 것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오늘 식사 자리가 마련되기 며칠 전 르나르는 코웰 저택으로 날 찾아왔다.

올렌도와 캐스티나가 자연스럽게 만날 방법을 찾았다면서.

그는 캐스티나를 궁중 악사로 만들자고 했다.

「만약 캐스티나 황녀가 피들을 잘 다루는 것이 사실이기만 하다면 말이죠.」

르나르에게 캐스티나가 피들을 잘 다룬다고 귀띔해준 것이 나였다.

그러니 르나르가 캐스티나를 궁중 악사로 만들 생각을 하게 된 건 자연스러운 흐름일 터였다.

그런데 원작과 같았다.

캐스티나가 피들을 다룰 줄 안단 사실을 알게 된 후, 그녀를 궁중 악사로 만들 생각을 떠올린 르나르가.

그리고 난 그게….

싫었다.

‘르나르의 생각을 그 방향으로 이끈 것이 나이면서.’

그러면서 난 사실 그가 다른 방법을 떠올려주길 바랐던 걸까?

그때, 상념에 빠진 날 깨우는 캐스티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무도회엔 무슨 드레스를 입는 게 좋을까요?”

“궁중 악사들이 입는 옷은 정해져 있어.”

내가 입을 열기도 전 르나르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에에?! 그 말은 연주가 끝나고 연회 참석이 불가능하단 말씀이신 건가요?!”

“…….”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연회에 참석해야 올렌도 황자 전하를 꼬시든 말든 하지…!”

원작에서 올렌도는 궁중 악사 무리에서 피들을 연주하는 캐스티나를 보자마자 반해버렸는데, 이를 모르는 캐스티나로서는 어찌 보면 당연할 반응이었다.

“그 연회에서 모든 것을 끝내라는 게 아니야. 궁중 악사가 되면 황궁 안 궁중 악사 연습실도 마음껏 드나들 수 있고….”

“그럼 르나르 황자님도 황궁에서 볼 수 있는 건가요?”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이 질문엔 르나르도 허를 찔린 듯 입을 다물었고, 나도 머릿속이 하얘졌다.

캐스티나는 질문에 아무런 의도도 없었다는 밝게 웃어 보였다.

식탁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작은 손등에 턱을 괸 캐스티나가 무구한 눈망울을 깜빡이며 르나르에게 말했다.

“황자 제복 입으신 거 보고 싶어요.”

“내가 황자인 건… 언제부터 알고 있었지?”

“그게 중요한가요? 어차피 제가 유혹해야 할 사람은 올렌도 황자님이신데.”

캐스티나가 상체가 흔들릴 정도로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튼. 저는 연회에는 꼭 참석하고 싶어요.”

“연주가 끝나면… 연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도와줄게요.”

“꺄아! 정말요, 엘로즈 님?! 너무 기대돼요! 저 정말 잘할게요!”

캐스티나가 짝짝짝 어린아이처럼 손뼉 치며 말했다.

“엘로즈 님, 최고!”

날 향해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시선은 다시 르나르를 향했다.

“르나르 황자님, 저 연회 드레스는 뭘 입을까요?”

“그걸 왜 나한테 묻지?”

“황자님께서 남자시잖아요. 남자와 여자는 보는 눈이 다를 수 있으니 올렌도 황자 전하를 유혹할 때 입어야 하는 드레스는 르나르 전하께서 골라주셔야죠.”

“케이시.”

내가 캐스티나를 불렀지만 그녀는 내 부름을 못 들은 척했다.

“금색을 입을까요, 지난번처럼?”

“…….”

“아니면 제 머리칼처럼 붉은색?”

“…….”

“황자님- 이게 다 엘로즈 님의 파혼을 위해서잖아요!”

“…붉은색이 나을 것 같아. 금색, 지난번에 입었다고 하는데 전혀 기억이 안 나. 별로였나 봐.”

“잘됐네요. 르나르 황자님 눈 색과도 잘 어울릴 것 같아요.”

대화가 묘하게 나를 빼고 이루어지고 있었다.

왕따라도 당하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그러다 캐스티나의 시선이 다시 내게 향했을 때,

“그래서 드레스 준비는, 엘로즈 님께서 해주시는 건가요?”

그녀는 내게 이것을 물었다.

정말 기분이 이상했다.

* * *

식사를 마치고 나니 이미 깜깜한 저녁이었다.

“바로 저택으로 돌아가실 겁니까?”

캐스티나와 식사한 집에서 나온 뒤, 르나르가 내게 물었다.

“잠깐 들어가서 차라도 한 잔….”

르나르가 우리가 나온 집의 맞은 편, 우리가 나온 집과 완벽하게 똑같이 생긴 갈색 지붕의 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집은 최근 르나르가 지내고 있는 집이었다.

내가 수도 외곽에 소유한 두 개의 작은 집 중 또 다른 한 채.

황궁에 머물기 싫어하는 르나르를 위해 내가 제공한 집이었다.

캐스티나에 대한 감시와 보호도 맡길 겸.

하지만 오늘 식사 자리를 겪고 나니 나는 르나르에게 이 집을 제공한 것이 후회됐다.

두 집이 가까워도 너무 가까웠기에.

상념에 잠긴 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보듯 안 보듯 슬며시 내 눈치를 보던 르나르가 말했다.

“다른 의도가 없었다곤 말하지 못하겠지만 있었다고 말하기도 좀 그렇습니다. 다른 의도 같은 건 늘 항상 있어 왔으니까요.”

복잡하게 말하는 그에 알아듣지 못한 내 표정이 좋지 않아졌다.

그러자 르나르가 한숨을 내쉬며 덥석 내 손을 잡았다.

“그래요. 좋습니다, 산책. 산책이나 합시다, 우리.”

그가 작은 꽃들이 핀 좁은 길로 날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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