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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60화 (60/100)
  • 60화

    감시

    「로즈를 감시해.」

    에반이 저택에서 미르엣이 그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로즈를 감시? 우리 동생 로즈? 로즈를 대체 왜?」

    영문을 알 수 없던 에반은 고개만 갸웃거렸다.

    「감시하라면 감시해. 로즈가 이미 그 녀석한테 넘어간 것일 수도 있으니.」

    「누구? 설마 둘째 황자한테? 에이, 미르엣. 걱정도 팔자다. 걱정 안 해도 돼, 둘째 황자 그 녀석은 남색가이거든. 아무리 녀석이 잘생겼다고 로즈가 남색가를 좋아할까 봐? 로즈가 녀석을 어떻게 하기라도 할 것 같아? 감히 우리 로즈를 뭐로 보고!」

    「……뭐? 하, 됐고. 해가 지면 특히 잘 지켜봐야 해. 우리에겐 로즈를 지켜야 할 책임이 있어. 우리 가문의 장미잖아. 신경 써. 내가 겔리온과 레오한테 가야 해서 너한테 부탁하는 거니까.」

    ‘미르엣도 참. 쓸데없는 걱정이 많다니까?’

    에반이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에반이 생각하기에 둘째 황자 녀석은 꽤 괜찮은 녀석이었다.

    남색가이면서도 그가 로즈의 안정제이자 강화제이기 때문에 로즈에게 꼭 붙어있는 걸 보면.

    ‘의외로 착하단 말이지. 독나비 숲을 생각하면 항상 착한 건지 다소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지금 몸 상태는 어때? 둘째 황자가 필요한 건 아니지?”

    “응. 괜찮은 것 같아. 에반, 그럼 더 볼일은 없는 거지?”

    “응?”

    “나 씻고 바로 자려고 해서.”

    “아, 응! 알겠어. 나, 그럼 이제 나가볼게?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불러, 알겠지?”

    “응! 고마워, 에반.”

    에반이 방에서 나갔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엘로즈가 침대 위로 무너지듯 쓰러져 누웠다.

    그녀가 낮은 한숨을 흘렸다.

    “휴… 감시하러 왔다 이 말이지?”

    다 큰 동생을 감시하는 에반이 어이가 없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 그녀가 웃었다.

    자연이 아름다운 플루토나 제국의 선선한 공기가 그녀의 허파 안으로 스며들었다.

    * * *

    “…에반이 현명했네.”

    침대 헤드를 보며 눈만 깜빡이던 내가 혼잣말로 말했다.

    에반은 아무래도 나와 르나르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 것을 걱정해 날 감시하러 온 것 같았는데, 그 무슨 일을 할 작정은 아니었지만 내 몸이 르나르 몸을 원하고 있었으니.

    이미 누워 있는데도 몸이 찌뿌둥했다.

    어제오늘 르나르와 내내 붙어 있었더니 그가 곁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서로에게 안정제 겸 강화제란 말은 역시 진실인 것 같았다.

    “…부르고 싶네, 르나르. 내 옆으로. 에너지드링크보다 효과가 더 좋은 듯한데.”

    아쉬운 마음을 이불의 포근함으로 달래던 내 눈꺼풀이 어느새 무거워졌다.

    그러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얼마나 잠들어 있었을까?

    “어이, 거기! 맥주를 더 가져와 봐!”

    “불꽃놀이는 언제 시작한대?”

    “캬아, 오늘 날씨 정말 좋다! 날마다 오늘만 같았으면!”

    먼 곳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노랫가락처럼 들려왔다.

    의식이 말갛게 개어왔다.

    ‘…왜 이렇게 시끄럽지?’

    잠시 생각하던 내가 이내 몸을 일으켰다.

    ‘깜빡 잠들었네. 일단 씻고 와야겠다.’

    그때, 창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똑똑-

    이 방은 2층인데.

    똑똑-

    “대공녀님?”

    “르나르?”

    창문을 열었다.

    활짝 열린 창문 너머엔 나를 보며 활짝 미소 짓는 르나르가 있었다.

    “대공녀님!”

    “르나르! 왜 나무 위에 앉아 있어요, 새도 아니고!”

    “대공녀님의 귀여운 까마귀가 되고 싶습니다. 키워주실래요?”

    객실 창과 가까운 가지 위 르나르가 손을 뻗어 내 머리칼을 가져간 뒤 입을 맞추며 웃었다.

    그가 가까운 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내 마력이 신나 널뛰기 시작했다.

    “그러다 떨어져도 난 몰라요.”

    “대공녀님과 같이 떨어져 볼까 하는데. 지금 아래 축제가 벌어졌거든요.”

    르나르의 적갈색 눈동자가 샛노란 달빛을 받아 반짝 빛났다.

    * * *

    “플루토나 제국의 축제들은 볼거리 위주예요. 저런 가면과 의상들, 특이하죠?”

    르나르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확실히 차림새가 독특했다.

    “각 가문의 문장(紋章)을 형상화한 옷이에요. 대공녀님 같은 경우엔 여기서 저런 옷을 입으시려면….”

    “전 장미로 꾸며진 옷을 입고 방패를 들어야겠네요.”

    방패 위에 피어난 장미.

    그것은 코웰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이었다.

    내 이름이 엘로즈인 것 또한 그 문장과 관련 있었다.

    그녀는 장미라는 뜻의 엘로즈.

    「로즈야, 네 이름이 왜 로즈인지 알아? 로즈는 장미고 장미는 우리 가문이 지켜야 하는 것이니까. 네가 우리 가문의 장미야. 우리가 평생 널 지켜줄게.」

    오빠들은 어렸을 때 종종 그런 이야길 하곤 했다.

    추억을 떠올리며 웃는 나를 르나르가 따라 웃었다.

    “대공녀님께선 의상이 따로 필요 없으시겠네요. 대공녀님 자체가 장미이시니.”

    “역시 그럴까요?”

    “인정하신 겁니까?”

    “제 이름이 로즈니까요.”

    “음… 이름도 이름이지만, 전 대공녀님께서 장미처럼 아름답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데요.”

    르나르가 지구는 둥글다고 말하듯 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끄러움을 느낀 내 얼굴이 살짝 뜨거워졌다.

    그때, 바보 같은 질문이 불쑥 튀어 올랐다.

    “혹시… 캐스티나를 만나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될까요? 장미처럼 아름답단 생각?”

    내 말에 르나르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의아한 표정이 된 그가 내게 되물었다.

    “왜…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르나르 앞에서 캐스티나 이름을 말하는 내 심장은 지나치게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냥요. 소문 속 캐스티나가 무척 아름답다고 하니까. 특히 장미처럼 붉은 적발이…, 어머…!”

    말하던 내 몸이 휘청였다.

    거대한 코스튬을 입은 행인이 곁을 지나며 날 밀쳤기 때문이었다.

    르나르가 중심을 잃은 날 붙잡았다. 그러곤 그의 품 안으로 당겨 올렸다.

    가까운 곳에서 달고 시원한 향이 어른거렸다.

    난 울 것 같은 심정이 됐다.

    “대답….”

    “…….”

    “해줘요….”

    “…….”

    “캐스티나를 보고 예쁘다고 생각할 건지.”

    사실 대공과 오빠들은 캐스티나를 데리고 오는 여정에 르나르만 보내길 원했다.

    하지만 내가 굳이 그와 함께 온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르나르를 캐스티나와만 둘 수가 없어서.

    내가 좋아하는 그를 다른 여자와 그것도 원작에서 그가 좋아했던 여자와만 둘 수가 없어서.

    이런 내가 유치하고 졸렬하게 느껴졌음에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런 생각.”

    “…….”

    “안 할 겁니다. 대공녀님을 두고 다른 여자가 예쁘다고 하는 생각.”

    “…….”

    “절대.”

    곁을 스치고 지나가는 축제 분위기를 묻힌 가을바람이 선선했다.

    날 안은 르나르 품은 따듯했다.

    “거짓말… 아닌 거죠…?”

    “……?”

    “르나르는 가끔 내게 거짓말을 하니까….”

    르나르의 입꼬리가 삐딱하게 휘어졌다.

    눈을 가늘게 뜬 그가 품 안의 내게 말했다.

    “아직도 절 그렇게 못 믿으시는 겁니까? 제가 대공녀님께 이렇게나 헌신적인데?”

    “…….”

    “사실 작은 거짓말들은 좀 하긴 합니다만, 큰 걸로 속이진 않잖아요. 속이는 걸로 따지면 대공녀님께서 더 하시면서. 대공녀님께선 올렌도 저택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셔놓고 절 속이고 돌아가기도 하셨잖아요?”

    “…그건…….”

    “하지만 그럼에도 대공녀님께서 원하신다면 다시는 대공녀님께 거짓말하지 않겠습니다. 진심입니다. 원하신다면 마법사의 맹세도 해드릴게요.”

    날 보는 르나르 눈빛이 진지했다.

    그리고 날 똑바로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아름다운 루비 같았다.

    그 눈동자에 홀린 나는 뛰던 심장이 차분히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그 심장이 초조함 대신 기쁨으로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이후 르나르와 즐긴 축제는 재밌었다.

    인심 좋은 플루토나 제국 사람들은 길에서 수프, 쿠키 등의 먹을 것을 나눠줬고, 르나르는 그들이 건넨 것을 먼저 먹어본 뒤 내게 전해줬다.

    “아, 하세요.”

    꼭 먹여주려 하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이기도 했지만.

    그런데 투명한 컵에 담긴 금빛 섞인 보라색 액체를 받아 맛본 르나르가 내게서 컵을 멀리 치웠다.

    그가 컵을 기울여 액체를 바닥에 부으려 하길래 액체의 예쁜 색에 홀려 있던 내가 나도 모르게 그의 팔에 매달렸다.

    “…뭐, 뭔데 그래요, 르나르. 그게 뭔데요.”

    “술입니다.”

    …술?

    이쪽 세상에선 성인이 된 후에도 한 번도 마셔본 적 없던 것이었다.

    현실 세계 생각이 나, 맛이라도 한 번 봤음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금빛이 섞인 보라색.

    과연 어떤 맛일까?

    “저 그거 마셔볼래요.”

    “안 됩니다.”

    “저도 성인인데 왜 못 마시게 하는 거죠? 내가 르나르보다 생일도 빠를 텐데?”

    “글쎄요. 대공자님들께서 대공녀님께 술을 주지 않으시는 이유와 같지 않을까요?”

    “…오빠들이 제게 술을 주지 않는 건 어떻게 알았죠?”

    “안 봐도 그럴 것 같아서요.”

    “전 지금 마시고 싶어요.”

    “위험합니다, 취하시면. 특히 대공녀님처럼 작은 여자는요.”

    르나르가 내 머리를 누르며 말하길래 자존심이 상한 내가 그런 르나르를 한껏 노려봤다.

    눈빛이 흐려진 르나르가 작게 웃더니 말을 이었다.

    “작다고 무시한 건 아니고요. 그렇게 아담하시니 주머니 속에 넣고 싶고 탐도 나는걸요. 하지만 위험한 것도 맞아요. 주머니 속에 넣고 싶다는 건 그만큼 들고 도망치기 쉬워 보인단 거잖아요. 저뿐 아니라 남들에게도.”

    르나르가 이상한 소리를 했다.

    내가 그런 르나르에게 물었다.

    “나는… 르나르가 지켜주고 있던 게 아니었나요…?”

    “…….”

    나는 당신의 마법약이니.

    하지만 그 얘긴 덧붙이지 않고 속으로만 삼키기로 했다.

    굳이 그런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지 않을 만큼 이 밤은 내게 특별했고 달콤했으니.

    르나르가 들고 있던 컵을 결국 내게 내밀었다.

    “절 다루는 법을 점점 잘 알아가시는 것 같습니다.”

    반쯤 진심인 듯한 르나르 말에 내가 가볍게 웃어줬다.

    금빛이 섞인 보라색 술은 어설프게 상상해 본 것과 전혀 다르게 달콤한 맛이었다.

    현실 세계 달고나 같은 맛.

    그것이 신기해 난 한 잔을 쭉 들이켰다.

    맛과 상관없이 독한 건지 얼굴에 금방 열이 오르는 느낌이 났다.

    그래도 취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아 작게 웃는데, 르나르가 아까보다 흐려진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왜요?”

    “빨개지셨잖아요. 우셨을 때처럼.”

    “원래 술 마시면 붉어질 수도 있고 그런 거죠.”

    “하, 정말…… 무책임하시긴…….”

    긴 숨을 뱉은 르나르가 별안간 내 입술에 달려들었다.

    놀란 내 몸이 뒤로 기울었다. 그가 내 허리를 손으로 받치고 조급한 키스를 이어갔다.

    이내 그가 떨어졌을 때 그의 입술과 내 입술 사이엔 길고 얇은 은색 실이 가늘게 빛나고 있었다.

    “가, 갑자기 왜….”

    “도와주기로 하셨잖아요. 제가 필요할 때면.”

    르나르가 날 노려보며 쏘아붙이듯 말했다.

    그의 숨소리가 단정치 못했다.

    그때, 우리가 있던 골목으로 나무 도깨비 분장을 한 인파가 들어섰다.

    퍼레이드 행렬에 휩쓸려 나는 르나르와 순식간에 멀어졌다.

    “대공녀님? 대공녀님…!”

    “르나르!!”

    르나르가 보이지 않았다.

    눈앞이 아찔해졌다.

    이것이 르나르와 내 미래의 모습은 아닌 걸까?

    ‘캐스티나를 찾기로 한 건… 내 판단 실수였을까…?’

    그때, 강한 힘이 내 허리를 낚아챘다.

    속절없이 흔들린 내 시야에 가득 담긴 건 르나르.

    “대공녀님? 왜…….”

    “…….”

    “왜 그런 얼굴이신 거예요. 얼굴이 파랗게 질리셨잖아요.”

    “르나르…….”

    “아무래도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지금 바로.”

    그가 날 안아 들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오롯이 나의 것인 그의 품이 날 안심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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