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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64화 (64/100)
  • 64화

    연인 같다

    그레이시아나 제국으로의 귀환은 바로 다음 날 아침 이루어졌다.

    더글라스가 구해온 두 대의 마차 중 한 대엔 아픈 에반과 그를 돌볼 더글라스가, 다른 한 대엔 안나와 캐스티나가 탔다.

    남은 사람들은 각자 말을 탔는데 엘로즈와 르나르는 한 말을 탄 것이 특이했다.

    두 사람에겐 새삼스러울 것 없는 일이었지만.

    엘로즈가 바로 뒤 르나르에게 말을 건넸다.

    “올렌도 황자와 캐스티나 황녀를 자연스럽게 만나게 해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우리와 캐스티나 황녀의 관계는 숨기고요. 그녀가 마음에 들어도 올렌도 황자가 내기에 지기 싫어 억지로 마음을 숨길 수도 있으니.”

    “좋은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그럼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을 방법을 제가 한 번 생각해보죠.”

    “캐스티나 황녀는 피들을 잘 다루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 점을 참고하면 좋을 것 같아요.”

    원작의 캐스티나가 올렌도를 만나게 된 것이 그녀가 그레이시아나 제국 황실의 궁중 악사로 일하게 되면서임을 떠올린 엘로즈가 말했다.

    원작에서 캐스티나를 궁중 악사로 취직시킨 것이 르나르였다.

    올렌도에게 반한 그녀가 그를 독살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안타까운 마음이 든 엘로즈가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있는 르나르의 단단한 팔에 무심코 손을 얹었다.

    르나르의 허리가 경직됐다.

    “…뭐 하시는 겁니까?”

    조금 날카롭게 들리는 르나르의 물음에 엘로즈가 흠칫 놀라 손을 뗐다.

    ‘먼저 만지는 건 싫어하는데.’

    오해였다.

    르나르는 엘로즈가 먼저 닿는 걸 싫어하지 않았지만, 아니, 오히려 바랐지만, 르나르가 그녀에게만큼은 처음부터 스킨십 혐오증이 없었단 사실을 모르는 엘로즈의 오해는 계속되는 중이었다.

    한편 르나르는 엘로즈의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줬다.

    지난밤 안으로 들어오라길래 기대했었다.

    정말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 싶어서.

    하지만 엘로즈는 르나르의 품에 안기자 조금 바스락대다 곧 잠이 들었다.

    쌔근쌔근 잠든 그녀를 보며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좋아한다면서.’

    그렇다면서 그를 취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는 걸까?

    그렇게 잡아 먹어주십사 턱밑을 맴도는데?

    그래놓고 이렇게 쉽게 그를 만진다.

    그녀의 의미 없는 손길이라도 그의 아래를 얼마나 뻐근하게 만드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결국 참기 어려워진 르나르가 엘로즈로부터 살짝 몸을 물렸다.

    “대공녀님.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습니다.”

    르나르의 불만 서린 목소리는 여전히 엘로즈에겐 조금 날카롭게 들렸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죠?”

    “인식 있는 과실도 과실은 과실이고요.”

    “좀 알아듣게 말해요.”

    엘로즈와 르나르가 투닥거렸다.

    그 모습이 외부에서 보기엔 퍽 다정해 보였다.

    캐스티나가 마차 안에서 그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시는 거예요?”

    안나가 물었다.

    “아니에요.”

    캐스티나가 안나가 보지 못하게 하려 마차 창 커튼을 닫아버렸다.

    하지만 안나는 이미 캐스티나가 보고 있던 것이 엘로즈와 르나르란 걸 확인한 뒤였다.

    “두 분 참 보기 좋죠?”

    안나가 일부러 캐스티나에게 물었다.

    캐스티나는 침묵을 유지했다.

    “저는 저 두 분만 보면 세상에 저렇게 잘 어울리는 쌍이 또 있을까 싶어요. 두 분이 함께 계신 걸 보기만 해도 제 시력이 향상되는 기분인….”

    “두 사람. 연인 사이인가요?”

    캐스티나가 안나의 말허리를 자르며 물었다.

    안나는 그렇다고 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두 사람.

    연인 사이던가?

    ‘공식적으론….’

    아닌 것 같다.

    안나가 보기엔 연인도 저런 연인이 또 없었지만.

    “연인 사이는…. 아니세요, 아직은. 하지만 적어도 황자님께서 저희 아가씨를 좋아하시는 건 확실한 것 같아요. 저희 아가씨를 보실 때마다 황자님 눈에서 꿀이 뚝뚝….”

    “……황자님?”

    캐스티나가 이번에도 안나의 말허리를 자르며 반문했다.

    캐스티나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안나가 청록색 눈동자를 깜빡였다.

    “…모르고 계셨어요? 딱히 비밀은 아닌데.”

    캐스티나는 몰랐다.

    르나르가 엘로즈를 ‘대공녀님’이라 부르지 않았던가.

    엘로즈는 르나르를 이름으로 부르고.

    ‘게다가 그 태도.’

    엘로즈를 여왕 모시는 듯 대하는 르나르의 그 태도.

    그것 때문에 캐스티나는 르나르의 신분이 엘로즈보다 미천할 거라고 생각하고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황자였다니.

    왕자도 아닌 황자였다니.

    올렌도 같은 황자였다니.

    ‘설마 올렌도보다 황태자가 될 확률이 높은 걸까…?’

    그래서 올렌도는 캐스티나에게 넘기고 그녀는 르나르와 결혼하려고.

    캐스티나의 금빛 눈동자에 작은 불꽃이 번쩍했다.

    * * *

    포털에 이르기 직전 우리는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안나가 깔아준 넓은 천 위에 앉아 나는 풍경을 감상했다.

    넓은 초원과 에메랄드빛 호수.

    플루토나 제국이 내게 남긴 인상은 푸르름이었다.

    그때, 내 머리 위에 무언가 얹히는 느낌이 났다.

    나와 같이 앉아있던 캐스티나와 안나의 시선이 내게 고정됐다.

    내가 머리 위로 손을 올렸을 때, 부드럽고 큰 손이 내 손을 잡았다.

    손이 잡히자 약간 쌓였던 피로가 곧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르나르?”

    고개를 뒤로 젖히니 날 내려다보며 웃는 르나르가 보였다.

    그의 위로 투명한 햇살이 쏟아져 눈부셨다.

    “잘 어울리시네요.”

    “뭐가요?”

    “아가씨, 화관이에요. 들꽃으로 만든 화관.”

    르나르가 건넨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게 안나가 설명했다.

    르나르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대공녀님, 잠시만 이리와 보시겠어요?”

    “다녀오세요, 아가씨!”

    안나가 르나르가 날 끌고 가는 것이 만족스럽다는 듯 공중에 손까지 붕붕 흔들며 인사했다.

    캐스티나 또한 내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런데 날 보는 캐스티나의 무표정한 얼굴이, 나는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뭔데 눈까지 가리는 거예요?”

    작은 숲으로 들어선 르나르가 내가 내 눈을 가리기에 내가 르나르에게 물었다.

    “잠시만요. 답답해도 조금만 참으세요.”

    뒤에 선 르나르가 속삭였다.

    그리고 얼마나 더 걸었을까.

    “다 왔습니다.”

    르나르가 내 눈을 가렸던 손을 치웠다.

    그리고 나는….

    “우… 우와…!”

    “어때요? 마음에 드십니까?”

    그곳은 형형색색의 들꽃이 가득 핀 들판이었다.

    알록달록한 들판과 새파란 하늘의 어우러짐이 한 폭의 그림이었다.

    정말 그림으로 만들어 소장하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르나르가 그런 나를 골똘한 눈빛으로 관찰했다.

    “대공녀님,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으세요?”

    “가지고 싶단 생각이요.”

    그러자 르나르가 콧소리가 반쯤 섞인 웃음소릴 냈다.

    그가 그렇게 웃는 것은 처음 듣는 것 같아 내가 르나르를 봤다.

    “…왜요? 왜 그렇게 웃는 거예요?”

    “그게 가지고 싶단 생각하실 때 지으시는 얼굴이셨습니까?”

    “?”

    “그거 제가 기죽었을 때 대공녀님이 저 보면 지으시는 표정인데?”

    “!”

    “취향 너무 특이하신 거 아닙니까?”

    대놓고 놀리는 르나르 말에 나는 얼굴이 타오를 것 같이 뜨거워졌다.

    “아, 아니에요, 그런 거…!”

    “걱정 마세요. 제 취향은 더 특이하거든요.”

    르나르가 내게 웃었다.

    “알게 되시는 날엔 깜짝 놀라실 겁니다.”

    그런 이상한 말을 쓸데없이 다정하게 했다.

    숲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던 길.

    걷던 중 르나르의 손끝과 내 손끝이 부딪혔다.

    ‘우리가 이렇게 가깝게 걷고 있었구나. 손끝이 부딪힐 만큼.’

    라고 내가 생각하는데, 르나르의 온도 높은 긴 손가락이 내 손가락을 감아왔다.

    내 손가락 사이사이를 문지르는 감각이 간지러웠다.

    그러다 깍지를 꼈는데, 르나르는 그렇게 잡은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 상태로 걷고 있으려니까 꼭….

    ‘연인 같다.’

    내가 생각했다.

    르나르가 내 손을 잡은 적은 많았지만 이렇게 걸으면서 손을 잡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평범한 스킨십이 휘몰아치듯 강한 스킨십들보다 적었다.

    “대공녀님.”

    그가 날 불렀다.

    “저는 지금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시간이 멈춘 것 같다고 느끼게 됐다.

    소리 없이 부는 바람.

    나뭇잎 사이로 떨어진 조각난 햇살.

    날 보며 미소 짓는 르나르.

    맞잡은 손을 통해 르나르의 심장이 뛰는 것이 나에게까지 전해졌다.

    나는 그것이… 그가 내게 했던 그 어떤 입맞춤보다도 내 정신을 아득하게 만든다고 느끼게 됐다.

    “어……언제까지 대공녀님이라고 부르실 건가요? 올렌도 황자 전하처럼 대공녀라고 부르시든지 이름을 부르세요. 이제 황자님이시잖아요.”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 것을 들킬 것 같았던 내가 일부러 대화 주제를 바꿨다.

    머릿속으론 애국가를 불렀다.

    참 오랜만에 불러보는 애국가였다.

    “대공녀는 싫습니다. 올렌도와 똑같은 호칭으로 대공녀님을 부르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요. 그럼 여왕님은 어떠십니까? 전 사실 그게 제일 좋은데.”

    르나르가 살짝 애교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순간 민망한 기분이 들어 타이르듯 르나르에게 말했다.

    “하지만 황자님, 전 여왕이 아니잖아요. 여왕도 아닌데 여왕이라고 부르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해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합니까? 그리고 반역이 끝나면 어차피 여황제가 되는 거 아셨습니까? 대공 각하와 레오 대공자님께선 대공녀님께 제국을 선물 드릴 생각이신 것 같던데요.”

    “아뇨, 전 그 자리에 오를 생각이 전혀….”

    그때, 르나르가 보폭을 넓혀 갑자기 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곤 여전히 내 손을 잡고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또한 대공녀님께서 그 자리에 오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대공녀님께서 여왕, 아니, 여황제가 되시면 전 여황제께 기사의 서약을 할 겁니다. 제 목숨과 마음을 다해 지켜드리겠다고요. 제 숨은 나의 여황제 폐하, 평생 당신의 것입니다.”

    르나르가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 순간은 강렬한 기억이 되어 내 뇌리에 새겨졌다.

    나중에 지금 이 순간의 빛, 온도, 바람까지 다 기억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방해받고 싶지 않았던 그때,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꺄악! 누구 없어요?! 푸우-! 살려주세요!”

    캐스티나의 목소리였다.

    놀란 나와 르나르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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