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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남이 훅 들어왔어-56화 (56/100)

56화

예지몽

붉은 장미 정원은 본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붉은 장미 정원 초입에 멈춰 돌아보니 온기 서린 빛을 달빛처럼 내뿜는 본궁이 보였다.

“이곳부터는 혼자 가셔야겠습니다, 대공녀님. 이 붉은 장미 정원은 황족이나 황족의 허락을 받은 이들밖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요.”

시종이 내게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떠났다.

달이 밝았다.

르나르를 찾아 정원 안으로 걷다보니 가을 장미 향이 스민 제법 선선한 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주변을 가득 채운 건 화려한 정원의 짙은 붉은 색 장미들.

그 장미 정원을 내가 둘러보는데,

“대공녀님.”

나를 부르는 달콤한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붉은색 제복을 입은 르나르가 보였다.

‘붉은색이 저렇게 잘 어울릴 수 있다니….’

새삼, 내가 손에 든 장미의 다홍빛보다 르나르가 매혹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절 믿으십니까?”

르나르가 별안간 내게 물었다.

내 고개가 모로 기울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

다음 순간, 르나르가 빠르지만 절제된 걸음으로 내 앞에 섰다.

그가 내게 속삭였다.

“못 믿어도… 지금은 참아야 해.”

꿈에서나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사탕 같은 목소리로.

그러곤 내가 생각이란 것을 하기도 전,

“……!”

내 입술 위로 그의 입술 감촉이 느껴졌다.

크게 놀란 내가 그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이미 내 허리를 꽉 잡은 르나르는 그런 내게 밀리지 않았다.

입 안으로 달고 따뜻한 감각이 들어섰다.

그 감각은 내 혀를 얽고 입천장을 훑더니, 목구멍에 닿기도 하며 내 입 안 구석구석을 탐닉해 갔다.

몸에서 힘이 빠졌다.

숨이 모자랐다.

괴로워진 내가 단단한 어딘가를 정신없이 두드렸다.

그 두드리던 곳이 르나르의 가슴께였단 사실을 나는 살짝 부은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서 떨어졌을 때가 되어서야 알 수 있었다.

“마셔.”

“……?”

“숨.”

‘숨…….’

어떻게 마시는 거였더라…?

탁해진 적갈색 눈동자가 날 삼킬 듯 바라보자 머릿속이 내 하얗게 탈색됐다.

욕정에 가득 찬 눈빛.

부족한 산소에 금방이라도 기절해버릴 것만 같았던,

바로 그때.

르나르의 긴 손가락이 내 허리 옆선을 따라 움직였다.

놀란 내가 숨을 마셨다.

서늘한 밤공기가 파도처럼 밀려들어 와 허파를 덮쳤다. 동시에 르나르의 뜨거운 입술도 내 입술을 덮었다.

바로 방금 숨을 쉬었음에도 나는 정신을 놓아버릴 것만 같았다. 결국 다리가 풀렸다.

하지만 내가 주저앉으려 하니 르나르는 내 허리를 감싸고 들어 올려 날 다시 서게 했다.

내 힘으론 거역할 수 없는 날 휘감은 단단한 팔.

내 꼴은 덫에 걸린 짐승의 그것이었다.

‘이건 고문이다.’

설탕 과자처럼 달콤한 고문.

세상 처음 당해보는 종류의 고문에 의식이 혼미해지고 있었을 바로 그즈음….

‘떠올랐다.’

나는 떠올렸다.

지금 이 장면.

예전에 꿈에서 본 적이 있었다.

‘예지몽이었구나….’

내가 생각하는데 르나르의 입술이 내 입술에서 떨어졌다.

내게서 한발 물러선 그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설마 지금 딴생각하시는 겁니까?”

“…그걸 어떻게.”

“움직임이 둔해지셨잖아요.”

“움직임이요…?

“모르셨습니까? 대공녀님도 제게 혀 얽고 계셨는데.”

순간 화륵, 얼굴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났다.

‘난 전혀 몰랐는데.’

르나르가 그런 날 보며 장난스레 웃었다.

“저한테 홀리셨었나 보네요.”

짙고 붉은 장미들을 배경으로 한 그가 그 어느 때보다 유혹적으로 느껴졌다.

“절… 믿어주세요.”

그런데 르나르가, 별안간 진지해진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올렌도 보다 행복하게 해드리겠습니다. 자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게… 제게 와주세요, 대공녀님….”

나는 의아해졌다.

‘여기서 올렌도 얘기가 갑자기 왜 나오는 거지…?’

“여기서 올렌도 황자 얘기가 갑자기 왜 나오는 거죠?”

“그야 대공녀님께서 올렌도와 함께 저택에서 지내고 계시니까.”

“아, 맞아요. 미안해요, 르나르. 르나르와 약속해 놓고 코웰 저택에 머물지 않았어요. 하지만 반역 준비를 망치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어요. 전에도 말했다시피 제가 코웰 저택에 머물면….”

“잠깐. 그게… 전부입니까…?”

르나르가 이해가 잘되지 않는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반문했다.

“그게 전부가 아니면 또 뭐가 있어야 하죠?”

“…올렌도가…, 좋아졌다든지…?”

“네에?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절로 흘렀다.

르나르가 그런 나를 멍하니 바라봤다.

내내 깊게 가라앉았던 르나르의 적갈색 눈동자가 점점 맑아지는 것이 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대공녀님. 안아봐도 됩니까?”

“안아봐도 되냐고요? 이미 제 허락도 안 받고 입도….”

내가 제대로 불만을 제기하기도 전 르나르가 날 당겨 안았다.

다시 가까워진 그에게서 달고 시원한 향이 훅 하고 풍겼다.

그 향이 그리웠던 내 코끝이 시큰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난 떠올리게 됐다.

르나르가 떠나있던 동안 내게 편지를 보내지 않았었다는 사실.

그래놓고 멀쩡히 황자가 되어 나타나, 그리고 날 외면해, 무도회장에서 내 마음을 무너뜨렸었다는 사실.

내가 르나르를 밀어냈다.

내게서 밀린 르나르가 왜 미냐는 듯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이를 본 나는 화가 벌컥 치솟아 올랐다.

“왜 그렇게 봐요? 뭘 잘했다고? 내게 편지는 한 통도 보내지 않아 놓고?”

“……제가요?”

“쓰겠다고 약속했으면서. 자주 보내겠다고 약속했으면서. 한 통도 보내지 않았잖아요. 그래놓고 이런 입맞춤은 대체….”

내 시야가 잘게 흔들렸다.

르나르가 그런 날 보고 당황했다.

잠시 허둥댄 그가 이내 내 볼을 그의 큰 손으로 감싸더니 부드럽게 눈을 맞춰왔다.

“잠깐, 대공녀님. 잠깐 진정해 보세요. 제가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고요? 마법 전서조 종이를 거의 다 쓰게 되기 직전까지 매일 보냈습니다만… 하루에 두 통씩 보낼 때도 있었는데, 그게 대체 무슨….”

르나르가 내게 건네는 말들이 귓가에서 파도가 되어 부서졌다.

그러곤 퍼즐이 되어 다시 내 머릿속에서 조립됐다.

르나르 말을 이해한 내가 눈을 깜빡였다.

“편지를… 보냈다고요…?”

“알렌에게 물어보시면 될 겁니다. 다시 구하기 어려운 마법 전서조 종이를 아끼지 않는다고 알렌이 절 많이 혼냈으니. 혹시 그레이시아나 제국에 도착했다고 보낸 편지도 못 받으신 겁니까?”

내가 고개를 저었다.

르나르가 허탈하게 웃었다.

“오늘 절 보고 많이 놀라셨겠네요.”

가볍게 웃은 그가 내 손을 들어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그러곤 그의 주머니에서 꺼낸 무언가를 내 손에 쥐여줬다.

“…이게 뭐죠?”

“마법 전서조 종이입니다. 마지막 남은 한 장. 이 한 장은 차마… 보내지 못하겠더라고요. 대공녀님께서 올렌도와 함께 있단 얘기를 듣고 나니.”

“그건 제가 르나르한테 미안….”

“저는 두려웠습니다. 대공녀님 마음이 올렌도에게로 향한 것일까 봐요.”

‘…두려워?’

내가 올렌도와 파혼하지 않아 그가 한 마법사의 맹세로 목숨을 잃게 될까 두려웠던 걸까?

“대체 어쩌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제가 르나르를… 그런 식으로 배신할 리가 없잖아요.”

르나르가 말하는 날 고요한 눈길로 바라봤다.

그러다 갑자기 내 허리를 잡고 공중으로 들어 올린 뒤 그 자리에서 빙글 돌았다.

어안이 벙벙해진 내가 다시 땅을 밟고 섰을 때 마주 본 르나르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깜짝 놀랐잖아요…!”

“이거 해보고 싶었습니다. 레오 대공자님이 하는 거 봤을 때부터 부러웠었거든요.”

이게 무슨 소리지 싶었던 내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르나르가 북부 성에 갔을 때를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벌써 언제 적 일을….’

나는 그런 르나르가 조금 귀엽단 생각이 들었다.

그때, 르나르가 어딘가를 빤히 응시했다.

그러다 갑자기 혼잣말처럼 말했다.

“관람객이 한 명 늘었네요.”

“…관람객이요?”

“제가 떠나기 전에 필요하면 돕는다고 하셨던 말씀 말인데요.”

“……?”

“침대에서 말입니다. 대공저를 방문하기 전날.”

“…아!”

“그거 아직 유효한 거죠?”

르나르가 필요로 할 때 그의 몸에 닿아줄 의사가 있다고 한 말이었다.

근데 내 허락이 필요하긴 하던 건가?

이렇게나 마음대로 입을 맞추고 내내 안아와 놓고?

내가 그런 의문을 안긴 르나르는 또다시 허락 없이 내게 입을 맞춰왔다.

이번엔 내 얼굴을 옆으로 꺾고 내 뒷목을 틀어쥔 채였다.

그의 손아귀 힘에 벌어진 내 입 안으로 르나르의 따뜻한 혀가 들어왔다.

그렇게 한참을 붙들려 있다 풀려났을 때, 내 입술은 그가 남긴 체액들로 번들거리게 됐다.

“그, 그렇게 혀부터 밀어 넣는 거 버릇이에요…!”

부끄러워진 내가 민망한 마음을 숨기려 일부러 선생님 같은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르나르는 부끄러움이란 걸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았다.

“버릇이 아닌 본능입니다. 이것저것 자꾸 넣고 싶은 건.”

날 보는 그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르나르는 서로에 대한 오해가 풀리자마자 곧장 날 데리고 황궁 밖으로 나왔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코웰 저택? 아니면 계시던 저택?”

흑마의 말고삐를 잡으며 르나르가 내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와 이렇게 같은 말을 타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르나르 질문에 이상한 점이 있었다.

“제가 있던 저택이면 황자의 저택이요? 제가 올렌도 황자의 저택으로 돌아가도 르나르는 괜찮다는 건가요?”

괜찮을 것 같지 않은데.

내가 올렌도 황자에게 마음이 생긴 걸까 봐 그렇게 걱정했으면서.

“괜찮습니다. 올렌도 황자는 당장 오늘부터 그 저택에 없을 예정이거든요.”

뒤에서 르나르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르나르의 단단한 팔은 어느새 내 허리를 휘감아 나를 그의 몸에 맞닿게 고정하는 중이었다.

내 어깨선을 따라 르나르의 단단한 가슴 근육이 느껴졌다.

“그게 정말이에요? 올렌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안타깝게도 크게 별일은 아니고, 황제가 올렌도를 황궁에 머물게 할 겁니다. 제가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했거든요.”

“그리고 황제 폐하께서 르나르 말을 들었나요?”

“네. 황제가 저한테 홀렸거든요.”

르나르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의 표정을 보고 싶어 내가 뒤돌았다.

그러자 르나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빤히 내려다봤다.

“지금… 유혹하시는 겁니까…?”

“네?! 아니, 전 그저 쳐다보는….”

르나르의 입술이 내 입술 위에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이렇게 많은 입맞춤을 하루에 다 해도 되는 걸까 싶었을 때,

르나르의 얼굴이 다시 다가와 내 입술을 물었다.

“아…!”

대체 왜 무는 거야.

짐승도 아니고.

“지적받았기 때문에 이번 한 번만 참습니다.”

“그게 참은 거예요?”

“네. 넣고 싶은 거 참은 거요.”

르나르가 낮게 웃었다.

내 허리를 감은 르나르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움직이는 흑마 위에서, 르나르의 뜨거운 숨이 내 머리칼 위로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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