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뒤통수
“처음부터 뒤통수를 칠 생각이셨군요.”
르나르가 여전히 찡그린 채로 슬쩍 웃었다.
내가 살짝 시선을 돌렸다.
“뒤통수를 칠 생각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닌데 그렇다고 꼭 그럴 생각만 있었던 것도 아니에요. 난 정말 올렌도가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사람을 찾아줄 생각이니까.”
“…진심이십니까?”
진심이었다.
여주인공 캐스티나가 노예 시장에 있단 정보는 아무래도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으니까.
원작에 가지고 있는 마지막 애정 때문이었을까?
플루토나 제국을 망가뜨린 장본인이 터넛인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터넛은 르나르의 친부였고 나는 르나르가 캐스티나에게 부채감을 갖는 건 원하지 않았으니.
하지만 르나르는 그런 내 결정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꼭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을까요? 그냥 적당히 시간만 끌어도 될 것 같은데….”
“플루토나 제국에 가서 캐스티나 황녀를 데려올 생각이에요. 그곳 노예 시장에 캐스티나 황녀가 있단 정보를 입수했거든요.”
“캐스티나 황녀요…?”
그동안 르나르와 내 사이에 전혀 언급된 적 없던 새로운 이름에 르나르가 비뚜름히 눈썹 한쪽을 올렸다.
난 잠잠히 르나르를 바라봤다.
하지만 르나르 입술이 뱉는 캐스티나 이름에 내 심장은 점차 빠르게 뛰고 있었다.
“캐스티나 플루토나 말씀이신 겁니까? 그 황녀는 갑자기 왜….”
“그녀가 무척 아름답단 소문을 들었거든요.”
내 설명에 르나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제가 그 황녀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외모로만 따지 분명 대공녀님께서 더….”
“그 황녀를 데려와야 해요. 찾아서 데려오면, 올렌도 황자가 분명 공주에게 반하게 될 거예요. 나… 믿어줄 수 있겠어요, 르나르…?”
더 파고들면 불리해질 것임을 본능적으로 느낀 내가 르나르 말을 잘랐다.
그러곤 맹목적인 믿음을 요구했다.
막상 나는 남에게 주지 못하는 것인데.
“……다른 사람도 아닌 대공녀님께서 그렇게 물으시면….”
“르나르….”
“하…….”
내가 고민하는 르나르 손을 잡았다.
이마를 짚던 그의 시선이 나에게로 옮겨왔다.
르나르의 적갈색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누구라도 찾긴 찾아야 하는 시간이에요. 아무 짓도 하지 않으면 올렌도가 내기 자체를 의심할 수 있으니.”
“…….”
“그리고 저희는 아무나 데려가는 대신 황녀를 데려가는 것일 뿐이에요. 반역 준비는 아버지와 오빠들이 대부분 맡고 있으니 우리는 걱정할 것 없고, 오히려 우리는, 올렌도의 시선을 우리 쪽에 묶어놓는 데 집중하는 게 나아요.”
“…….”
“내 말에 동의해 줄 수 있겠어요, 르나르?”
르나르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그래서 플루토나 제국까지 그 황녀를 찾으러 다녀오겠다고?”
“네, 아빠.”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시간을 끄는 게 목적이라면 적당히 아무나 고용하는 게 더 효과적일 것 같은데?”
겔리온이 르나르가 내게 한 말과 비슷한 말을 했다.
이에 난 내가 르나르를 설득한 말과 비슷한 말들을 가족들에게 전했다.
가족들은 그럼에도 날 쉽게 보내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즈. 넌 아직 몸이 안 좋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멀리까지 가려고!”
에반이었다.
“한 번 기절했을 뿐이야, 에반. 그 정도로 몸이 안 좋다고 말하진 않아.”
“기절할 정도면 몸이 안 좋은 게 맞아.”
미르엣이 끼어들었다.
“플루토나 제국 그 먼 곳까지 갔다가 다시 기절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포털을 이용하면 편도 반나절이야. 그 정도면 전혀 먼 거리가 아닌걸?”
그러자 겔리온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포털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설마 이젠 이용 불가능해진 예전 포털을 말하는 거야?”
“예전 포털?”
미처 몰랐던 정보에 내 시선이 르나르를 향했다.
“하지만 르나르는 바로 얼마 전에도 그 포털을 이용해 반나절 만에 플루토나 제국에….”
나와 눈이 마주친 르나르가 어색하게 웃었다.
오빠들과 대공의 시선도 내 시선을 따라 르나르에게로 향했다.
르나르가 애써 눈동자를 굴리며 쏟아진 시선들을 외면하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저는… 포털이 이용 가능합니다.”
* * *
나와 르나르, 에반, 안나, 더글라스 그리고 코웰 가문 기사들과 주치의가 독나비 숲 앞에 섰다.
독나비들이 뿜는 독 기운 때문에 일반 사람들은 접근할 수 없어진 숲이었다.
“그러니까 그 포털이… 이 독나비 숲 안에 있단 거죠?”
내가 나와 같은 말을 탄 르나르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르나르가 답했다.
“포털 주변에 독나비들이 자리 잡고부터 포털이 무용지물이 됐는데 하필 둘째 황자가 나비를 홀릴 줄 안다고? 그것참 기가 막힌 우연이네?”
에반이 르나르를 보며 미심쩍은 눈빛을 보냈다.
르나르가 무구한 눈을 하고 어깨만 가볍게 한번 으쓱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눈을 휘어 웃었다.
“설마 르나르가….”
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자 르나르가 무언갈 가늠하듯 고개를 기울이고 나를 봤다.
그러곤,
“아뇨, 아닙니다.”
이내 가볍게 답하며 웃었다.
내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독나비 떼가 포털 주변에 갑자기 자리를 잡은 게 5년 전이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5년 전이면… 플루토나 제국으로 향하던 터넛 황제의 행렬이 산적 떼의 습격을 받았던 때네요? 맞죠?”
“그렇… 습니다.”
“르나르가 어떻게 올렌도 황자의 호위 기사가 됐다고 했죠?”
“산적 떼의 습격에서… 터넛 황제를 구하고….”
“포털이 독 나비 떼에 점령당하는 바람에 황제는 먼 거리를 돌아갈 수밖에 없었겠네요. 먼 길을 가다 보면 습격엔 더 취약할 수밖에 없었겠고. 아닐까요?”
“…….”
르나르는 답하지 않았다.
굳이 그의 자백까지 받아낼 생각은 없었던 난 그 이상 르나르를 몰아붙이진 않기로 했다.
그래도 좀 꺼림칙했다.
아직도 르나르가 내게 너무 쉽게 거짓말한단 것이.
‘다시는 날 속이지 않겠다고 약속했었으면서….’
“나는 르나르가 내게 솔직해 줬으면 좋겠는데.”
“…….”
“사실 칭찬해 주려고 했거든요. 르나르가 한 일이면.”
“그게… 정말이십니까…?”
“황실은 어차피 황족과 고위 귀족들에게 밖에 이 포털을 개방하지 않았잖아요. 때문에 이 포털의 이용 권한은 제국 권력의 상징이 됐었고.
그런데 그런 포털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이젠 르나르에게만 있는 거잖아요? 확실히 의미 있는 일이에요. 반역 후 르나르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에 도움이 될 거예요.”
“…그런 쪽으로는 생각 못 해봤는데.”
“게다가 르나르가 반역 후에 포털을 제국민들 전부가 이용할 수 있도록 개방한다면 제국민들 사이에서 르나르의 호감도는 자연스럽게 오르게 될 거예요.
불가능했던 무역도 가능해지고 삶의 질 자체가 달라지겠죠. 물론 독나비 떼를 이용해 공공재인 포털을 점거해 버린 건 불법적인 행위지만… 어차피 반역도 불법인 건 마찬가지니.”
“…….”
“근데 르나르가 한 일이 아니라면 칭찬해 줄 필요 없겠네요?”
내가 묻자 에반의 시선을 피한 르나르가 내 쪽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러곤 내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사실 제가 했습니다.”
“…….”
“독나비들, 제가 부른 겁니다.”
나는 르나르의 거짓말 하는 버릇을 고쳐줘야겠단 다짐을 단단히 했다.
르나르가 걸음걸음마다 독이 있는 나비들을 날려버리고 독이 없는 나비로 다시 숲을 채웠기 때문에 포털까지 향하는 일은 수월했다.
이로써 포털 사용이 누구에게나 가능해진 것을 한동안 숨기며 대공과 오빠들이 후에 쉽게 플루토나 제국으로 향하는 일이 가능할 것이었다.
“…와아….”
책에서만 간간이 보던 포털을 실제로 보게 된 내가 감탄했다.
포털은 화려한 틀을 가진 거울 같았다.
크기는 십여 명의 사람이 한 번에 통과할 수 있을 만큼 컸는데, 가운데 거울 같은 부분은 마치 수면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햇살을 머금어 무지개를 품은 은빛으로 영롱히 빛나면서.
르나르와 내가 탄 말이 그 부분을 통과하는 순간 풍경이 바뀌었다.
독나비를 살게 했던 숲 특유의 답답하고 습기 찬 공기가 사라졌고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이 시원해졌다.
고개를 돌리자 눈이 시리도록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이는 호수가 보였다.
하늘은 새파랬고 호수 앞과 뒤로는 선명한 초록색 산과 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플루토나 제국은 아름다운 곳이었다.
“플루토나 제국입니다, 대공녀님.”
르나르가 내게 말했다.
“제 고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맑은 하늘보다 더 맑은 르나르의 적갈색 눈동자가 투명한 햇살을 반사해 반짝였다.
우리가 정보 길드에서 알려준 노예 시장에 도착했을 땐 새빨갛게 달구어진 해가 뉘엿뉘엿 능선을 넘어가는 중이었다.
시장은 이미 파한 뒤.
땅거미가 깔리나 싶더니 사위는 금세 어두워졌다.
우리는 다음 날을 기약하며 근처 여관에 자리를 잡기로 했다.
난 혼자 쓰기로 한 객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에반이 그런 내 뒤를 졸졸 따라 들어왔다.
“왜, 에반? 내 방 구경 온 거야?”
“아니, 그냥. 너 푹 쉬라고 인사나 하려고. 피곤하다고 저녁도 안 먹고 쉬겠다고 했으니까 바로… 잠들 거… 맞지…?”
에반이 내게 쭈뼛쭈뼛 물었다.
“응, 그러려고. 아까 말한 것처럼. 왜, 에반? 나한테 뭐, 할 말 있어?”
“음… 내 동생은 오늘도 참 귀엽다…?”
“…갑자기? 뭐지? 뭔가 수상한데?”
팔짱을 낀 내가 책상에 기대서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에반이 티 나게 몸을 움찔하며 꼬리를 밟힌 강아지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수, 수상하긴 뭐가! 난 절대 감시 같은 걸 하는 게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