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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62화 (62/100)
  • 62화

    7천 골드

    그날 캐스티나의 하루는 악몽이 될 예정이었다.

    절대 팔리지 않고 싶은 사람에게 팔리기 직전의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어디 하자는 없는 거지? 예컨대 병이라도 가지고 있달지….”

    배불뚝이 후작이 창살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캐스티나의 치맛자락을 훑었다.

    수치심에 얼굴을 붉힌 캐스티나가 움츠려 몸을 가렸다.

    “아이고, 후작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 걱정일랑 하덜덜 마십쇼.”

    캐스티나를 파는 노예 상인이 간신배처럼 손을 비비며 후작의 비위를 맞췄다.

    한때는 황녀였지만 마녀와 마법사들의 반란으로 황실이 무너진 뒤, 신분을 숨긴 채 마법약을 만들어 팔아 근근이 생활을 유지해온 캐스티나였다.

    캐스티나는 마력이 없었지만, 마법약 제조는 마력이 담긴 재료만 있으면 그녀처럼 평범한 사람도 만들 수 있었기에.

    하지만 제국에서 마법약 판매는 불법.

    마법약을 팔다 붙잡힌 캐스티나는 꼼짝없이 노예 신세가 됐다.

    그렇게 노예 시장으로 흘러들어온 지가 일주일.

    그동안은 여자 귀족들만 손님으로 왔기에 굳이 캐스티나가 팔릴 걱정을 할 일은 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젊고 잘생긴 남자 노예들이었다.

    그러나 바로 어제 노예 시장을 찾은 저 후작은 캐스티나를 원하고 있었다.

    어제에 이어 가격 흥정을 하며.

    “아무리 하자가 없다지만 5천 골드는 좀 비싼 것 같은데….”

    “아이고, 후작님. 저 정도 상품이면 5천 골드는 절대 비싼 게 아닙니다. 거, 얼굴 반반한 거 보십쇼! 후회 없는 구매 경험 보장드립니다, 네!”

    “그래도 5천 골드는 좀….”

    그때, 당당하면서 오만한 목소리가 후작의 말허리를 잘랐다.

    “7천 골드.”

    캐스티나가 고개를 들었다.

    ‘…뭔데 저렇게 목소리가 좋지…?’

    황궁 무도회에서 듣곤 했던 왈츠의 노래 선율처럼 그녀의 가슴을 뛰게 하는 목소리.

    목소리의 주인인 흑발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지하 감옥 출입구에 기대서, 노예 상인과 후작을 보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캐스티나는 숨이 멎는 것 같은 감정을 느꼈다.

    놀라게 될 수밖에 없는 얼굴이었다.

    “저 치는 5천 골드도 부담스러운 것 같으니 나한테 파는 게 어때? 나 돈 많은데.”

    남자가 노예 상인을 향해 싱긋 미소지었다.

    사람을 홀리는 류의 웃음이었다.

    캐스티나와 같은 인상을 받은 것도 아닐 텐데, 홀린 눈빛의 상인이 이미 남자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이고, 나으리이이이…. 이 근방에서는 처음 뵙는 분 같은데……?”

    돈 냄새만큼은 기가 막히게 맡는 상인이었다.

    당황한 후작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7, 7천…, 아니, 7천 5백 골드…!”

    “1만 골드.”

    르나르가 건조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1, 1만 골드…? 자네, 미친 거 아니야?! 1만 골드면 평민 가족 2년 치 생활비야! 그 돈을 겨우 노예 계집 하나에 다 쓰겠다고?!”

    “돈 없으면 빠지든가.”

    “이, 이런 불결한…! 1만 5백 골드!!”

    “1만 5천 골드.”

    “젠장!! 나도 1만 5천 골드!! 이봐, 이 근방에서 계속 장사하고 싶지?!”

    후작이 노예 상인에게 다가서 상인의 멱살을 잡았다.

    “그럼 나한테 팔아, 나한테. 아니면 다시는 이 근방엔 발도 못 붙이게 될 테니까…!!”

    흰자위를 번뜩이며 위협하는 후작에 노예 상인이 잔뜩 목을 움츠러뜨리며 대답 대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후작에게 팔리게 되었다.

    캐스티나는 멎었던 숨이 턱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구원을 바라는 표정으로 남자를 봤다.

    “어쩔 수 없네.”

    가볍게 어깨를 으쓱한 남자가 출입구 밖으로 사라졌다.

    절망이 가득 찬 캐스티나의 시야에 사라진 남자의 뒷모습이 어른거렸다.

    * * *

    “제길, 노예 하나에 대체 얼마를 쓴 거야! 너 말이야 너, 돈값은 제대로 할 수 있겠지?!”

    지하 감옥을 떠나 상점 밖으로 나온 후작이 캐스티나에게 삿대질하며 온갖 히스테리를 부렸다.

    캐스티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너 따위가.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이, 이 계집이?! 벌써 고분고분하지 않고 벌써?!”

    후작이 솥뚜껑 같은 손바닥을 하늘 위로 올렸다.

    캐스티나가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곧 후끈거릴 것으로 생각됐던 뺨은 아프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눈을 떠보니 지하 감옥에서 본 남자가 후작의 손목을 쥐고 있었다.

    “아……! 아……! 아……!”

    잡힌 것만으로도 아픈 건지 후작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몸을 비틀며 신음했다.

    ‘덩치만 크지 약해 빠졌네.’

    캐스티나가 후작을 비웃으며 실소를 흘렸다.

    “너, 너희들 뭐해!! 당장 이 자식 안 떼어놔?!?!”

    후작이 멍하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호위 기사 두 명을 향해 악에 받쳐 소리쳤다.

    갑작스러운 르나르 등장에 당황해 굳어있던 기사들이 이내 르나르에게 달려들었다.

    “거기 빨간 머리. 눈 감으려면 감고.”

    르나르가 심상히 캐스티나에게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캐스티나가 눈을 감았다.

    갑옷끼리 부딪치는 소리와 고통에 찬 신음 등이 귓가를 울렸다.

    더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아 캐스티나가 눈을 떴다.

    호위 기사 두 명은 둘 다 기절한 상태였고 후작 또한 얼굴이 엉망이 된 채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었다.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새 일어난 일이었다.

    먼지 묻은 손을 털던 르나르가 캐스티나를 봤다.

    “빨간 머리. 지금부터 내가 제안 하나를 할 거야.”

    “…….”

    “그 제안에 동의하면, 나를 따라와도 좋아. 저런 놈을 따라가 사는 것보단 훨씬 잘 살 수 있게 해주지.”

    “그 제안이…, 뭔데요…?”

    르나르는 캐스티나에게 설명했다.

    듣고 한참을 고민하던 캐스티나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 제안 받아들일게요.”

    르나르가 그녀의 대답이 만족스럽다는 듯 씩 웃었다.

    캐스티나는 다시 숨이 멎었다.

    황녀였을 때 결혼을 꿈꿨던 상상 속 왕자님이 꼭 이런 모습이었던 것 같았다.

    “뭐해? 가자.”

    르나르가 멍한 표정의 캐스티나를 재촉했다.

    그를 따르려던 캐스티나가 멈칫하며 바닥에 쓰러진 후작을 내려다봤다.

    “값을 지급하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그래도 어쨌든 저 남자가 저를 산 건데….”

    “값은 무슨 값이야.”

    르나르가 캐스티나를 보며 조금 어이없다는 듯 실소했다.

    “노예 매매 자체가 불법인데. 값을 치르는 게 그렇게 중요한 거면 이건 그쪽이 가지든가.”

    르나르가 들고 있던 자루를 캐스티나 쪽으로 던졌다.

    “우리 계약을 증명하는 계약금.”

    캐스티나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자루 안을 봤다.

    자루 안엔 후작이 상인에게 지불한 1만 5천 골드가 있었다.

    “빼앗은 거예요? 처음부터 값을 지급할 생각이 없었던 거예요?”

    “돈은 있는데, 저런 놈들한테 주긴 싫어.”

    “그렇지만…. 이렇게 돈을 빼앗는 건 불법 아니에요?”

    “범죄자들 돈을 뺏는 것도 불법인가? 난 상관없어. 그래도 불법이면….”

    “…….”

    “내 여왕님한텐 말하지 마. 머리가 잘 굴러가서 가끔 계략은 써도 의외로 도덕적 기준이 높은 여자니까.”

    갑자기 나온 여왕이란 단어에 캐스티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왕님?’

    르나르가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상념에서 깨어난 캐스티나가 서둘러 르나르 뒤를 따랐다.

    캐스티나는 좋았다.

    범죄자들의 돈을 양심의 가책 없이 빼앗는 융통성 있는 르나르도.

    왈츠 선율 같은 목소리도.

    왕자님 같은 얼굴이 제일.

    “가, 같이 가요…!”

    그녀를 배려해주지 않는 빠른 걸음을 캐스티나가 잰걸음으로 쫓았다.

    * * *

    “케이시, 머리 색이 참 예뻐요. 이렇게 새빨간 머리칼은 처음 봐요.”

    캐스티나의 목욕을 돕던 안나가 캐스티나의 머리칼에 향유를 부으며 말했다.

    케이시는 캐스티나가 르나르와 안나에게 자신을 소개한 이름이었다.

    그녀의 정체를 당연히 모를 것으로 생각해.

    그 이름을 들은 르나르는 잠시 눈을 조금 크게 떴으나 그 외 특별한 반응은 없었다.

    캐스티나는 기대하고 있었다.

    훗날 그 남자가 그녀의 과거를 알게 될 순간을.

    ‘황녀였던 걸 알게 되면 반응이 어떨까?’

    좋아하게 되지 않을까?

    여자들이 왕자님을 좋아하는 것처럼,

    남자들은 공주님을 좋아하니까.

    조금 부끄러워진 캐스티나가 턱과 입술까지를 물속에 담갔다.

    안나는 향유를 부은 캐스티나의 머리칼을 이제 정성스레 문질러주고 있었다.

    캐스티나가 그런 안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했다.

    “양귀비 같다고들 하더라고요, 제 머리칼. 저는 잘 모르겠던데…. 양귀비 알죠? 장미보다 아름다운. 전 정말 잘 모르겠는데, 사람들이 그런 말을 자주 했어요.”

    갑작스러운 캐스티나의 말에 향유를 문지르던 안나의 손이 느려졌다.

    안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상하게 기분이 세 했다.

    어색한 미소를 지은 안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듣고 보니 정말 그렇네요! 양귀비 같아요! 전 장미가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안나가 캐스티나에게 친절한 건 그녀가 엘로즈의 손님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안나는, 사실 처음부터 캐스티나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를 감겨줘야 하는 것도 이상했다.

    ‘왜 내가 이 여자 목욕 시중까지 들어야 하는 거지…?’

    안나가 생각했다.

    안나는 평소 엘로즈의 목욕 시중도 들지 않았다.

    엘로즈가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캐스티나는 오늘 처음 만난 안나에게 너무도 자연스럽게 목욕 시중을 요구했다.

    안나는 그저 가벼운 도움을 제공하러 온 것뿐이었는데도.

    캐스티나의 요구로 그녀를 씻기면서도 안나는 영 혼란스러웠다.

    반면 캐스티나는 무척 기분이 좋았다.

    오랜만에 다시 황녀가 된 기분이었다.

    그 르나르란 남자와 함께 있으면 앞으로도 이렇게 공주처럼 살 수 있는 걸까?

    르나르의 지위도 다른 아무것도 몰랐지만 캐스티나는 르나르에게 기대고 싶어졌다.

    비록 그레이시아나 제국의 올렌도 황자를 꼬시는 것이 앞으로 그녀가 하게 될 일이었지만.

    그때, 목욕 시중이 서툰 안나가 실수로 캐스티나의 머리칼을 잡아당겼다.

    “아…!”

    캐스티나의 입술 새로 신경질적인 신음이 흘렀다.

    도끼눈이 된 캐스티나가 짜증을 숨기지 않고 안나를 노려보자 그 사나운 눈빛에 당황한 안나가 살짝 몸을 떨었다.

    흔들리는 안나의 눈동자에 감정이 조금 고양된 캐스티나가 자비를 베푼다는 듯 안나에게 말했다.

    “그쪽은 정말……. 휴……. 더 배워야겠네요.”

    안나가 무언가 쏟아내고 싶은 듯 입을 열었으나 꾹 참고 다시 입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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