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략남이 훅 들어왔어-63화 (63/100)

63화

내가 왜

목욕을 마친 캐스티나는 그녀를 위해 준비된 드레스를 봤다.

프릴과 보석이 아낌없이 달린 화려한 드레스였다.

적발에 금안을 가진 그녀에게 잘 어울릴 연한 금색의.

‘세심하기도 하시지.’

갖춰 입은 드레스를 거울에 이리저리 비춰보며 캐스티나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렇게 질이 좋은 드레스도 오랜만이었다.

캐스티나는 기분이 날아갈 것처럼 좋았다.

“준비 마치시면 식당으로 모셔오라고 하셨어요.”

안나가 거울에서 눈을 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캐스티나를 재촉했다.

“아직 준비가 다 끝나지 않았어요.”

캐스티나가 심상히 말했다.

캐스티나의 대답이 의아해 안나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미 한참 전에 끝나도 끝난 것 같은데…?’

“머리는 어떻게 묶는 게 좋을까요? 한쪽으로 땋는 건?”

“아까부터 기다리고들 계실 거예요.”

“푸는 것도 괜찮을 것 같긴 하지만 역시 묶는 게 더 예쁠 것 같아요.”

안나의 초조함은 개 짖는 소리쯤으로 치부하는 듯한 캐스티나에 기가 막혀 안나가 실소를 뱉었다.

하지만 캐스티나는 이러나저러나 거울에서 눈을 뗄 줄을 몰랐다.

캐스티나는 그녀를 구해준 르나르를 위해, 스스로의 외모에 신경 쓰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다.

안나가 캐스티나의 요구에 따라 그녀의 머리를 묶었다 풀었다 반복하고 나니 어느새 30분이 훌쩍 지나있었다.

초조해하는 안나의 뒤를 따라 캐스티나가 여유롭고 우아한 발걸음으로 식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식당에 도착했을 때, 캐스티나는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르나르가 혼자가 아니었다.

“케이시 양?”

그녀가 직접 준비한 드레스를 알아본 엘로즈가 식당에 들어선 캐스티나를 불렀다.

캐스티나가 가짜 이름까지 사용하며 정체를 숨기는 게 의아했지만, 모른 척해주기로 르나르와 입을 맞춘 엘로즈였다.

캐스티나가 그녀의 가짜 이름이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캐스티나의 시선의 끝에 르나르와 나란히 앉은 엘로즈가 걸렸다.

첫눈에 봐도 매력적인 여자였다.

제국 제일의 미녀 소리만 들어온 캐스티나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 만큼.

게다가 르나르는 캐스티나가 식당에 들어선 것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백발에 가까운 은발을 가진 그 여자에게만 고정되어있었다.

마치 그녀 외엔 이 세상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단 것처럼.

캐스티나가 기가 막혀 입꼬리를 더욱 끌어올렸다.

“만나서 반가워요. 일단 식사부터 할까요?”

엘로즈의 다정한 목소리가 캐스티나의 심기를 건드렸다.

하지만 캐스티나는 예의 바르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식사가 시작됐다.

“저희 제안에 동의하셨다고 들었어요.”

몸에 밴 곧은 자세로 스테이크를 썰던 엘로즈가 말했다.

캐스티나가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저희….’

“네. 제가 그레이시아나 제국의 올렌도 황자를 유혹해 절 좋아하게 만들면 된다고 들었어요. 그 일에 성공하면 평생 먹고 살 걱정은 안 해도 되게 만들어주시겠다고.”

“유혹…이요…? 좋아하게… 만들면…?”

잠시 당황하던 엘로즈가 르나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분명 캐스티나에게 전하기로 합의한 내용이 이 내용이 아니었는데?

미소를 머금고 엘로즈만 보던 르나르가,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보자 크게 동요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이 캐스티나에겐 퍽 친밀한 한 쌍처럼 보였다.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남자였던가…?’

캐스티나가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처럼 보이는 르나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시장에서 보았던 오만하고 서늘했으며 거침없었던 르나르의 모습이 지금의 르나르 위로 겹쳐졌다.

그때의 르나르는 맹수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길이 잘 든 고양이 같았다.

저 여자가 그렇게 대단한 걸까?

맹수를 고양이로 만들 수 있을 만큼?

“억지로 유혹하길 바라는 게 아니에요. 억지로 좋아하게 만들 필요 없다는 말이에요.”

올렌도와 캐스티나가 만나기만 하면 사랑에 빠질 수 있을 거라고 사실 믿고 있던 엘로즈가 말했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그녀는 두 사람을 적극 지원할 생각이었다.

반역의 영향이 닿지 않는 곳으로 보내 잘 살게 해줄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라 캐스티나가 황후가 되길 원한다면, 그것도 수용할 수 있었다.

그녀의 애초 계획도 캐스티나와 올렌도를 이어준 뒤 올렌도와 파혼하는 것이었으니.

반역 전에 그 파혼이 일어난다면 위험한 반역 또한 꼭 벌어진 필욘 없는 일이었다.

만약 반역이 일어나기 전까지 파혼하지 못해 반역이 일어나도 괜찮았다.

어쨌든 캐스티나는 노예시장에 있는 것보단 행복할 것이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이 모든 과정은 의미 있었다.

적어도 엘로즈는 그렇게 생각했다.

“중매 제안에 응한단 정도로만 생각해주면 될 것 같아요. 우린 그저 케이시가…,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올렌도 황자를 만나봤으면 좋겠어요.”

“긍정적인 마음….”

“두 사람이 잘되면 물론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케이시에겐 나쁘지 않은 일이 될 거예요. 그레이시아나 제국까지 걸음 하게 만든 보상을 충분히 할 것이니. 케이시의 남은 평생에 걸쳐 말이죠.”

엘로즈의 설명을 들은 캐스티나가 미소 지은 채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속으론 엘로즈를 비웃고 있었다.

‘가식적이긴. 결국 파혼하고 싶어 날 데려가는 것이면서. 파혼하고 싶은 건 옆의 남자를 좋아해서겠지? 내가 올렌도 황자를 유혹해주길 사실 바라고 있을 거면서 선한 척은.’

캐스티나가 시선을 내려 테이블을 봤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르나르는 엘로즈 옆에 있고 그녀는 그 반대편에 앉아있다는 것부터가.

캐스티나는 이상하게 제 자릴 엘로즈에게 빼앗긴 것만 같단 기분이 들었다.

* * *

“아가씨, 그 여자 말이에요. 케이시. 꼭 아가씨 곁에 둬야 하는 여자예요?”

내 잠자리를 봐주던 안나가 별안간 내게 물었다.

“당분간은. 왜, 안나?”

“아니, 그냥…… 그냥요. 그 여자만 보면 기분이 세 해서…….”

“무슨 일 있었어?”

내 질문에 안나가 고개를 저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막상 설명하려니 어떻게 말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머리를 땋아달래서 싫었다고 할 수도 없고…….”

안나와 캐스티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황녀였던 캐스티나가 안나를 제 하녀처럼 부렸나 싶기도 했다.

내가 안나에게 캐스티나의 비밀을 말해주려 했다.

그걸 알게 되면 혹시 안나가 조금은 덜 기분 나쁠 수 있을까 싶어.

그때 창가 쪽에서 똑똑,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무에 앉은 르나르였다.

내가 갑작스러운 르나르의 등장에 놀라는데, 다소 심각했던 안나가 별안간 상기되어 경쾌하게 외쳤다.

“아가씨!! 전 이만 나가볼게요!!”

“…이렇게 갑자기?”

“집사님께서 황자님과 계약을… 아니, 아무튼!! 그런 게 있어요!! 전 이만 나가볼게요!!”

안나가 내가 부르기도 전 객실 밖으로 쏜살같이 사라졌다.

창가 쪽을 보니 안나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는 르나르가 보였다.

“창문 말고 문으로 오라니까요.”

내가 활짝 창문을 열며 말했다.

“예전에도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창문도 문입니다.”

르나르가 능글맞게 대꾸하며 씩 웃었다.

“왜 왔어요? 무슨 할 말 있어요?”

그 순간, 르나르가 내게 가까워졌다.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떨어졌다.

몸속 마력이 크게 순환하며 머릿속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부족해서요, 대공녀님이. 오늘 한 번도 입을 못 맞췄더니.”

그렇게 말하는 르나르는 당당했다.

“…안으로 들어와요. 계속 거기 앉아있을 거예요?”

그러자 르나르가 잠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눈을 휘어 웃으며 놀리듯 말했다.

“우리 대공녀님 적극적이신데요?”

르나르는 내가 뭐라 설명을 덧붙이기도 전 금세 객실 안으로 넘어 들어왔다.

그 뒤 내가 밀어낼 틈도 없이 날 안은 채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잘 마른 이불의 포근한 냄새가 르나르와 내 무게에 눌려 바람에 날린 민들레 꽃씨처럼 객실 안으로 가득 흩어졌다.

르나르의 입술이 내 귓바퀴에 닿았다.

“저 적극적인 여자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르나르가 속삭인 귓속이 간지러웠다.

* * *

밤바람이 선선했다.

캐스티나는 여관 근처를 산책하는 중이었다.

그녀가 오늘 맞이하게 된 상황에 대해 차분히 생각해보기 위해.

캐스티나가 만나게 될, 유혹하게 될지 모르는 남자는 그레이시아나 제국의 올렌도 황자.

그녀가 황녀였을 때조차 탐낼 수 없던 남자였다.

그레이시아나 제국은 플루토나 제국과 비등한 국력을 가지고 있었고, 캐스티나는 황제의 17남 6녀 중에서도 뒷배 없는 후궁 소생의 5황녀에 불과했기에.

현재의 그녀는 신분이랄 게 없었지만 올렌도를 충분히 유혹해 황후가 된다면 플루토나 제국 황녀였던 것보다 모자람 없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었다.

애국심이랄 걸 조금 끌어내 본다면, 플루토나 제국을 집어삼킨 그레이시아나 제국 황실에 대한 복수의 기회로 삼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어떻게 복수해야겠단 구체적 생각은 없었지만, 곁에 있다 보면 뭔가 방법이 생기지 않을까 싶었다.

어찌 보든 좋은 기회가 맞았다.

배불뚝이 후작의 노예가 되는 것보단 뭐가 되어도 나을 운명이었다.

그런데도 기분이 나빴다.

꼭 남이 버리는 걸 주워가는 느낌이었다.

엘로즈가 버리는 올렌도를 캐스티나가.

‘내가 왜… 그 여자 좋은 일을 해야 하지…?’

합리적이지 못한 생각을 하는 캐스티나의 금안이 가늘어졌다.

그때였다.

캐스티나가 나무 위에 앉은 르나르를 보게 된 것은.

‘왜 저기 올라가 있는 거지?’

의아했지만, 캐스티나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달빛에 젖은 흑발이 아름다웠다.

사르륵 휘날리는 그 남자의 머리칼에 캐스티나의 금안도 같이 요동치는 듯했다.

그때, 르나르가 마주한 창문을 두드렸다.

이내 창문이 열리고 엘로즈가 모습을 드러냈다.

르나르가 엘로즈에게 입을 맞췄다.

다음 순간, 르나르가 창문 안으로 사라졌다.

“기분… 나빠….”

눈매를 잔뜩 일그러뜨린 캐스티나가 발걸음을 옮겨 여관 안으로 사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