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비
다시 돌아온 여관.
“아직 여기 있었어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욕실에서 씻고 나왔는데 내가 혼자 머물기로 한 객실에 여전히 르나르가 있었다.
객실 구석에 놓인 와인장을 뒤적이던 르나르가 날 보더니 씩 웃었다.
“대공녀님이 걱정돼서요. 오늘 평소와 좀 다르신 것 같아서.”
캐스티나를 신경 쓰는 내 모습이 르나르에게도 티가 난 모양이었다.
그때, 날 보는 르나르 눈이 가늘어졌다.
“…왜 그렇게 봐요?”
“젖으셨네요.”
“아.”
“이리 오세요. 말려드릴게요.”
르나르가 내 손목을 잡아끌더니 침대 위에 앉혔다. 그러곤 내가 들고 있던 마른 수건으로 조심스럽게 내 머리칼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사위가 고요했다.
르나르의 불규칙한 숨소리가 조금 크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때, 창밖에서 형형색색의 불꽃이 터져 올랐다.
펑- 펑펑-
“우…, 우와아아….”
현실 세계에서도 본 적 없는 화려한 불꽃의 향연이었다.
“다들 불꽃놀이를 기대하던 모양이더니 이제 시작됐나 보네요.”
“아름다워요….”
“…동의합니다.”
고개를 돌렸다.
날 보고 있는 르나르가 보였다.
“…르나르?”
르나르가 예고 없이 날 안아 왔다.
“…대공녀님. 여쭤보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요.”
“뭔데요?”
“저 오늘… 여기서 자고 가면 안 됩니까?”
“…….”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아서요.”
“…….”
“젠장. 거짓말이 나왔네요. 저도 모르게.”
“…….”
“그냥 같이 있고 싶어서요. 대공녀님과.”
“…….”
르나르가 날 안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내게 그런 말을 하는 르나르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내 가슴을 통해 뛰는 그의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거짓말을… 하지 않았네요?”
“…….”
“너무 아무렇지 않게 또 거짓말해서 조금 놀라긴 했지만.”
“…….”
“그래도 이렇게 빨리 내게 솔직해질 줄도 몰랐어요.”
“…….”
“저는 르나르가 자랑스러워요. 오늘 자고 갈래요? 여기서?”
르나르의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여전히 날 안은 르나르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앉아 있던 침대에서 몸을 눕혔다.
내 몸도 자연스레 그를 따라 침대 위로 눕게 됐다.
날 안은 르나르의 팔 힘이 강해졌다.
부서질 것 같아 살짝 눈살을 찌푸리는데 얇은 잠옷 옷감 위로 느껴지는 그의 살결이 뜨거웠다.
그때, 르나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씻고 오겠습니다. 아무튼…, 그러겠습니다.”
말릴 새도 없이 그가 욕실 안으로 사라졌다.
* * *
쏴아아아-
소리를 들은 르나르가 욕실 위쪽에 난 작은 창을 봤다.
밖에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촤아아악-
르나르가 욕조 밖으로 나오자 욕조에서 물이 넘쳤다.
르나르의 새까만 흑발을 적신 물줄기들은 그의 단단한 근육으로 뒤덮인 몸을 타고 흐른 뒤 흔적도 없이 욕실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하……, 하아…….”
거친 숨을 내뱉던 르나르가 고개를 들어 거울을 봤다.
그의 몸은 깨끗했다.
검투장 시절 그의 또 다른 옷감이 되어버렸던 시뻘건 핏물은 이제 더는 없었다.
그럼에도 르나르는 세게 몸을 문질러 닦았다. 자신의 몸에서 더러운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몸에 새빨간 손자국들이 남기 시작했을 때 르나르는 불현듯 깨달을 수 있었다.
사라지고 있던 것은 그의 손가락 위 흉터들뿐만이 아니었다.
마력이 깨어나기 전 그의 몸을 가르고 자리 잡은 검투장 시절 흉터들도 사라지고 있었다.
엘로즈는 그에게 그런 존재였다.
상처를 잊게 하는 존재.
그에게 그녀는 구원이었고 그의 전부였다.
한참 동안의 목욕을 마치고 나온 르나르가 다시 객실 안으로 들어섰다.
닫지 않은 창문 틈으로 비에 젖은 푸른 흙 내음이 섞여 들었다.
그리고 르나르는 허탈하게 웃게 됐다.
“설마… 하긴 했지만….”
르나르가 잠든 엘로즈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채 마르지 않은 머리로 침대보를 적시며 고이 잠들어 있었다.
르나르는 마른 수건을 가져다 그녀의 머리 아래 깔아줬다.
그러곤 보송보송한 새 이불을 찾아다 그녀 위에 덮어줬다.
잠든 그녀가 기분이 좋아진 듯 배시시 웃었다.
“…너무 무방비한 거 아니야?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똑-
똑-
르나르의 젖은 머리끝에서 떨어진 물방울들이 객실 나무 바닥에 얼룩을 만들었다.
르나르는 잠시 고민했다.
욕심껏 취해 버려?
그러다 실소하며 고개를 저었다.
‘됐다…. 짐승도 아니고.’
그때, 엘로즈가 르나르를 불렀다.
“르나…르….”
“대공녀님? 잠드신 거 아니셨습니까?”
나쁜 짓을 하지 않길 잘했다고 문득 생각하며, 르나르가 흠칫 몸을 떨었다.
“좋아… 해요….”
“…대공녀님…?”
“그러… 니까….”
“…….”
“나….”
“…….”
“버리지 마….”
작은 눈물방울이 그녀의 눈 끝에서 보석 구르듯 흘러내렸다.
르나르가 홀린 듯 허리를 숙여 그녀의 눈물방울을 핥아 올렸다.
그녀의 눈물 자국을 따라 움직인 르나르의 입술은 그녀의 눈꼬리에 닿자 방향을 틀어 입술을 머금었다.
마음을 간질이는 베이비파우더 향이 르나르의 심장을 마비시켰다.
그가 캐스티나를 만나게 될 것을 엘로즈가 걱정하고 있다는 걸 눈치는 채고 있었다.
늘 목각 인형 같던 그녀가 질투라도 하나 싶어 르나르는 조금 기뻤었다.
그런데 그녀가 좋아한다고 한다.
르나르를.
“…꿈은 아니겠지?”
엘로즈에게서 입술을 뗀 르나르가 작게 중얼거렸다.
코앞에 그녀가 있었다.
여전히 르나르를 설레게 하는 아기 냄새와 그에 섞여 들어오는 비 냄새를 맡고 있으려니 꿈은 아닌 게 분명한 것 같았다.
르나르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묘한 표정을 지었다.
르나르는 엘로즈의 머리 아래 손을 넣어 잠든 엘로즈를 조심스럽게 안았다.
오늘은 그 이상의 다른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품 안의 그녀가 바스락거렸다.
르나르가 약한 새를 안고 있던 것처럼 놀라 그녀에게서 손을 뗐다.
세게 닿으면 망가질까.
잘못 안으면 부서질까.
“당신은 좋아하고…, 난 사랑해….”
르나르가 잠든 엘로즈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르나르가 다시 엘로즈의 몸에 손을 올릴 수 있기까지는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더 걸렸다.
* * *
“으음….”
아침 햇살이 눈꺼풀 틈을 파고들었다.
몸이 가벼웠다.
‘르나르….’
나는 그가 나를 안고 잤구나, 하는 생각을 저절로 할 수 있었다.
코끝에 걸쳐오는 향기가 달았다.
르나르의 몸이 풍기는 달고 시원한 향.
그 달콤함에 어쩐지 심장이 간지러워져 고개를 드는데 날 안은 르나르가 여전히 눈을 감은 상태로 말했다.
“발소리가 들립니다.”
“발소리요? 혹시 에반인가요?”
문득 떠오른 것이 에반의 얼굴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
에반에게 거짓말했네?
‘바로 잔다고 그랬었는데.’
“에반 대공자님은 아닙니다. 에반 대공자님보다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르나르가 눈을 떴다.
그리고 발소리에 조금 더 귀를 기울였다.
“대공녀님, 하녀네요.”
그리고 조금 뒤, 객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안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아가씨, 일어나 보세요!! 지금 큰일 났어요!!”
안나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큰일?’
“아가씨, 에반 도련님께서…!”
놀란 나와 르나르의 시선이 가까운 거리에서 맞부딪혔다.
“괜찮아, 에반? 이게 다 무슨 일이야…!”
그의 방 침대에 누운 에반은 물수건을 이마에 올린 채 밭은 숨을 쌕쌕 내뱉고 있었다.
열로 달뜬 얼굴이 딱 봐도 아픈 사람이었다.
“나, 난 괜찮아, 로즈. 헤헤. 이 정도는 끄떡없어. 저, 저리 가…! 감기 옮아.”
에반이 그에게 다가서려는 날 허공에 손을 저으며 막았다.
내가 곁에 있던 르나르에게 속삭였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내가 우리보다 앞서 에반을 돌보던 더글라스에게 물었다.
더글라스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에반 대공자님께서 저희 황자님을 걱정하셔서 밤새 찾아다니셨는데 밤 동안 비가 내려서….”
“에반이… 르나르를…?”
의외의 이야기를 들은 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옆을 보니 르나르도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 얼굴이 붉어진 에반이 더글라스를 노려보며 끼어들었다.
“거, 걱정한 거 아니라고…! 그저 혹시라도 길을 잃은 거면… 비웃어주고 싶었을 뿐이야…!.”
내가 그런 에반을 내려다봤다.
똑똑한 척 굴지만 순진했고, 다른 오빠들처럼 날카로운 척 연기하지만 사실 잔정만 많은 에반이었다.
나에 이어 르나르를 감시하러 갔다 그가 사라진 것을 보고 걱정한 모양이었다.
‘르나르가 나와 있는 줄도 모르고….’
“그… 에반. 나한테 먼저 와 보지 그랬어. 밖을 먼저 찾지 말고….”
양심에 찔린 내가 작은 목소리로 에반에게 말했다.
그런데 에반은 내가 왜 그런 말을 한 건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네 잠을 깨우고 싶지 않았거든. 둘째 황자를 찾는데, 네 도움까지 굳이 필요 없을 거로 생각하기도 했고.”
“에반, 사실은….”
양심이 더욱 아파진 내가 진실을 털어놓으려는데, 르나르가 그런 날 막아섰다.
그러곤 한껏 격양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절 걱정해 직접 찾아 나서 주신 겁니까? 정말 영광입니다.”
르나르가 에반의 손을 잡았다.
에반이 경악하며 그에게 잡힌 손을 뺐다.
“거, 걱정한 게 아니라니까?! 찾는 건 기사들이 했고! 난 그저 보고만 있었어!! 그러다 비가 내려버렸을 뿐이고!!”
“기사들 말로는 제일 열심히 찾으셨다는데….”
더글라스가 짤막하게 덧붙인 말에 에반이 도끼눈이 되어 더글라스를 노려봤다.
더글라스가 움찔하는데 르나르도 그런 에반을 따라 더글라스를 노려보며 더글라스에게 날을 세웠다.
“넌 밤새 어디 있어서 귀한 대공자님께서 날 찾아 밖에 나가셨던 것도 몰랐던 거지?! 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씀드렸어야지!”
르나르가 에반의 머리를 그의 품에 넣었다.
사색이 된 에반이 버둥댔다.
하지만 힘으론 안 되는 건지 이내 지쳐 축 늘어져 버렸다.
“네…? 아… 그, 그게….”
더글라스가 평소처럼 능글거리지 못하고 당황한 채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그러자 갑자기 안나가 끼어들었다.
“지, 집사님께선 어제 일찍 잠드셨어요. 그, 그렇죠, 집사님?!”
‘……?’
내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안나. 네가 그걸 아는 것도 이상한데…?’
이것들 봐라?
“더글라스는 내 허락 없인 절대 잠들지 않아. 그렇지, 더글라스?”
르나르가 더글라스를 보며 말도 안 되는 걸 물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황자님께서 뭔데 집사님한테!”
“그러는 넌? 넌 더글라스한테 뭔데?”
“저, 저요?! 저, 전…!”
불쌍한 에반.
나는 그 순간 생각하게 됐다.
안 그래도 르나르의 품에 갇혀 안쓰러웠던 에반이 더욱 안쓰러워졌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 때문에 피 봤구나….’
콜록- 콜록콜록-
에반이 피를 토할 것처럼 기침하기 시작했다.
놀란 내가 에반의 이마 위에 손을 올렸다.
“세상에, 이 열 좀 봐.”
에반의 이마가 열로 펄펄 끓고 있었다.
“르나르, 전 아무래도 여기서 에반을 간호해 줘야 할 것 같아요. 르나르가 기사들을 데리고 시장에 가서….”
“아, 아냐, 로즈. 난 괜찮….”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르나르 내게 말했다.
“대공녀님께선 아무 걱정 마세요.”
날 안심시킨 르나르가 객실 밖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