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략남이 훅 들어왔어-58화 (58/100)
  • 58화

    아, 하세요

    눈꺼풀을 간질이는 햇살에 내가 눈을 떴다.

    무심코 손을 뻗으니 내 옆에 있어야 할 르나르가 옆자리에 없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며 내가 몸을 일으키는데, 때마침 달칵 방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열린 문틈으로 나타난 건 사라졌던 르나르였다.

    그가 끌고 온 것을 본 내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 그게 뭐예요…?”

    “어, 대공녀님? 벌써 일어나셨네요?”

    르나르가 끌고 들어온 것은 음식이 가득한 트롤리였다.

    트롤리 위엔 색이 예쁜 스튜, 고소한 냄새가 나는 갓구운 빵, 신선한 버터, 잼, 과일 등이 가득했다.

    “밤엔 재워드렸으니 아침엔 먹여드리려고요.”

    침대 옆에 트롤리를 세운 뒤 침대 끝에 걸터앉은 르나르가 싱그럽게 웃었다.

    “사용인들이 벌써 음식을 만들어두었던가요? 가족들이 늦게 일어나는 편이라 아직 준비된 게 없었을 텐데.”

    “어쩐지. 제가 요리를 끝내니 하나둘 나타나더라고요.”

    “그 말은….”

    르나르가 직접 이 음식들을 준비했단 말일까?

    “그래봤자 스튜를 끓이고 빵을 구운 것밖에 없습니다.”

    르나르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사실은 칭찬을 더 해주길 바란 건지 곁눈질로 나를 힐끔 봤다.

    “빵을 구웠을 뿐이라기엔 빵도 이렇게 종류별로… 세상에 맛도 좋아요. 르나르에게 이런 재능이 있었어요?”

    일부러 조금 흥분한 척 칭찬하자 르나르 얼굴이 숨길 수 없을 만큼 밝아졌다.

    부끄러운 듯 눈을 접어 웃는 그의 위로 코웰 저택의 하얀 대리석 벽에 반사된 아침의 햇살이 쏟아져 반짝였다.

    “대공녀님께서 드실 아침이잖아요. 정성을 다하지 않을 수가 없었죠.”

    “고마워요. 르나르가 요리도 잘하는 줄은 몰랐네요.”

    “요리도요? 제가 잘하는 게 또 있습니까?”

    “르나르가 잘하는 거야 많죠. 검도 잘 다루고. 춤도 잘 추고. 말도 잘 타고.”

    “그렇게 따지면 또 있지 않습니까?”

    “또요? 또 다른 거요?”

    “예를 들면 키스라든…, …!”

    르나르는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당황한 내가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아버렸기 때문이었다.

    눈매에 힘을 주고 그를 노려보니 르나르가 눈을 휘어 웃으며 그에게 맞닿은 내 손바닥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내 얼굴이 화륵 뜨거워지자 르나르 눈빛이 탁해졌다.

    그때, 안나가 나타나 르나르 인상이 험해졌다.

    똑똑똑-

    “대공녀님! 저 안나예요! 저 들어갈게요!”

    바로 다음 순간 방에 들어선 안나의 손엔 황갈색 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대공녀님께 날아온 마법 전서조 같아요. 날개 아래 대공녀님 성함이 적혀 있어요.”

    순간 새가 공중으로 솟구친 뒤 내 품으로 날아들었다.

    내가 새의 머리를 쓰다듬자 새는 금방 종이의 형태가 됐다.

    내가 편지를 읽었다.

    바꾼 정보 길드에서 캐스티나의 위치를 찾았다고 보낸 편지였다.

    “뭡니까? 누가 보낸 겁니까? 무슨 내용입니까?”

    르나르가 궁금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읽은 편지를 접어 르나르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치워버렸다.

    “별거 아니에요. 르나르는 신경 쓸 필요 없어요.”

    난 캐스티나의 존재를 르나르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는 르나르에게 득이 될 게 없는 사람이었니.

    사실 편지는 무시하면 됐다.

    난 이제 캐스티나가 필요 없었다.

    반역이 성공하면 올렌도가 우리 가문을 멸문시킬 수 있을 일은 없을 테니.

    하지만 편지 내용이 캐스티나가 노예 시장에서 발견됐단 것이었기에 나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여주인공이 왜 노예 시장에 있는 걸까. 내가 구해줘야 하는 걸까….’

    르나르가 조심스레 어두워진 내 표정을 살폈다.

    “…대공녀님?”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트롤리에서 먹을 것을 이것저것 챙기기 시작했다.

    이내 한 손엔 스튜 접시 다른 손엔 스푼을 든 르나르가 내 앞에 앉았다.

    “자, 아, 하세요.”

    “제가 먹을 수 있어요.”

    내가 르나르 손에서 접시와 스푼을 빼앗으려 했다.

    하지만 르나르는 너무도 쉽게 내 손을 피했다.

    “먹여드리겠다고 했잖아요. 밤엔 재워드렸으니 아침엔 먹여드리겠다고.”

    “그게 그렇게 직관적인 뜻이었다고요?”

    “빨리요, 대공녀님. 저 팔 아파요.”

    “팔도 단단하면서 맨날 팔 아프다고….”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별말 아니었어요.”

    내가 얼른 입을 열어 스푼을 물었다.

    르나르가 그런 나를 기특함 반, 아쉬움 반이 담긴 눈빛으로 바라봤다.

    “잘하셨어요. 근데 조금 더 고집부리셨어도 됐는데. 계속 고집부리시면 입으로 먹여드리려고 했는데.”

    “……!”

    “농담이에요. 그러니 저 하녀 눈치는 안 보셔도 돼요.”

    르나르가 돌아가던 내 눈동자를 눈치챈 건지 고갯짓으로 까딱 안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일부러 못 듣는 척하는 안나의 얼굴이 붉었다.

    내 얼굴도 똑같이 붉을 것이라고 나는 장담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사색이 된 안나가 내게 달려왔다.

    “아가씨, 올렌도 황자님께서…!”

    코웰 저택 응접실에 올렌도와 내가 마주 앉았다.

    응접실 창문을 통과한 따가운 가을볕이 올렌도와 내 사이를 가로질렀다.

    하필 오늘 그가 저택을 찾은 건 오늘이 대공과 오빠들, 르나르가 한꺼번에 저택을 비운 날이기 때문인 듯했다.

    ‘아직도 이 저택 어딘가에 올렌도의 첩자가 남아 있는 건지….’

    “말씀하세요.”

    “…….”

    “절 찾아오신 거잖아요.”

    내가 날을 세웠다.

    날 보는 올렌도의 표정이 잠잠했다.

    올렌도의 옷깃, 소매 사이로 그의 가슴을 감은 붕대의 흔적들이 보였다.

    “미안해.”

    “…….”

    “그날 일. 사과할게.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참 쉽네요, 황자님께선. 늘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시고 사과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시는 듯하니.”

    “…….”

    “하지만 전 황자님을 용서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만 돌아가 주세요.”

    “그것 말고도 할 말이 있는데….”

    올렌도가 종이 한 장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종이 위엔 몇 개의 날짜가 적혀 있었다.

    “골라.”

    “…이게 뭔가요?”

    “약혼식 날짜.”

    “……네?”

    기가 찼다.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리는 걸 참고 있는데 약혼식 날짜라니.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리신 거예요…? 제게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잊으신 건가요?”

    “기억해. 그래서 미안하다고 했잖아.”

    “미안하시면 파혼해 주세요.”

    “대공녀.”

    “전 제게 그런 기억을 남기신 분과 절대 약혼할 수 없습니다. 파혼해주세요. 그럼 그 사과받아드리죠.”

    “…….”

    올렌도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어젯밤 일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르나르와 네가 입을 맞춘 걸 보고 이성을 잃었어. 그렇지만 넌 나와 약혼, 아니, 결혼해야 해. 내가 그걸 원하니까.”

    “황자님.”

    “네가 날 거부하면 난 널 협박할 거야. 네가 마녀라는 사실을 제국에 알리겠다고.”

    “……!”

    내 입이 벌어졌다.

    이런 전개는 미처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올렌도에게 마녀인 걸 들킨 게 큰일이란 생각은 했지만, 그가 그걸 이런 식으로 이용할 줄은….’

    아니, 애당초 그가 나와의 결혼에 왜 이렇게 집착하는지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황자님, 황자님께선 코웰 가문을 싫어하지 않으셨었나요? 그래서 황자님 대신 르나르를 보내셨잖아요. 저와 같이 지내라고.”

    “예전엔 싫어했었지. 하지만 이젠 아니야. 아니, 사실 코웰 가문은 여전히 싫어하지만, 대공녀 넌 좋아해.”

    “착각이에요. 단순히 르나르에게서 절 빼앗고 싶어 하는 걸 절 좋아한다고 착각하시는 거라고요.”

    “그렇다고 해도 안 될 건 뭐지? 좋아해서 가지고 싶은 거나. 빼앗고 싶어 가지고 싶은 거나. 어차피 가지고 싶은 거 아냐?”

    “황자님!”

    “계속 쓸데없는 소리 지껄일 거면 부르지 마.”

    “제가 장담해요. 황자님께선 그런 소유욕 때문이 아니라 마음으로 좋아하게 되는 사람을 분명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저는 … 저는 제발 놔주세요. 전 황자님과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말하는 내 머릿속에 캐스티나가 어른거렸다.

    캐스티나를 좀 더 빨리 찾았다면.

    캐스티나가 지금 이곳에 있었다면.

    그럼 뭔가 달라졌을까?

    “아니, 그럴 리 없어. 난 이제 너 아닌 다른 사람은 아무도 원하지 않아.”

    아이 같은 올렌도 고집에 내가 할 말을 잃었다.

    그때, 응접실 테이블 위 꽃장식을 쓰다듬은 가을 햇살이 테이블을 따라 조각난 그림자 무리를 만들었다.

    그 그림자들이 꼭 주사위가 굴러가는 모양처럼 보였다.

    “…황자님, 저랑 내기하실래요?”

    * * *

    “약혼을 두고 올렌도와 내기를 하기로 하셨다고요?!”

    르나르가 제대로 들은 건지 확인해야겠다는 듯 내게 되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올렌도 황자가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사람을 한 달 안에 찾아내면 올렌도 황자가 저와 파혼해 주기로 했어요.”

    “그리고 찾지 못하면… 대공녀님께서 올렌도 그 자식과 약혼해 주시는 거고요?”

    말하는 르나르 눈이 번뜩 빛났다.

    “대공녀님, 제가 좋아서 올렌도 그 자식을 살려두는 건 줄 아십니까? 그 자식이 대공녀님께 무슨 짓을 했는지 뻔히 알 것 같은데? 대공녀님께서 그 자식을 죽이는 건 안 된다고 그날 잠꼬대하며 제게 매달리지만 않으셨어도…….”

    분에 차 말하는 르나르가 어금니를 꽉 물었다.

    나도 몰랐던 사실인데 소설의 남자 주인공을 죽이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던 내가, 올렌도를 죽이면 안 된단 말을 잠결에 르나르에게 한 모양이었다.

    ‘르나르 성격을 모르지 않으니 무의식중에 걱정이 된 건지….’

    르나르는 괴로워 보였다.

    내가 올렌도를 굳이 보호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니 답답한 것 같았다.

    “대체 어쩔 생각이십니까. 죽이지도 못하게 하시면서 그런 내기를 덜컥 해버리시면.”

    “르나르, 르나르는 내가 그 내기에서 질 것으로 생각해요?”

    “대공녀님과의 결혼을 원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올 일 자체가 없잖아요.”

    “날 믿어요, 르나르. 난 올렌도가 진짜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사람을 알고 있어요. 게다가….”

    “…….”

    “올렌도와 약속한 한 달이 지나기 전에 플루토나 제국에서 반역이 일어날 거예요. 그전까지 나와 내기를 한 올렌도는 나와 우리 가문을 건들지 않을 것이고요.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죠?”

    “아.”

    르나르가 옅은 깨달음의 소리를 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