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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57화 (57/100)
  • 57화

    그 자식이 입을 맞출 땐

    “안나, 짐 챙겨. 짐 챙기면 바로 코웰 저택으로 출발할 거야.”

    “네……? 네……!”

    무도회도 끝나기 전인 이른 시각 르나르와 함께 저택으로 돌아온 나를 본 안나는 당황했으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빠르게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나를 안나에게 데려다준 르나르는 저택 안 어딘가로 사라졌다.

    더글라스를 찾아간 모양이었다.

    나는 코웰 저택으로 거처를 옮기기로 했다.

    올렌도가 황궁에 머문다면 내가 굳이 이 저택에 있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게다가 르나르와 춤을 춘 뒤 날 보던 올렌도 눈빛이 흉흉했다.

    나는 그의 저택인 이 저택에 더 머물면 안 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예전의 올렌도는 내게 해를 가하진 않을 것으로 생각됐지만, 지금의 올렌도는….’

    “안나, 짐 챙기고 있어. 나 르나르를 찾아올게.”

    “네, 아가씨!”

    내가 방 밖으로 나섰다.

    마침 근처를 지나던 하녀들의 수다에 따르면 르나르가 더글라스와 마구간 쪽으로 향했다고 했다.

    나는 마구간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사부작사부작 바닥에 떨어진 마른 나뭇잎을 밟던 내 걸음이 온실 앞에서 멈췄다.

    르나르와 이 저택에서 같이 저녁을 먹게 된 첫날, 그가 내 손등에 입을 맞췄던 온실이었다.

    잠시 고민한 내가 온실로 들어섰다.

    지금 둘러보지 못하면 영영 다시 볼 일이 없을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올렌도의 저택이지만 나와 르나르의 추억이 많이 쌓인 저택이기도 했다.

    르나르에게 첫사랑이란 고백을 받았던 등나무 길.

    그와 함께 유성우가 내리는 걸 보게 됐던 다락방.

    밤마다 리베로 차를 가져다주던 르나르 방.

    르나르가 마법사의 맹세를 했던 내가 오른 나무.

    이 파란 장미가 있는 온실까지….

    파란 장미를 시야 가득 담고 나자 묘한 깨달음이 들었다.

    ‘나는 그때부터 르나르를 좋아하고 있었구나.’

    르나르가 내 손등에 입을 맞췄음에 거부감이 들지 않았던 그 순간부터.

    나는 아마 르나르를 좋아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스스로 몰랐고 인정하지 않았을 뿐.

    ‘그때가 아니면 꽃집에서부터일 수도….’

    어쩌면 나타샤의 꽃집에서부터일 수도 있었다.

    어린 시절 우연히 만난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 르나르와 다시 만나게 된 그곳.

    그를 보고 첫눈에 매력적인 남자라 생각했을 때부터 나는 이미 그에게 홀리게 된 게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같이 지내면서 좋아하게 된 건 줄만 알았는데… 순 얼빠였다니.’

    이 얘기를 해주면 르나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궁금했다.

    ‘르나르한테 말해 줘야지.’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내가 온실 밖으로 나왔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런데 온실 바로 앞에,

    올렌도가 있었다.

    “…기분 좋아 보이네? 나와 다르게.”

    올렌도가 날 향해 걸어왔다.

    시야가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내가 뒷걸음질 쳤다.

    등에 온실 문이 닿았다.

    올렌도 한쪽 볼이 붉었다.

    터넛 황제라도 만나고 오는 길인 걸까?

    “내게 관심도 없던 폐하께서 갑자기 내게 궁으로 들어오라 하시더군. 대공녀 짓인가?”

    “…….”

    “뻔하지, 뭐. 르나르 그 자식 짓이겠지. 그 자식이 내 배다른 형제라니. 대공녀는 알고 있었어?”

    “…….”

    “그래, 알았겠지. 코웰 가문 고명딸이 모르는 게 어딨겠어. 그럼 이것도 알았나? 내가 널 만나러 이곳에 올 거라는 거?”

    “…….”

    “그건 몰랐겠지. 표정을 보니 내가 어떻게 여기 있을 수 있는지 묻고 싶어 하는 표정이야. 알려주지. 몰래 왔어. 나도 내 짐은 챙겨야 할 것 아냐.”

    말하는 올렌도가 내게 한 발 짝 더 다가섰다.

    눈이 커진 내가 온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하지만 문을 닫으려는 순간, 올렌도가 문 사이로 손을 넣었다.

    “으윽…!”

    문틈에 손이 짓이겨진 올렌도가 고통에 찬 신음을 뱉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얼굴을 험하게 구긴 올렌도가 온실 안으로 들어서 내 앞에 섰다.

    “내 자유를 빼앗는 걸로도 모자라. 내 손이라도 망가뜨리려 한 건가?”

    “그건 황자님께서 닫히는 문에 손을 넣으셔서….”

    “널 가두고 발목을 자르려 한 내게 이렇게 복수하다니. 대공녀, 인상적인데? 그럼 이건 어떻게 복수하려나. 이건 어떡할래.”

    씹어뱉듯 말한 올렌도가 내게 입을 맞춰왔다.

    놀란 내가 온 힘을 다해 그를 밀치고 따귀를 때렸다.

    “하.”

    양 볼이 모두 붉어진 올렌도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나한텐 이렇게 나오는 거야? 그 자식이 입을 맞출 땐 가만 있었잖아.”

    “황자님께서 그걸 어떻게….”

    “내 눈앞에서 네가 그 자식과 입 맞추는 걸 보는 내 기분이 어땠을 것 같아? 응? 어땠을 것 같아. 내가 이렇게 널 좋아하는데.”

    올렌도의 연하늘색 눈동자가 눈물로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나는 그 눈을 제대로 볼 수조차 없었다.

    그가 우악스레 움켜쥔 턱이 무척 아팠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느새 도망치려던 날 붙잡고 죽일 듯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몸부림칠수록 그의 손아귀 힘이 강해졌다.

    “가만있어. 움직이지 마. 내 이복동생이 가질 수 있는 건 나도 가져야겠으니까.”

    올렌도의 입술이 내 쇄골을 흡입했다.

    다시 그를 밀치고 달아나려는데 시야가 뒤집혔다.

    처음엔 천장.

    그다음엔 올렌도.

    그다음엔 바닥.

    그리고 다시 올렌도.

    “…….”

    넘어지면서 머리를 부딪친 다음부터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꼭 물속에 잠긴 듯 소음은 귓가에서 웅웅 대며 형체를 잃었다.

    가늘어진 시야 사이로 올렌도가 느리게 움직였다.

    그가 보이지 않게 되자 내 어깨 위로 뜨거운 입술의 감촉이 느껴졌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

    “으…… 으악……!”

    올렌도가 내게서 멀어졌다.

    다시 속도가 붙기 시작한 눈앞의 장면들 사이로 셔츠 전체에 불이 붙은 올렌도가 미친 말처럼 날뛰는 것이 보였다.

    “이런 미친, 대공녀. 너 마녀였어?!”

    쉽게 불을 끄지 못하는 올렌도가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마력이 제멋대로 날뛰고 있기 때문인지 어지러웠다.

    금방이라도 올렌도 앞에서 정신을 잃을 것 같아 난 달리기 시작했다.

    “대공녀!!”

    뒤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난 멈추지 않았다.

    헉- 헉-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눈앞이 흐렸다.

    내가 달리고 있는 곳이 저택 안인지 밖인지조차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저 르나르를 찾아, 르나르를 찾아.

    그의 이름을 부르며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던 그 순간,

    “대공녀님!”

    “꺄악……!”

    누군가 달리는 내 허리를 낚아채 날 멈추게 하면서 놀란 내가 소리쳤다.

    “대공녀님, 저 보세요! 정신 차려 보세요!!”

    익숙한 목소리였디.

    “르, 르나르…!”

    그를 보자 마음이 놓이면서 눈물이 터져버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 나를 르나르가 그의 단단한 품으로 받아냈다.

    “왜 이러세요, 네?! 무슨 일 있으셨던 겁니까!!”

    “…….”

    “대답해 보세요,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꺄악, 르나르 황자님!! 아가씨께서 기절하시잖아요!!”

    나를 흔드는 르나르와 그런 르나르를 말리는 안나의 모습이 점점 흐리게 보였다.

    다급했던 나는 르나르의 옷깃을 잡았다.

    “가지….”

    “…….”

    “말아요….”

    “대공녀님.”

    “옆에….”

    “…….”

    “있어 줘….”

    겨우 그 말을 뱉는데 시야가 흐려졌다.

    안에서 휘몰아치는 마력이 몸을 뚫고 나올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내가 정신을 잃었다.

    의식이 심연 속으로 가라앉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여전히 어두웠다.

    ‘…여긴 어디지?’

    의아하게 느낀 내가 주변을 둘러봤다.

    나는 놀라게 됐다.

    ‘여, 여긴…!’

    코웰 저택 내 방.

    코웰 저택의 내 방.

    침대 위 이불 속.

    게다가 난 웃옷을 벗은 르나르 품에 안겨 있었다.

    코웰 저택 내 방인 걸 깨닫자마자 마음이 편해졌다.

    코웰 저택은 내게 그런 곳이었다.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곳.

    내가 이 세계에서 태어난 이후 쭉 사용해온 이 방에 웃옷을 벗은 르나르가 있다는 건 조금 이질적이었지만….

    “…깨셨습니까?”

    내 움직임에 깬 건지 선잠이 든듯했던 르나르가 반쯤 감긴 눈으로 품 안의 날 들여다봤다.

    그러다 멀쩡한 내 상태를 확인하더니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좀 더 주무세요. 해가 뜨려면 아직 몇 시간은 더 있어야 합니다.”

    그 순간 내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질문은 다른 게 아니었다.

    “저희 이러고 있어도 괜찮아요? 이곳은 코웰 저택이고 아빠와 오빠들이 알면 르나르를 가만두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러자 르나르가 그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씩 웃었다.

    “괜찮습니다. 허락받았거든요.”

    “허락이요? 그게 정말인가요?”

    “제가 대공녀님 안정제 겸 강화제라고 말씀드렸거든요. 제가 대공녀님을 안고 있으면 대공녀님께서 더 빨리 회복하실 거라고 설명해 드렸더니 허락해 주셨습니다. 저 그래서 이렇게 옷도 벗고 있잖아요. 대공녀님께 더 가까이 닿으려고.”

    그제야 난 르나르가 왜 웃옷을 벗고 있었는지를 알게 될 수 있었다.

    “대신 오늘은 안아드리는 것 이상으로는 아무것도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 이상 뭔가 하면 알아서 할복하겠다고… 맹세하고 왔거든요.”

    “할… 뭐라고요……? 무슨 그런 험한 약속을….”

    당황한 내가 말끝을 흐리니 르나르가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날 보는 그의 눈빛은 안쓰러워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고 슬퍼 보이기도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대공녀님 곁에서 멀어졌으면 안 됐는데.”

    아마 내게 무슨 일이 생겼던 건지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르나르. 날 안아주세요.”

    “대공녀님.”

    “내 마력을 안정시켜 주세요. 느끼기 편안하게 만들어주세요.”

    작게 고개를 끄덕인 르나르가 날 조심스레 안아왔다.

    그의 위를 비단 같은 달빛이 덮었다.

    그의 달콤하고 시원한 향이 내 숨이 되었다.

    나만을 위한 휴식처인 르나르의 품에서 안정감을 느끼며 내가 다시 한번 의식의 심연 속으로 빠져들었다.

    악몽 같았던 올렌도와의 순간이 정말 꿈속에서 벌어진 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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